2화
시작은 평범했다.
다만 환자 상태와 수사에 필요한 부분을 묻는 형사의 얼굴이 너무 굳어 있긴 했다. 어딘지 모르게 무척 갑갑해한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범인은 잡았습니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이 도착할 때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아 바로 검거됐습니다.”
“도대체 어떤 원한이 있는지 몰라도 참 잔혹한 일이네요. 보통 사람은 절대 저렇게 깊게 찌르지 못합니다. 복벽이 뚫리는 순간 근육 저항이 상당하거든요.”
형사가 한숨을 쉬었다.
일반적으로 관계자 이외에는 사건 경위를 말하지 않을 텐데 강호성 일로 안면이 있기 때문인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용히 듣던 김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열아홉 살 소녀가 있었다.
풍족한 집은 아니어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힘든 고등학교 삼 년을 열심히 보내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밝고 명랑한 새내기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항상 웃음을 주었다. 대학 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용돈 정도는 스스로 벌겠다며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소녀는 부모의 안타까움이자 기쁨이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 성인이 됐다.
친구들과 모여 성인식을 하며 처음 술자리를 가졌다. 당연히 즐거웠을 테고, 맥주 몇 잔에 발그스름해진 얼굴로 엄마에게 전화를 한 후 귀가를 서둘렀다.
단독주택가의 골목이 드문드문 어두웠지만 어려서부터 수없이 오간 길이었다. 그날따라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을 뿐이었다.
소녀가 사라졌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던 딸이었기에 부모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귀갓길을 몇 번이고 오가며 딸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마저 꺼져 있었다.
결국 신고를 했다.
경찰의 태도는 애매모호했다.
친구들과 성인식을 한 날이라는 사실에 가벼운 일탈로 판단했다. 이런 일이 심심찮게 있다며 실종으로 처리하기 너무 이르다는 말을 반복했다.
맞는 말이었다.
부모는 속이 탈 정도로 전전긍긍하지만,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시간을 잊은 자식이 태연하게 귀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소녀는 아니었다.
다음 날 새벽, 넋이 빠져 돌아왔다.
짐승보다 못한 놈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범인이 잡힌 후에는 이미 웃음과 말을 잃은 지 오래였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지만 호소할 수 있는 곳은 법뿐이었다.
합당한 죗값을 치르기만을 바랐다.
으레 그렇듯 가해자 부모가 합의를 원했다. 합의를 하는 순간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들어 알고 있었던 소녀의 부모는 끝끝내 그들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급기야 천 번 만 번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제 자식을 지키는 일에만 급급했던 가해자 아비라는 자가 도리어 목청을 높였다.
“다 큰 여자가 밤늦게 술에 취해 으슥한 골목을 다닌 게 더 잘못된 거 아니야? 치마까지 짧았다는데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었던 게 빤해. 내 아들이 얼마나 착한지 다들 알잖아? 술 먹고 실수한 것뿐이라고.”
전형적인 가해자 논리였다.
오로지 피해자 탓만 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술과 옷차림은 결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 범죄일 뿐이었고, 가해자는 어떤 말로도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었다.
분노로 온몸이 끓어올랐지만 법을 믿었다. 부모의 마음으로는 사형도 모자라겠지만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징역 육 개월이었다.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초범이라는 이유, 깊게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 술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억지에 가까운 말이 판결의 근거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은 대가가 고작 육 개월이었다. 법과 판사 중 어느 쪽이 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판결임은 분명했다.
가해자 가족은 그마저 과도하다며 억울해했다. 믿을 수 없게도 상당수 동네 사람들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소녀는 절망했다.
부모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졌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로 악착같이 버텼지만 짐승이 출소한 후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다. 피해자는 해를 보지 못하는데 가해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다.
이것이 정의일까?
판결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나도 되는 걸까?
범죄를 저지른 인간에게도 당연히 인권이 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교화하고, 사회적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말도 맞다.
법을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피해자는 없었다. 범죄자에게 신경을 써야 할 시간의 몇 배 이상으로 피해자를 살피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건만 방치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짐승보다 못한 놈은 단 육 개월로 용서받았고, 짓밟힌 사람은 몸과 마음이 다 망가졌건만 어떤 관심과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사건이 잊히는 것 같았다.
소녀의 절망은 더욱 깊어졌다.
어느 날.
어둠 속을 헤매던 소녀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귀하게 키운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고, 애간장이 산산이 끊어지는 충격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가해자는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또 다른 고통과 분노의 시작이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성폭행을 보는 시각, 혹은 남녀 간의 문제라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지워 버린 죄를 지은 놈이 어떻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노만이 남았다.
마음의 칼이 아니라 진짜 칼을 갈았다.
밝은 햇살이 비치는 카페에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는 짐승을 보는 순간 눈이 돌았다. 평범한 여자와 함께 크게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앞세운 자식은 절대 누릴 수 없는 일상의 행복이었다.
품 안에 있던 칼을 꺼냈다.
찔렀다.
아버지의 손이자 딸의 손이었다.
“모든 것을 인정하며 죽었는지, 살았는지부터 묻더군요. 살았다고 하니까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자식이 그렇게 죽었는데 정상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후우!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정확하게 간과 비장을 찔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한 가정이 파괴되고, 아버지가 가장 큰 피해자가 됐네요.”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가해자가 돼 영어의 몸이 될 것이다. 이유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살인자 혹은 전과자라는 말을 들으며 말이다.
김지훈이 말을 잃었다.
필사적으로 살린 사람이 성폭행범이란 사실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에겐 어떤 차별이나 선입견도 갖지 말라고 배웠지만 분노하고 말았다.
성폭행이 죽어 마땅한 죄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연쇄살인마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나라니 최소한 법으로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마땅했다. 적어도 평생 참회하며 피해자에게 용서부터 구했어야 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웃기는 소리였다.
불현듯 희연이 얼굴이 떠오르며 소녀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 인간을 죽이기 위해 칼을 준비한 사람을 말이다.
‘후우! 나 같아도 죽였다.’
중환자실로 들어가기 싫을 정도였다.
하도 답답해 서정호에게 전화를 걸어 수술하게 된 경위를 말하며 넋두리를 토해 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섬뜩하게도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지, 그대로 놔두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서정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놈보다 더한 놈이 쌔고 쌨어.)
“치료하고 싶지 않을 정도예요.”
(무조건 살려.)
“무조건이요? 그런 놈을요?”
(죽으면 살인이고, 살리면 미수야. 법을 피할 수는 없지만, 형량은 줄일 수 있을 거야.)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딸을 먼저 보낸 아버지를 위해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간을 살려야 한다니 아이러니했다. 형량을 줄이기보다 가해자의 죽음을 더 간절히 원할 텐데 말이다.
문득 오래된 영화 하나가 생각났다.
Time to kill.
흑백 간의 갈등과 함께 성폭행당한 딸의 복수를 한 아버지를 그린 영화였다. 짐승보다 못한 놈들을 총으로 쏴 죽였지만 결국 무죄를 받았다.
‘육 개월이 뭐야? 육 개월이. 미국이었으면 애초 저놈에게 가해진 벌부터 달랐겠지. 왜 우리나라는 그런 놈들에게 관대한 거지?’
의사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갈등에 서성이던 김지훈이 중환자실로 돌아갔다. 이성과 감정이 충돌한 결과였지만 자신을 보자마자 달려온 보호자들의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그들에게 피해자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조용히 환자만 바라보았다.
말도 못하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의사와 평범한 아버지 사이에 서서 고민하면 안 되지만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성만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송진우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진우야, 환자를 치료하는 게 이렇게 힘들지 몰랐다. 우리는 어디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 걸까? 사람의 생명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소중한 걸까?”
하소연하듯 상황을 설명했다.
송진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어떻게 생각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의사로서 합당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를 살인자로 만들지 말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묘하면서도 답답한 상황이었다.
재수술을 한 후 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진충기 교수의 환자가 무사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필요한 조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보호자와의 불편한 관계는 분명 가치와 무관한 일이었다.
반면 칼에 찔린 환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지만 의료진의 손은 기계적이었다. 김지훈은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자식 걱정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어미, 툭하면 욕설을 내뱉으며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아버지를 비난하는 아비에게 어떤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아들 때문에 세상을 등진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은 갖고 있는 걸까? 생각이나 할까?’
분명히 가치를 개입시켰다. 그러나 치료해야 할 환자임은 분명했다. 설상가상 재수술의 위험이 조금도 줄지 않는 데다 브로커의 존재까지 거슬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플 지경이었다.
일종의 딜레마였다.
다른 환자가 아니었으면 웃음까지 잃을 뻔했다. 특히 인공항문을 만든 아이가 방긋방긋 웃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한편으로 합병증에 대한 관리도 강화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소송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다. 진상건의 수작이든 아니든 벌써 했어야 하는 일이다.’
특히 간 공여자들이 수술 후 겪는 통증과 무력함 등에 바짝 신경을 기울였다. 대부분 몇 개월 후 소실되지만 분명한 고통임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이래저래 바쁜 나날이었다.
뚝! 뚝! 뚝! 뚝!
칼에 찔린 환자의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모든 의료진이 철저하게 대처하는 한편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기록했다. 아침저녁으로 만나야 하는 보호자에게 재수술 가능성을 계속 설명해야 했다.
주말 집담회가 열렸다.
여느 때와 달리 각종 수술 후 합병증과 칼에 찔린 환자에 대한 인식과 대처가 화두가 됐다.
“진 교수, 간 이식 후 합병증 발생 시 적절한 대처를 위해 유의할 점으로 뭐가 있니?”
“진 교수, 출혈로 인한 이차 문제는 없었나?”
진충기 교수가 집중적으로 질문을 받았다. 상황이 상황인 데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오히려 심도 깊은 토론이 이어졌다.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 과장, 환자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어떤 상황인지 잘 알지만 우리가 의사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돼. 불행하게도 살인자의 치료마저 거부 못하는 직업이 바로 의사야.”
“최선을 다해 보고 있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핑계를 대고 다른 병원으로 보내고 싶을 정도입니다.”
“어떤 의사도 상황을 알면 똑같이 괴로울 거다. 나도 안 좋고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절대 가치관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 안 돼. 이 교수, 안 그래?”
이준영 교수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의사는 마음에 드는 환자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예외를 두는 순간 단 한 명의 환자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지당한 말이었다.
의사도 인간인지라 감정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지만 확실한 통제가 필요했다. 기분 혹은 주관에 따라 환자를 봤다가는 실수하기 마련이고, 결국 환자는 물론 의사의 인생도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불길 하나 날리지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한 시간이었다. 밝은 면 뒤에는 어두운 면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