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54화 (1,154/1,329)

20화

심각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리며 민정호를 보았다.

“신 교수님, 김 과장님은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절대 그런 말은 안 하죠.”

“그럼 믿으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이번 일도 냄새가 납니다. 만일 진상건 이사장과 관련이 있다면 생각을 달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나 브로커가 낄 수 있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반면 병원 안팎만 시끄러울 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정말 치졸한 복수극이라도 벌이는 걸까?

신현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줄줄이 골치 아픈 일이 터지는 게 이상하긴 하네요. 관련이 있든 없든 역시 재단 이사로서 훨씬 더 적극적으로 본원의 일을 관여해야겠군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견제할 겨를도 없이 단숨에 땅을 가로챌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겁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재단이 나설 필요 없이 병원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넘기는 방식이겠죠.”

“본원과 천안 병원을 위태롭게 만들어야 할 텐데, 우리 병원만이 아니라 산하 병원 전체가 조사, 점검에 실사까지 당하는 걸 봐서는 무리한 추측이 아닐 것 같네요.”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현수가 눈가를 문질렀다.

“이렇게 되면 갑작스러운 설비나 장비 투자도 주의해야겠지만 세무조사까지 각오해야겠군요.”

“잘 보셨습니다. 병원을 지키고 싶으시면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자존심을 굽혀서라도 본원과 우호적인 재단 이사와의 끈을 더욱 공고히 하십시오.”

때 아닌 웃음이 터졌다.

“본원까지 걱정하다니, 이것도 계약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독립채산제라고 하지만 본원과 완전히 별개의 병원이기 힘들지 않습니까? 따로 간다면 결국 다 같이 망하게 되는 수순을 밟게 될 겁니다.”

“민 부원장님이 말하는 때가 와도 돈이 없으면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재정으로 가능할까요?”

“제가 비용은 줄일 수 있지만 돈을 벌어 주지는 못합니다. 전적으로 교수님들 손에 달렸습니다.”

“우리 손이라! 김 과장에게도 우리 생각을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운영이사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사실이기도 하고요.”

민정호가 묘한 눈길로 신현수를 보았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셨다면서 아직 김 과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기대가 됩니다.”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무서운 사람이었다.

정직한 이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불의를 보면 결코 참지 않았다. 감히 쳐다보기 힘든 위치에서 병원을 쥐고 흔들었던 금경태부터 시작해 책임을 가진 자에게는 더욱 엄격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결코 방기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요.”

신현수의 목소리에 신뢰가 가득했다.

점심 무렵.

진충기 교수가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아침에 벌어진 일을 말하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상의하고자 했지만 이준영 교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김 과장이 책임진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럼 맡기면 돼. 진 교수는 일단 환자에게만 신경 써. 지금은 그게 맞아.”

진충기 교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심할 정도로 짧은 답이건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한 번쯤 확인할 법도 한데 과실 여부는 묻지도 않았다. 김지훈은 물론 자신에게도 더없는 신뢰만 보일 뿐이었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김지훈이었다.

(이준영 선생님과 계셨군요. 다른 일 없으시면 지금 바로 소회의실에서 뵀으면 합니다.)

“무슨 일로?”

(해결해야죠. 빨리 오십시오.)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

이준영 교수가 손짓을 했다.

“진 교수, 가 봐.”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와 태도였다.

이상스레 마음이 놓인 진충기 교수가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그 짧은 사이에 해결책이 나올 일이 아닐 텐데 의아한 일이기도 했다.

관련된 의료진이 모두 모였다.

“무슨 일 때문에 모였는지 다들 잘 아실 겁니다. 각자 파트에서 환자에게 행한 치료와 처치가 정확하게 기재됐는지 다시 한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혹, 누락된 부분이 있더라도 절대 수정이나 첨가를 하시면 안 됩니다.”

김지훈이 손일석과 함께 진충기 교수와 따로 자리를 만들었다.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 후 마치 과실을 의심하는 것처럼 매서운 질문을 던졌다.

“혈관 기형 처리 시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까? 문합 시 봉합 간격을 보다 좁혔으면 출혈을 막을 수 있지 않았습니까?”

“기형이 발생한 부분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정상적인 부분과 연결을 고집하다간 혈관 연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봉합 간격은 적정했고, 간격을 더 좁혔으면 혈전의 위험성이 훨씬 더 커졌을 겁니다.”

“재수술 시점은 적당했습니까?”

“출혈을 인지한 후 면밀하게 관찰했고, 보존 치료가 불가하다는 판단을 내린 직후 시행했습니다.”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확인했다.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김지훈과 손일석은 일과가 끝난 후에도 상당 시간 진충기 교수를 몰아붙였다. 마치 일면식도 없는 의사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지훈이 최종 결론을 내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손 교수와 제 결론은 어떤 실수나 과실도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보호자는 따로 만나셨습니까?”

“숙부라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브로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무척 힘드실 수도 있지만 원칙대로 대응했으면 합니다. 오늘 일이 서운하실 수도 있지만 철저하게 환자 측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진충기 교수가 김지훈을 다시 보았다.

분쟁의 핵심은 객관성 확보였다.

자신의 수술을 낱낱이 파헤치는 모습에 서운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깔끔한 일 처리였다. 동료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가운데 분쟁에 대처하다간 무리수를 범하고도 남았다.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한다면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고마웠다.

홀가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고맙고, 죄송합니다.”

“선생님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좋은 경험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렵더라도 환자에게만 집중해 주십시오.”

함께 중환자실로 향했다.

늦은 시간 탓인지 보호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이 수술한 환자를 보며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무작정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하지 못할 합병증에는 의사도 속수무책이란 사실에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다음 날.

일방적으로 약속이 취소됐다.

진충기 교수와 만난 보호자들이 숙부라는 사람에게 전권을 위임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환자는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데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행정적인 문제들이 차례로 끝날 때까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피켓을 드는 사태가 없어 다행이었지만 병원 입장에서 유리할 일이 없었다.

은근히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이래서 과실 유무와 상관없이 합의를 하려고 하나?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원칙을 지켜야 탈이 없는 법이다.’

오 일이 지나서야 자리가 만들어졌다.

김지훈, 손일석, 진충기.

환자의 직계가족들과 숙부라는 사람.

숙부의 입이 말렸다.

‘이쯤이면 바짝 애가 탔겠지.’

“그동안 알아볼 일이 많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무조건 환자 측이 약자일 수밖에 없는데 준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합의안을 갖고 왔겠죠?”

“갖고 왔습니다.”

김지훈이 보호자들을 보았다.

숙부를 자처하는 사람 말고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도 진충기 교수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어떤 말에 솔깃했을까? 결국 돈이겠지?’

씁쓸한 일이었지만 더욱 꼬인 상황이기에 감정적인 대응은 금물이었다. 말 한마디라도 삐끗하면 끝까지 물고 넘어질 것이 빤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오 일 동안 여기저기 알아보셨으면 잘 아시겠지만, 치료 기록을 다시 한번 철저히 확인한 결과 수술 팀의 어떤 실수나 과실은 없었습니다.”

숙부라는 사람이 눈을 부릅떴다.

“그건 병원 입장이고.”

“의학적 소견입니다.”

“그래서?”

말 몇 마디에 분위기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보상이나 무료 치료는 불가합니다.”

“뭐요?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전에 한 말은 뭐야?”

“보호자가 원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입장은 명확합니다. 불미한 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환자분을 치료하겠습니다. 하지만 신뢰가 깨진 이상 다른 병원을 원하신다면 이송이 가능한 시점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람을 반병신 만들어 놓고 책임을 안 지겠다? 법대로 하자 이거야? 좋아. 사람 잘못 봤어. 의료 소송이 어렵다고 고분고분하게 물러날 줄 알아? 방송에 알려지면 당신들 다 끝이야.”

김지훈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정말 소송까지 가자 이거야? 일이 년 걸린다고 우리가 포기할 줄 알아?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손일석 선생.”

손일석이 잠시 보호자들에게 시선을 준 후 서류 두 뭉텅이를 내밀었다. 하나는 진료 차트 원본이었고, 다른 하나는 복사본이었다.

“간 이식 수술 팀 중 하나를 맡고 있는 손일석입니다. 의사의 양심을 걸고 치료 기록을 검토한 결과 과장님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끼리끼리 뭘 못해?”

“다른 병원 의사나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할 자료로 차트 복사본을 준비했습니다. 누락이나 수정된 부분이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그걸 어떻게 믿어?”

“이 중 하나는 원본입니다. 확인해 보시면 우려할 만한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원본에 수정 흔적이 있다면 치료 기록을 검수한 의사로서 더 큰 책임을 물어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아예 소송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숙부라는 사람이 움찔거렸다.

손일석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혹시 해서 추가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병원 앞에서 시위 같은 걸 하신다면 적극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나이가 제법 있으신데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말씀 가려서 하십시오. 계속 반말을 하시면 연장자로 대우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보호자들의 얼굴까지 발개졌다.

“그래서요?”

“말 그대로입니다. 진료 방해와 다른 환자분들에게 끼친 악영향까지 모두 법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경찰이 개입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너무 믿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병원의 미온적인 대처가 주요 원인 중 하나니까요.”

“내가 언론에 못 알릴 것 같아? 다들 좋다고 달려들어 물고 뜯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말씀이 계속 짧으십니다.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지 백날 목소리 높여 봐야 원하는 일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어차피 대처는 우리가 해야 하니까 알리실 거면 알리십시오.”

으드득! 이 가는 소리만 들렸다.

손일석이 보호자들을 보았다.

“집도의도 우리 과를 대표하는 과장도 아닙니다만,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해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먼저 간 이식을 하는 의사로서 심려를 끼친 점 사과드립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병원은 환자분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보호자분들도 돈이 아닌 환자분부터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 답도 들리지 않았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병원 측의 의사는 충분히 전했다.

남은 일은 치료를 해야 할 집도의와 보호자 사이의 대화뿐이었다.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를 위해서라도 흐른 시간의 간극을 메워야 했다.

난데없는 요구가 보호자들의 진짜 뜻이었다면 법정에서 만날 테고, 아니었다면 접점을 찾을 것이다. 물론 손상된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진 교수님, 직계 보호자분들과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손 교수, 나갑시다. 숙부 되시는 분도 자리를 피해 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도 가족이야.”

“결정권을 가진 분은 아닙니다. 최악의 경우 소송이 벌어지면 환자분과 보호자분들을 대신할 수도 없고요. 보호자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당한 태도 속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무작정 병원과 의사를 보호하려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잠시 뜸을 들이던 보호자가 입을 열었다.

“나가 계세요.”

김지훈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정말 숙부였다면 함께해야 했다.

최소 호칭 정도는 붙여야 했다.

처음부터 분란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의료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브로커일 가능성이 더욱 농후해졌다.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도 보호자는 감언이설에 솔깃했을 것이다.

돈 앞에 무력한 존재가 인간이기도 했다.

진충기 교수와의 대화가 이어졌다.

회의실을 나온 숙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얼굴을 붉혔다. 궁금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로써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결국 돈이 아니라 의사와 보호자 간의 신뢰가 결정을 좌우할 것이다. 원칙만 지키면 아무 문제도 없을 줄 알았던 김지훈에게도 정말 생각이 많아지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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