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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50화 (1,150/1,329)

16화

응급실에 도착했다.

아이는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기에 연령에 맞게 접근해야 했다. 하루 뒤면 소아과 펠로우가 온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김지훈과 손일석도 모자라 고경아에 취재진까지 우르르 들어가자, 마침 환자가 있어 나와 있던 서도훈과 이혁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과장님, 무슨 일입니까?”

“무료 치료 프로그램 알지? 선천성 거대 결장을 앓고 있는 아이인데 열이 나기 시작했어.”

그 한마디로 끝이었다.

즉각 필요한 조치를 시작했다.

“으아앙!”

쉴 새 없이 울었다.

언제 보아도 아픈 아이는 보기 힘들었다.

검사 하나하나는 물론 가장 기본인 수액 라인을 잡는 일까지 쉬운 일이 없었다. 혈관이 너무 가늘거나 찾기 힘들어 발등이나 이마의 혈관에 바늘을 꽂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기본 검사만 하고 바로 입원시키자. 이혁원 선생, 내일 올 소아과 펠로우와 함께 책임지고 봐.”

“수술은 언제 하실 겁니까?”

“아이 안정되면 응급으로라도 빨리해야지.”

“알겠습니다.”

비록 소아과 의사는 없었지만 노련한 의료진답게 대응이 빨랐다. 무사히 아이를 입원시키고, 한숨 돌린 김지훈이 아직도 촬영 중인 방송국 직원들에게 치료 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다. 몇 번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된 듯 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손일석이 물끄러미 보다 말고 후다닥 누군가를 찾았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상당히 놀란 채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경희가 떠오른 것이다.

“여보, 오늘 꽤 놀랐지? 흔히 있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처형하고 먼저 들어가 쉬어.”

“당신은?”

“김 과장하고 같이 들어갈게.”

고경희가 고경아와 함께 집으로 향한 후에도 제법 시간이 걸려 일종의 취재가 끝났다. 그사이 서도진과 이혁원은 응급 수술을 들어갔고, 응급실은 한산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힐끗 서로를 보았다.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일석아, 오늘 처제가 따라온 이유가…….”

“아이를 바로 입원시켜야 할 줄은 몰랐지만 위탁 부모를 만난 일은 나쁜 선택이 아닌 것 같아. 이것저것 할 만큼 다 해 봤지만…….”

왜애애애앵!

그때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119 구급대가 피투성이가 된 환자를 급히 옮기며 소리쳤다. 경험이 많을 텐데 응급실이 왕왕 울릴 만큼 다급한 목소리였다.

“낙상 환자입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이미 바이탈이 흔들렸다.

여기저기 찢어진 채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창백한 안색과 빠른 호흡, 흐려지는 의식과 부풀어 오른 복부는 혈복강을 강하게 암시했다.

다급히 바이탈을 잡으며 검사를 한 결과 비장이 파열됐다. 복합 손상이 없어 다행이었지만 수술 중인 주말 당직 팀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써전은 눈앞의 환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일석아, 간만에 같이 수술할까?”

“좋지. 집도는 내가 한다.”

응급 수술이 시작됐다.

최고의 써전으로 구성된 최고의 수술 팀이었다.

배를 열고, 복강 내부를 세척한 후 비장을 절제하기까지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동시에 수술이 끝나 먼저 수술을 시작했던 서도훈과 이혁원이 놀랄 정도였다. 당연히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었고, 환자는 무사히 병실로 옮겨졌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일복 때문이 아니었다.

응급 수술 탓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제 와 다시 꺼내기에는 상황도 애매모호했다. 게다가 입원한 아이까지 걱정이었다.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친모도 아닌 위탁모의 눈물을 계속 볼 줄 몰랐다. 낳은 정과 기른 정 중 어느 쪽이 더 진한지, 어떤 부모와 자랐을 때 아이가 더 행복할지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다 커서 생모를 찾는 사람도 키워 준 부모가 한없는 사랑을 줬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결국 함께 집으로 향하면서도 물어보지 못했고,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손일석은 동료이기 전에 가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입양이 최선일까? 일석이 부모님이나 장인, 장모님은 알고 계신가? 내가 관여해도 되는 일일까?’

상반된 감정에 혼란스러웠지만 곧 터놓고 얘기해야 할 일임은 분명했다. 반평생을 넘게 함께 지내 온 친구이자 식구로서 말이다.

***

새로운 주가 시작됐다.

엄청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군 복무 중인 한수영을 제외한 펠로우들이 근무를 시작했다. 내과, 방사선과, 마취과는 물론 예정대로 파견 근무를 나온 소아과 펠로우까지 합류한 외과 모두 새 얼굴을 반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로운 피는 곧 활력이었다.

확연하게 늘어난 인원은 전문 병원의 능력과 저력을 한 단계 끌어 올리고도 남았다. 항상 인원 부족에 시달리던 수술 팀도 한결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김지훈은 과장으로서 새로운 펠로우들을 맞이했고, 특히 혼자 근무하게 된 소아과 펠로우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강은미 선생, 잘 부탁해.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내게 말하면 돼.”

“감사합니다.”

“선천성 거대 결장으로 입원한 육 개월 된 아이가 있어. 일단 이혁원 선생이 맡았고, 상태 좋아지는 대로 수술 들어가야 하니까 함께 잘 봐줘.”

“걱정하지 마세요.”

여의사는 달랑 혼자였다.

남자 의사들만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숙식까지 해결하려면 애로 사항이 제법 있을 것이다. 이혁원에게 단단히 당부하고 수술을 들어갔다.

하루해가 빠르게 저물었다.

간 이식을 끝내고 나온 김지훈이 저녁 늦게 연구실을 찾았다. 이준영 교수와 김진호 교수의 이취임식이 이미 끝나 상당히 아쉬웠지만 이 또한 적응해야 할 변화였다.

‘아무리 원한 일이라고 해도 착잡하셨을 텐데 얼굴도 못 비쳤네. 퇴근은 잘하셨나?’

울적했다.

그때 어디선가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호호호!

의사들만의 공간이었다.

복도가 웅웅 울릴 정도로 크게 웃어 왠지 씁쓸하면서도 괘씸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부아까지 치밀었다.

이혁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이 자식이! 아버지가 이임식을 한 날인데!’

김지훈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벌컥 문을 열려다 말고 주춤거렸다.

강은미와 함께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단둘이 말이다.

외과와 소아과 펠로우로 만나고 있을 테니 불미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미혼인 성인 남녀 사이의 일을 두고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문득 그동안 이혁원이 이렇게 즐거운 웃음을 보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때문인지 울컥했던 마음이 스르르 진정됐다.

‘이게 화를 낼 일인가?’

김지훈의 기분일 뿐이었다.

부원장 사임 문제도 이준영 교수와 이혁원 이상으로 깊은 대화를 나눴을 리 없었다. 어쩌면 이혁원이 더 어른스럽게 대처하는지도 몰랐다.

공연한 한숨만 내쉬던 김지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각해 보니 함께 잘해 보라고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환자에 대해 상의한다고 반드시 진지할 필요도 없었다. 더구나 강은미 역시 학교 후배인 데다 친한 사이였다면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이다.

‘환자만 제대로 봐.’

김지훈이 살그머니 퇴근했다.

자신도 모르게.

다음 날.

진료를 마친 김지훈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신현수, 민정호와 함께 신관 공사에 대해 논의하고, 진충기 교수의 간 이식 준비 팀이 잘 돌아가는지도 신경 써야 했다.

무엇보다 과장으로서 신임 부원장에게 주요 사안을 처음 보고하는 날이었다. 다행히 대부분 간략한 설명으로 충분한 일이었고, 김진호 교수는 행정적인 문제에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후다닥!

보고를 마친 김지훈이 숨 돌릴 새도 없이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조용히 논문 하나를 검토하고 있던 이준영 교수가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무슨 일이야?”

“말씀드릴 게 있어 왔습니다.”

김지훈이 김진호 교수에게 보고했던 사안 중 일부를 꺼내며 진지하게 의견을 물었다.

“이런 문제는 부원장에게 보고하고 검토해야지, 왜 내게 말해?”

“보고는 이미 드렸습니다. 그리고 전 지금 보고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상의를 하는 겁니다. 부원장님이 아니어도 아셔야 하는 문제 아닙니까? 자문도 필요하고요.”

이준영 교수도 답이 궁한 모양이었다.

결국 머리를 맞대고 몇 가지 사안을 논의했다. 김지훈은 내내 즐거워했고, 이준영 교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일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스승님, 발을 빼기에는 늦었습니다.’

‘김지훈, 네 속이 보인다.’

목적을 달성한 김지훈이 탁탁 서류를 정리하며 일어나는 순간,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굳히며 어느 때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자.”

“제자가 스승님께 어려운 문제를 상의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어려운 문제가 아니잖아.”

“제 능력을 너무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일 있을 때마다 들러 상의드리겠습니다.”

“김지훈!”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선생님, 길 더 밀리기 전에 빨리 퇴근하시죠. 가 보겠습니다.”

김지훈이 바로 사라졌다.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스승님, 이렇게라도 얼굴 볼 일 만든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이준영 교수도 웃고 말았다.

‘조금 있으면 더 큰 책임을 맡아야 하는데 변하질 않네. 그런데 왜 마음이 놓이는지 알 수가 없구나.’

어쩌면 상의나 자문을 핑계로 자주 찾아와 주길 바라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환자를 두고 열띤 의견을 주고받았을 때가 그립긴 했다.

김지훈의 할 일은 끝이 없었다.

펠로우라고 해도 한 달에 한 번 있는 수술을 위해 소아과 전문의의 파견을 요청할 정도로 넉넉한 전문 병원이 아니었다. 이미 외래 개설과 응급실 근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한 터였다.

강은미와 충분한 협의 끝에 결정을 내렸다.

“정식으로 외래 진료 담당하고, 응급실은 당직자의 요청이 있을 때만 봐주면 될 것 같아.”

“응급실 소아과 환자가 적지 않을 텐데요?”

“아무리 환자를 적게 봐도 매일 나오면 버틸 재간이 없지. 우리 병원 응급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려져서 대부분 외상을 입은 아이들이야. 일반 환자는 다른 병원으로 안내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외래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친절하게만 봐줘.”

자리를 끝낸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이런 일은 현수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운영이사라고 수당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온 병원 일을 다 맡기네.’

이럴 때는 이준영 교수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는 사람은 없고,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피할 생각도 없었다.

단, 이 년 임기가 끝나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무쇠 같았던 체력도 예전만 못하고, 너무 많은 일에 관여하다 보면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 빤하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일 년만 더 버티자. 그때는 스승님과 환자에 대해서만 상의하고 살 수 있을 거야.’

당장은 새로운 식구인 진충기 교수와 강은미는 물론 펠로우들까지 최대한 불편하지 않은 근무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매의 눈으로 살펴야 했다.

망외의 즐거움을 얻었다.

진충기 교수의 역량은 절대 간 이식에 국한될 수준이 아니었다. 초반의 서먹함에도 불구하고 간암 및 공여자 파트와 활발하게 접촉했다.

“진충기 선생님 수술 영역이 너무 좁아 걱정했는데 상당히 적극적이야. 이준영 선생님도 무척 긍정적이시니까 우리 파트에 큰 힘이 될 것 같아.”

“펠로우들은 어때 보여?”

“뽑기도 잘 뽑았지만, 모찬우가 사방팔방 뛰어다니는데 열심히 안 할 도리가 있어? 신관 공사가 빨리 끝나야 쾌적한 환경이라도 제공할 수 있을 텐데 걱정이야.”

신현수의 말로 충분했다.

강은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공의가 아닌 이상 파견 나온 의사들 상당수가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가기 마련인데 실력과 열정을 모두 갖춘 의사였다.

한가한 진료실을 지키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혁원이 시간 날 때마다 바짝 붙어 신경을 쓰는 덕인지 항상 웃고 있어 마음까지 놓였다. 게다가 유일한 입원 환자인 선천성 거대 결장을 앓는 아이를 수시로 살피며 적절하게 대처해 이틀 만에 열을 잡았다.

“선생님, 수술하셔도 됩니다.”

“벌써? 고마워. 수고했어.”

기존 예약 수술이 있어 시간이 빠듯했지만 언제 나빠질지 몰라 바로 스케줄을 잡았다.

때 아닌 긴장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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