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때 이준영 교수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손일석의 얼굴을 보자 사인방과 진충기 교수만 참석하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전문 병원의 핵심이자 중추가 될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할 것이다.
‘정말 그만두신 건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준영 선생님 때문에 온 거야?”
“겸사겸사.”
“원하시는 대로 다 결정됐다. 후우! 마음이 참 안 좋네. 약속 시간이 꽤 남았는데 왜 벌써 왔어?”
“나도 싱숭생숭해. 원장까지 하시면 경력도 경력이지만 그만큼 혜택도 많은데 그걸 다 포기하시네. 나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결정은 못한다. 참 독특하면서도 대단한 분이야.”
“나도 가끔 과장 때려치우고 환자만 보며 살고 싶은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던데, 한 발짝도 안 물러나시네.”
“서울 병원에서 센터장 하실 때부터 행정 쪽은 싫어하셨잖아. 어쩌면 굉장히 홀가분해하실지도 몰라. 김 과장도 힘들면 고민하지 말고 빨리 넘겨.”
“그럴까?”
“에휴! 김 과장, 농담을 진담처럼 받지 좀 마라.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네.”
어떤 말로도 우울한 기분을 달랠 수 없었다. 같은 마음일 수밖에 없는 손일석도 텅 빈 회의실을 보며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얼굴 펴. 이미 결정된 일 깨끗하게 받아들여야지 툴툴댄다고 뭐가 바뀌어? 그건 그렇고. 김 과장, 내일 아이 한 명 보러 간다며? 우리도 같이 가자.”
“같이 가면 나도 좋지. 근데 우리라니?”
“와이프까지.”
“굳이 갈 이유가 없을 텐데, 왜?”
“가족끼리 같이 가면 좋잖아. 대부분 수술이 급한 아이일 텐데 도울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스친 김지훈이 잠시 머뭇거리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여럿이 가면 그만큼 아이 가족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는 생각만 떠올리려 애썼다.
‘처제도 간다고 했단 말이지? 입양 소리 하더니 정말 갑갑한 일만 터지네. 추측이 맞으면 도리어 내가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알았어.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병원에서 보자.”
“오케이! 참! 이준영 선생님께 선물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변하는 건 없어도 섭섭하지 않아?”
“안 그래도 필요한 게 없으신지 여쭤봤는데 단칼에 없다고 하시더라. 그게 더 섭섭해.”
“너 보기 미안해서 그러시겠지.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준비 안 했을 김 과장이 아니잖아?”
당연히 준비했다.
나이 먹었고, 사회적 위치도 많이 달라져 무엇이 좋을지 고민했지만 결론은 변함없이 와이셔츠 두 벌이었다. 믹스 커피처럼 음성에서의 기억이 깊게 각인된 것인지 모르지만, 그 시절의 추억만큼 소중한 것도 없었다.
‘어쩌면 더 벗어나고 싶으셨을 텐데 그때도 명예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셨던 것 같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났다. 진충기 교수와 사인방이 모두 모여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장 어정쩡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했다.
약간은 무거운 인사를 나눈 후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진충기 교수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것도 아닌 데다 이제 전문 병원 근무를 시작한 사람이 참석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 탓이었다. 더구나 이준영 교수는 애초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도 말없이 식사만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났다.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 과장, 술 한잔하자.”
“운전 안 하십니까?”
“혁원이 차 타고 가기로 했다.”
조용히 소주잔만 오갔다.
빨간 홍조가 돌기 시작한 이준영 교수가 사인방과 진충기 교수에게 일일이 시선을 주었다. 주량은 결코 건강의 척도가 될 수 없지만 그깟 술 몇 잔에 얼굴이 빨개지다니, 김지훈에게는 그마저도 서글픈 일이었다.
“몇 가지 부탁을 할 게 있다. 김진호 교수가 업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잘 도와주기 바란다. 특히 김 과장과 신 교수 역할이 중요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한 가지만 기억해. 내 빈자리는 없다. 진 교수, 믿는다. 손 교수, 이 교수, 믿고 있다.”
사인방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원장은 그만뒀지만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 있겠다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평생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진충기 교수는 더욱 말이 없어졌다.
‘믿는다! 후회하지 않을 거다!’
평생 자신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말을 무수히 들어왔지만, 이보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말은 없었다. 이미 전문 병원의 일원이 됐고, 동료로 인정한다는 사실에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최고 시설을 갖춘 H 병원에서 근무할 때도 앞서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어. 오창도 교수 얼굴이 왜 그토록 좋아졌는지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니 어리석었다.’
단순히 아쉬움을 달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는 사인방과 진충기에게 자신이 개척하지 못한 미래를 맡기고 있었다. 미처 펴지 못한 날개까지 활짝 펼쳐 날아오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진충기 교수가 훅 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나직한 대화가 오고 갔다.
사인방이 주로 말하고, 이준영 교수와 진충기 교수는 주로 들었다. 분위기를 따라 취할 법도 했지만 약간의 취기만 돌 뿐 누구도 술잔을 들지 않았다.
마지막 잔을 든 이준영 교수가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모두들 지금 수준에 만족하지 않길 바란다. 선배들을 뛰어넘고, 후배들을 바짝 끌어 올려 최고의 써전, 최고의 수술 팀, 최고의 병원을 만들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난 너희들 모두 대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벅찬 말이었다.
자리를 끝낼 때가 됐다.
신현수가 정중하게 봉투 하나와 와이셔츠가 담긴 선물을 내밀었다. 김지훈을 비롯해 다들 진한 아쉬움에 조용히 자리만 지켰다.
“저희 마음입니다.”
이임식조차 고사했던 이준영 교수였다. 얼굴을 굳히며 한마디 할 줄 알았건만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자들의 마음이 정말 고맙고, 한편으로 미안한 모양이었다.
“고맙다.”
그렇게 토요일 밤이 깊었다.
김지훈에겐 무척 심란한 하루였다.
어떤 말, 어떤 의미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어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스승님도 그렇고, 일석이도 그렇고.’
뒤척뒤척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지끈지끈 골치가 아팠지만 의사의 손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우울한 마음을 다잡았다.
다소 정신이 맑아진 때문일까?
김지훈이 돌연 눈을 빛냈다.
‘빈자리는 없다고 하셨지? 맞아.’
스승이 함축된 의미를 전했다면 어떻게 해석할지는 제자의 재량이었다. 반드시 한 가지 뜻만 담겼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하하하!
모처럼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
아침 해는 여느 날과 똑같았다.
김지훈과 고경아에 희연이.
손일석과 고경희에 민정호까지.
여섯 명이 모여 목적지로 향했다.
여러 일이 겹쳐 이제야 아이에 관한 자료를 받았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왜 아픈 아이는 더 힘든 처지에 빠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손일석과 고경희가 동행을 자처한 이유인 것 같아 갑갑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아이가 위탁 가정에 있다고요?”
“부모가 양육을 포기한 모양입니다. 정식으로 입양될 때까지 보살핀다는데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시 보육원으로 보낸답니다.”
“에휴!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배 아파 난 자식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는지 모르겠네.”
“낳아 준 부모도 중요하지만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호성이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지훈이 갸웃거렸다.
자신이야 정기적인 진료 때문에 강호성을 보지만 민정호가 따로 접촉할 일은 없었다. 동사무소와 시청 복지과에서 후원과 보살핌을 맡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만나요?”
“가끔 봅니다.”
“평소에 나하고 얘기할 때는 인간미를 찾기 힘든데 의외로 인간적이네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이와 엄마에게 약속한 대로 책임을 지는 것뿐입니다. 일종의 계약이니까요.”
김지훈과 손일석이 간만에 웃었다.
계약이란 말로 잘도 빠져나가는 민정호였다. 이젠 인간미 없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던지고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해진 관계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속이 깊은 사람이야.’
지금 상황이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업무에 관한 한 철두철미한 사람이 왜 손일석 부부가 함께 가는지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다. 사적인 일은 절대 거론하지 않는 성격 때문인지 몰랐지만 김지훈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결혼한 지 한참 지난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때문인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엄마, 아빠를 따라나선 희연이의 재잘거림이 고마웠다. 함께 있을 때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왜 자꾸 까먹는지 모를 일이었다.
쫑긋 희연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미소 짓던 김지훈이 다음 장을 넘겼다.
‘이 아이는 어떤 병을 앓고 있는 걸까?’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선천성 거대 결장?”
결장 발달을 촉진하는 신경절이 부족해 발생하는 선천성 질환이다. 결함이 발생한 부위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상대적으로 수축된다. 반면 정상 부위인 상부 결장은 변이 정체되면서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게 된다.
거의 대부분 태변 배출을 볼 수 없고, 생후 얼마 되지 않아 복부 팽만, 변비, 심한 가스 방출 등의 증상을 보인다. 다양한 검사를 통해 확진할 수 있으며, 치료는 오직 외과적 수술뿐이다. 다운증후군 등 다른 기형이 동반되지만 빨리 발견해 수술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김지훈이 놀란 이유는 아이의 연령 때문이었다.
생후 육 개월이었다.
진단이 너무 늦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팽창된 대장 벽이 약해지는 데다 쌓인 변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장염이 발생하게 된다. 약한 면역력과 기저 질환으로 인해 쉽게 패혈증이 유발되고, 이는 곧 사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육 개월을 버텼다니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아이 상태가 크게 우려됐다.
“민 부원장님, 빨리 갑시다.”
마음이 급해졌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평범한 집이었고, 방송국 촬영진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다소 어수선한 가운데 생후 사오 개월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안은 아주머니가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즐거워 웃을 리 없었다.
무료 치료를 자청한 의료진에 대한 고마움과 예의일 것이다. 그래도 남의 아이를, 그것도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영유아를 키우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마치 자신의 자식인 것처럼 수심이 얼굴 가득해졌다.
“아이는 괜찮습니까?”
임시 보호자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간의 일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에는 장이 약해서 그런 줄 알고 동네 의원만 찾다가 큰 병원을 너무 늦게 찾았어요.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그만…….”
자신을 탓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지원을 받는다지만 아이를 위탁받아 키우는 일은 봉사에 가깝지 절대 경제적 이득이 될 수 없었다.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 가며 버림받은 한 아이를 보살피고자 하는 헌신마저 외면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했다.
감정에 휘말릴 때가 아니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바로 아이를 진찰했다.
고경아가 옆에 바짝 붙어 함께했다.
배가 빵빵했다.
직장 검사에서 변이 묻지 않았다.
다행히 바이탈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지만 체중은 미달 상태였고, 활력이 무척 떨어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가장 우려한 증상인 미열이 측정됐다.
선천성 거대 결장을 앓는 아이에게 가장 치명적인 합병증, 장염이 발생하고 있다는 징후였다. 언제 패혈증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손 교수, 즉시 입원시켜야겠어.”
“그게 좋겠어.”
부랴부랴 채비를 했다.
김지훈이 무척 서두르자 의료진 방문에 한시름 놓았던 위탁모가 마치 자신의 아이가 아픈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를 꼭 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우리 아이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가요? 제가 뭘 잘못한 거죠?”
“아닙니다. 예방적 차원이고, 수술을 빨리하면 결과가 더 좋기에 서두르는 것뿐입니다.”
다행히 취재진 차량에 여유가 있었다.
병원으로 가는 사이에 별일이 일어날 리 없건만 모두들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희연이 말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엄마, 애기가 많이 아픈 거야?”
“걱정하지 마. 아빠하고 이모부가 고쳐 주실 거야.”
“와! 우리 아빠가?”
한 번은 웃을 법도 한 김지훈은 착잡한 표정까지 지었다. 아이도 아이지만 조용히 위탁 과정과 어려움을 묻는 고경희가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취재 차량에 탔기에 망정이지 손일석이 들었다면 어떤 마음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아이에게 집중하자.’
언제 나빠질지 모르는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