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다음 날, 병원이 어수선했다.
아침부터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온 병원을 들쑤시고 다녔다. 정당한 공무 집행이고, 진료에 큰 방해가 되지도 않았지만 직원들 업무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 일간의 실사까지 시작됐다. 개원 후 시행한 모든 치료 내역과 보험 청구를 비교하고, 비급여 부분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하다못해 백 원 안팎에 불과한 주사제의 도입 비용과 청구 비용까지 샅샅이 뒤졌다.
처음 받은 실사인 데다 수시로 벌어지는 조사도 아니기에 전담 직원을 붙여도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총괄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신현수와 민정호까지 자신들의 일을 뒤로하고 실사에 임해야 했다.
단, 어떤 일이 있어도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환자 치료였고, 대다수 의료진 상황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김지훈을 비롯해 병원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두 달 전에 간 이식 받은 환자 진료 기록 다시 검토해 달라고요? 뭐가 문제래요?”
“환자와 보호자가 기억을 잘 못한다고, 기록대로 치료를 했는지 확인해야 한답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 않은 치료를 한 것으로 청구했다면 그것이 바로 부당 청구기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상당 기간 중환자실에서 치료한 환자의 기억에 근거하다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설마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겠지. 기계적인 조사의 단점일 거야.’
제법 시간을 빼앗겼지만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 차차 수월해지기 마련이었다. 실사 팀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관련된 과에 빠르게 연락해 적절하게 대처했다.
진료 외적인 일로 너무 바쁜 며칠이었다.
모든 조사가 막바지에 달했다.
여전히 바쁘긴 해도 조사 기간 내내 성실하게 임했고, 결과에 따라 대처하는 일만 남았다. 관계자 모두 진이 빠지긴 했다. 마지막 요청을 해결한 김지훈도 맥이 빠져 한동안 의자에 몸을 묻은 채 휴식을 취해야 했다.
‘오늘로 끝인가? 생각보다 훨씬 힘드네. 스승님도 간암 환자 조사 때문에 고역을 치르셨는데 커피나 한 잔 대접할까? 믹스? 블랙?’
곧 오후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뻐근한 어깨를 휘휘 돌리며 외래에 도착한 김지훈이 복도에 선 채 눈만 껌벅거렸다. 진충기 교수 진료실 앞이 낯선 사람들로 붐볐다. 한두 명은 중환자실 앞에서 본 적이 있었고, 재수술한 환자의 보호자들이 분명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환자가 잘못됐나?’
아침까지만 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퇴원 후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환자가 바로 간 이식 환자였다. 덜컥 겁이 난 김지훈이 서둘러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십니까?”
“일반외과 과장 김지훈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당신이 과장이었어? 살려 달라고 왔는데 재수술까지 해 놓고 책임도 안 지다니, 뭐 하는 사람입니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시비조였다.
“환자와 어떻게 되십니까?”
“나 환자 숙부 되는 사람이요. 환자가 중요하지, 관계가 중요합니까? 내가 얼마나 아끼는 조카인데, 저 지경을 만들어 놓고 뒷짐을 지고 있어?”
일단 이런 일이 벌어지면 잘잘못을 떠나 대부분의 의사가 약자가 된다. 심리적으로 위축될뿐더러 병원에 끼치는 악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상황부터 파악해야 했다.
진충기 교수를 둘러싸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간신히 밀어내고 단둘이 마주 앉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혹시 환자에게…….”
“환자는 괜찮습니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저 사람들이 나타나 항의를 하는 통에 나도 정신이 없네요.”
“중환자실 앞에서 매번 보이던 보호자들이 안 보이던데, 말씀은 나눠 보셨습니까?”
“그분들은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잘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져 미안합니다.”
진충기 교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단순히 보호자들의 항의 차원으로 볼 상황이 아니었다. 한 무리로 달려온 낯선 사람들과 직계 보호자의 부재가 이상스레 마음에 걸렸다.
“선생님, 제게 맡기십시오.”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과장으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현재 환자가 괜찮고, 그동안 우리 설명에 충분히 수긍했는데 갑자기 항의를 하다니 이상하네요. 게다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면 흔히 보는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후 필요하다면 병원 차원에서 대응하겠습니다.”
“간 이식 환자를 재수술했습니다. 그 탓에 중환자실 입원 기간까지 길어졌고요. 실수가 없다고 해도 어느 누구나 보일 수 있는 반응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일단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하면 조용히 지나갈 수 없긴 했다. 종종 유세라도 떨고 싶은지 사돈의 팔촌이라고 해도 무방한 사람들이 찾아와 생떼나 억지를 부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마치 그것이 환자를 위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과실이 없는 이상 대부분 한두 번으로 끝나지만 이번은 느낌이 정말 좋지 않았다.
김지훈이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흥분은 아예 금물이었다.
“선생님은 환자에게만 집중하십시오. 집도하신 이상 밖에 있는 사람들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필요한 경우 자주 보던 보호자들을 따로 만나도 되겠습니까?”
“내 입장을 고려해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선생님! 당연히 선생님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오신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 아니라 집도의 혼자 감당하면서 전적으로 책임질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어도 전 똑같이 대응했을 겁니다.”
진충기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동료이자 과장으로서 책임을 지겠다는 말인가?’
재수술 직후 수술 팀을 만나 과실 여부에 대해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 이후 자신에게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고, 태도도 달라지지 않았다.
믿는다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 여유를 갖기 힘든 자신의 입장을 고려했을 뿐 오해에 불과했다. 동료로서 함께 대처해 그만큼 압박과 부담을 덜어 주려는 마음이었다.
“당당하게 대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소나기는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진충기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따로 자리를 만들자는 김지훈의 말에 보호자를 자처한 사람들이 순순히 따랐다. 과장으로서 만난다고 했지만 방금 전까지 보였던 태도를 볼 때 의외의 일이었다.
의사로서 해야 할 말은 명확했다.
“환자분이 걱정돼서 오셨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재수술로 인해 불안하시겠지만 현재 순조롭게 회복 중이니까 진정하시고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애초에 재수술을 하지 말았어야지. 가뜩이나 간이 나빠 힘든데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재수술까지 하게 된 원인은 혈관 기형이 있었기 때문이고, 직계가족분들에게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불행히 출혈이 발생했지만 해당 수술 팀이 잘 대처했고, 결론적으로 불가피하게 발생한 합병증입니다. 책임을 거론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중환자실에 있는데 책임이 없다니 무슨 소리야? 사람 하나 죽어도 꿈쩍하지 않을 사람이네. 이래서 병원을 믿으면 안 된다니까. 발뺌하지 말아요.”
재수술이 아니었어도 중환자실에서 치료해야 하는 환자였다. 수술 전에 설명을 들은 보호자들이었으면 중환자실 얘기는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환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건가?’
“최선을 다해 치료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책임을 지라고, 책임을. 우리 조카 어떻게 할 거야?”
막무가내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더욱이 이들 중 누구도 환자를 책임질 위치가 아니라는 점이 눈에 보였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수술 전에 설명한 사안까지 일일이 모두 다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직계가족분들과 함께 다시 만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직계가 아니면 누가 직계란 말이야?”
“정확하게 어떤 관계이십니까?”
“숙부면 숙부지, 정확한 관계가 어디 있어? 사고를 냈으면 책임을 져야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을 내뱉었다.
의료사고가 기정사실인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목소리를 높여 회의실 밖에서도 다 들릴 정도였다. 몇몇이 벌떡 일어나 위협적인 행동까지 했다.
김지훈이 순간 당황했다.
힘으로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순간 진충기 교수였다면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사람들의 억지에 휘말려 나까지 흥분하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정체가 뭘까? 정말 보호자들인가?’
김지훈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때 신현수와 민정호가 들어왔다.
병원 대표와 행정부원장이라는 말에 잠시 멈칫거렸지만 오히려 잘됐다는 듯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대화가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폭력이 우려되는 지경까지 몰렸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었다.
절대 보호자들이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김지훈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앉으세요. 앉아요.”
삿대질을 해 대던 보호자들이 깜짝 놀라며 기세에 눌려 주춤주춤 자리에 앉았다. 한 성깔 하는 의사를 만난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차근차근 설명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 설명한답시고 제자리를 맴맴 도는 것보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한 사람이 대표해서 말씀하세요.”
숙부라고 한 사람이 나섰다.
“내가 경우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병원이 워낙 큰 잘못을 했으니까 확실하게 합시다. 치료비 전액을 무료로 하고,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까지 해야 될 겁니다.”
“우리 잘못이 크다고 했습니까?”
“그럼 잘못이 없다는 거요? 원하는 걸 들어주면 되지, 재수술까지 해 놓고 왜 자꾸 딴소리를 해? 우린 시위에 소송까지 생각하고 있으니까, 병원 망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억지를 넘어 협박이었다. 더구나 소송은 몰라도 시위는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울뿐더러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대화 내내 느껴지던 찜찜함의 이유를 찾았다.
‘브로커다!’
확인해야 했다.
“피해 보상으로 얼마를 원합니까?”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신현수가 다급히 입을 열려는 순간 민정호가 지그시 팔을 잡았다.
‘지켜보십시오.’
“오천!”
숨도 쉬지 않고 액수를 말했다. 통상 볼 수 있는 보호자들의 태도가 절대 아니었고, 액수로 보아 중간에서 나눠 먹고도 남았다.
확신이 섰다.
사실 많은 브로커들이 병원을 기웃거리며 돈이 될 구석만 노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심지어 의료사고 전문이라며 공공연히 명함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다만 치밀하지 못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돈 뜯어내는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여겼다.
입 밖으로 낼 말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다시 만나죠.”
“이제야 말이 통하네. 얼마 안 된 병원이라고 봐줄 생각은 없습니다. 의료사고를 당한 환자부터 살아야 하고, 당연한 요구니까 확실하게 합시다.”
“좋습니다. 단, 직계가족분들의 동의가 없으면 어떤 약속도 의미가 없습니다. 다음 자리에서는 반드시 함께 나오셔야 합니다.”
“보상만 해 준다면야.”
시끄러웠던 자리가 끝났다.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김 과장, 이 자리에서 바로 요구를 들어준다고 하면 어떻게 해? 진충기 선생님 과실이 전혀 없잖아.”
“내가 언제?”
“좋다며?”
“어떻게 들었든 결국 서로 봐주지 말자는 소리야. 민 부원장님, 어때요? 브로커가 낀 것 같죠?”
“그렇게 보입니다.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압니다. 이후의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진충기 선생님의 일이자 우리 과 책임입니다. 할 일도 많은데 일단 내게 맡겨요. 손 교수와 함께 처리할 생각입니다.”
“김 과장님이요?”
“소송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우리 과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습니다. 진충기 선생님의 잘못이 없는 이상 합의할 이유도, 생각도 없습니다. 늦었네. 회진이 있어 먼저 갑니다.”
신현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만만히 볼 일이 아닌데. 민 부원장님, 합의할 생각이 있다는 소리로 들었으면 내일 더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겠어요?”
무슨 생각인지 민정호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웃음기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