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55화 (1,155/1,329)

1화

연구실을 찾은 김지훈과 손일석이 서로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으로 안심할 구석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김 과장, 새삼 기본의 중요성을 깨달았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모든 치료를 철저하게 설명하고, 자세하게 기록하는 일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제법 많잖아. 제대로 기록한 병옥이하고 진우 아니었으면 눈앞이 캄캄했을 것 같다.”

“다들 잘 지키니까 그런 면은 걱정이 없지. 그나저나 숙부라는 사람 확실히 브로커 같지 않아?”

“그런 것 같은데 참 어설퍼. 우긴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닌데 대화는 할 생각도 없어 보였고, 결과적으로 분란만 조장한 꼴이잖아. 하필이면 그런 사람에게 휘둘리다니 보호자가 안타까울 지경이야.”

김지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맞아. 애초에 합의할 생각이 없었을지도 몰라. 환자가 사망한 것도 아니고 합병증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브로커까지 끼는 경우는 정말 드물잖아. 질질 시간을 끈 대가가 뭘까?”

“일 년 내내 놀다가 한 탕만 하면 된다는……. 어라? 합병증 발생은 우연이지만 골치 아픈 일이 계속 겹친 꼴이네. 공교롭다는 말로 설명이 되나?”

‘진상건?’

언뜻 같은 생각이 스쳤지만 생각할수록 우스운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손일석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피식 웃었다.

“원래 어떤 일이든 최후의 보스가 가장 강력한 법인데 너무 쩨쩨해. 진상건 정도 레벨이면 큰 거 한 방을 터트리는 게 훨씬 더 어울려.”

“그렇지? 근데 진상건은 병원 운영을 부실하게 하는 것 같고, 여기저기에서 안 좋은 소리까지 자꾸 들려. 그런 상황에서 산하 병원 전체가 같은 조사를 받고 있어. 민 부원장은 심지어 세무조사까지 걱정하고 있는데, 뭔가 터질 것 같지 않아?”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 에휴! 골치 아프다. 난 당분간 환자에게만 집중할게. 이런 일 또 터지면 진짜 병원이 흔들릴지도 몰라.”

손일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웃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버틸 수 있어도 두 번은 힘들 수 있었다. 기우라면 모르지만 진상건 혹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수작을 부렸다고 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상황이었다.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진충기 교수가 아니라 이혁원이었다. 외래 진료가 끝난 지 제법 시간이 지났고, 응급실 환자를 볼 일이 없는 강은미가 함께 왔다.

“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일이야?”

“소아 탈장 환자가 있는데 보호자가 우리 병원에서 수술을 받길 원하세요. 수술을 해도 될까요?”

강은미의 말에 김지훈이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아 수술을 하기에 여타 지역 병원의 여건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전문 병원의 성격이 일종의 제약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혁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아과 진료가 있고, 소아 선천성 질환 수술까지 알려지면 앞으로도 동일한 요구가 계속될 겁니다. 수술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케이스가 많지 않을 텐데 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오는 환자 돌려보내는 일이 쉽진 않지.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만한 병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손일석도 동감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라! 마음 약해지네. 사실 소아과가 있었으면 벌써 했을지도 모르지.’

“좋아. 단, 강은미 선생이 신경 바짝 쓴다는 전제하에서야. 날짜를 잡으려면 집도의부터 정해야…….”

이혁원의 눈이 반짝였다.

강은미도 이혁원을 보고 있었다.

펠로우 딱지가 붙어 그렇지 전문의가 된 지 삼 년째 되는 이혁원이었다. 실력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소아과 의사와 긴밀한 소통까지 가능하니 금상첨화였다.

김지훈이 과장으로서 바로 결정을 내렸다.

“둘이 잘 상의해서 날짜 잡고 수술해.”

“수술할 아이가 또 있으면 어떻게 할까요?”

무리한 수술까지 욕심낼 이혁원이 아니었다.

“사전 보고만 철저히 하자.”

“감사합니다.”

이혁원이 넙죽 인사를 하고는 강은미와 함께 나갔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이 쭉 찢어져 있었다. 눈이 가늘어진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꽃이 피네. 꽃이.”

“무슨 소리야?”

“에휴! 눈치 좀 키우세요.”

“눈치는 무슨! 둘이 얼굴 본 지 한 달도 안 됐어.”

“불꽃 튀는 데는 일 초도 안 걸려.”

‘나이가 몇인데.’

아버지 닮아 무뚝뚝한 구석이 있는 이혁원이 강은미에겐 유독 살뜰하게 대하긴 했다. 이런저런 상상으로 잠시 답답한 마음이 사라졌지만 마냥 입에 올릴 겨를이 없었다.

잠시 후 진충기 교수가 찾아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두고 봐야 알겠지만 잘 해결될 것 같습니다. 환자가 나빠질까 봐 무서웠다는 말을 하긴 하는데, 숙부라는 사람의 정체까지 앞뒤가 맞지 않아요.”

“답답한 일이네요.”

어떤 식으로든 환자가 퇴원하기 전에 해결되길 바랐다. 수술로 끝이 아니라 꾸준히 진료해야 하는 환자기에 더욱 그래야 했다.

퇴근 시간을 또 넘겼다.

다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진충기 교수마저 모처럼 퇴근을 서두르는 마당인데, 김지훈이 어딘가 불안한 시선으로 힐끗 시계를 보며 가운을 벗었다.

그때 요란하게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일복 하나는 끝내주네.”

어김없었다.

(송진우입니다. 35세 남자 환자가 자상으로 내원했습니다. 간과 비장 손상이 발생했습니다.)

“바이탈은?”

(간신히 잡았는데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수술 준비는?”

(마취과에 이미 연락했습니다.)

김지훈이 총알처럼 달려 나갔다.

칼에 찔린 환자라니 정말 드문 환자였다.

피부에 난 열상이 아니라 얼마나 깊게 찔렸는지가 관건이었다. 게다가 정반대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바이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간과 비장이 동시에 손상되다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띠띠띠띠띠띠!

환자의 안색이 무척 창백했다.

급속히 주입되는 수액과 혈액에도 불구하고, 소변은 단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지만 의식 상태는 명료하지 못했다.

저혈량성 쇼크가 상당히 진행됐다.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고, 칼부림 사건이 분명한지 경찰관들만 눈에 띄었다. 강호성 사건 때 보았던 형사까지 와 환자 상태를 물었지만 대답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일단 수술부터 하고 설명드리겠습니다.”

곧바로 수술이 시작됐다.

배를 열었다.

검붉은 피를 제거하고 간과 비장의 손상부터 확인했다. 어느 쪽이 급한지 판단 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정확하고 깊숙하게 칼이 치고 들어갔다. 수술용 천으로 피를 닦아 내기 무섭게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시간이 없었다.

김지훈은 망설이지 않았다.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장기부터.’

간은 거대한 고형 장기다.

외부에서 강하게 압박을 가해도 추가 손상이 유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비장은 압박이 쉽지 않을뿐더러 인위적 조작으로 인한 주변부 손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우선순위는 명확했다.

깊숙한 내부 손상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출혈 속도를 제어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수술용 천 여러 장을 간 손상 부위 위에 쑤셔 넣었다. 기대와 달리 하얀 천이 검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비장부터 제거하자. 켈리!”

비장 동맥이 숨어 있는 위장과의 연결 부위를 거칠게 잡았다. 어떤 식으로든 동맥을 잡아 혈류를 끊는다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따르륵! 따가각!

“맷잼(수술용 가위)! 타이!”

가장 굵은 실로 강하게 연결 조직을 묶었다. 동맥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모든 조직을 잡아 자른 후 비장을 제거했다.

어디선가 피가 흘러나왔다.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지금도 상당한 피를 쏟고 있는 간이 더 급했다. 압박하고 있던 수술용 천을 제거하고 손상 부위를 확인했다.

우측 상복부를 뚫은 칼이 간 우엽을 깊숙이 뚫고 들어갔다. 내부에 존재하는 동맥, 문맥, 정맥, 담도가 모조리 끊어졌을 것이다.

시간이 있다면 절제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바이탈은 불안했고, 지속되는 출혈로 몇 시간에 걸친 수술을 버틸 상황이 아니었다.

‘재수술을 하더라도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다. 일단 살리고 봐야 해.’

“간은 수처로 끝냅니다.”

김지훈이 끝이 뭉뚝한 간 봉합용 바늘을 조심스럽게 찔렀다. 강한 저항은 혈관이나 담도의 존재를 암시하기에 살짝 방향을 바꿔 가며 손상 부위 봉합을 시도했다.

“타이!”

송진우가 간이 푹 들어갈 정도로 강하게 타이했다. 간을 싸고 있는 투명한 막 아래 고여 있던 피가 실을 따라 흘러나왔다.

3센티미터에 불과한 폭에도 불구하고 여러 바늘이 필요했다. 간 후면을 촉진한 결과 간이 관통될 정도로 깊게 찔린 탓이었다.

‘죽이려고 작정을 했겠지만 복벽이 수축해 찔러 넣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가능했지?’

순간 인간의 잔인함에 등골이 서늘했다. 하기에 더더욱 환자를 살려야 했다. 이대로 생을 마감하기에 35살의 나이는 너무 젊었다.

“아무래도 불안해. 한 번 더 수처하자.”

간 봉합은 찌르면 찌를수록 추가 손상을 일으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근본적 치료가 아니라 해도 피가 멈춰야 희망을 볼 수 있었다.

“타이! 컷!”

결과를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비장을 치고 나간 부분을 다시 확인했다.

김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행결장이 하행결장으로 이행되는 부분에 손상이 발견됐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점막이 살아 있는 부분이 관찰됐지만, 단순 봉합으로 끝냈다간 수술 후 필히 터질 것이란 판단이 섰다.

“환자 바이탈 어떻습니까?”

“90에 잡힙니다.”

다른 부위도 아니고 변이 통과하는 대장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수술받은 환자에게 대장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이 발생하면 100퍼센트 패혈증이 유발될 수밖에 없었다.

사망이었다.

“송진우 선생, 자르자. 켈리!”

빠르게 동맥을 잡았다.

손상받은 대장을 자른 후 최대한 신중을 기하면서도 빠르게 연결했다. 김지훈의 수처와 송진우의 타이는 정확하면서도 확실했다.

“컷!”

급한 불은 껐다.

수술 부위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여기저기에서 출혈이 관찰됐다.

비장이나 대장 주변은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간은 달랐다. 더 이상의 봉합은 불가했고,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절제였다.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수술이었다.

갖가지 합병증이 우려됐지만 간의 회복력과 정상적인 혈액 응고 기능을 믿어야 했다. 최악의 경우 재수술이 필요하더라도 전신 상태가 좋아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드레인 박고 끝내자.”

모든 수술이 마무리됐다.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안면이 있는 형사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달려왔지만 설명은 나중이었다. 우려한 대로 출혈 양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양이 적어 자연적인 지혈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후우! 인간이 참 잔인해.”

“그러게 말입니다. 자상 환자가 많지는 않지만 이렇게 깊게 찔린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나도 처음이야. 근육이 칼을 잡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어휴! 벼르고 찔렀어도 이 정도로 깊게 찌르다니, 혹시 조폭일까?”

영화보다 현실이 더 잔인할 수 있었다.

수술 후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킨 김지훈이 보호자를 만났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부모와 형이 달려와 환자 상태를 물었다.

“간, 비장, 대장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환자분 상태가 워낙 나빠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재수술이 필요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살 수 있는 겁니까?”

“지켜봐야 합니다.”

부모의 다리가 풀렸다.

“지금 볼 수 있습니까?”

“아직 의식이 흐릿합니다. 의식을 되찾고 안정이 된 후에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환자 아버지가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그 미친놈이 우리 애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작정을 했어. 자식 간수를 잘해야지, 왜 내 아들 탓을 해?”

가해자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주관적 가치를 배제해야 하는 의사가 가타부타 말하는 것은 금기였다. 더구나 이미 홍역을 치르고 있는 마당인데 또 한 명의 환자를 재수술해야 할 수도 있어 걱정이 앞섰다.

‘간 출혈이 제대로 잡힐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지났다.

김지훈이 중환자실을 떠나지 못했다.

당장 배를 열어야 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피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과다한 음주 시 특징적으로 반응하는 간 효소인 감마 GTP까지 증가돼 있어 불안이 증폭됐다.

‘간 기능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아 더 걱정이네.’

보호자에게 손상 정도가 깊어 재수술 가능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했다.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누군가가 개입하면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답답한 가운데 면담을 끝냈다.

‘소송 생각은 집어치우고 환자에게만 집중하자. 더 위중한 환자도 잘 회복됐잖아.’

그때 어제 보았던 형사가 바로 다가왔다.

나직한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돌연 분노의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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