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김지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벌떡 일어나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좋은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은데 연구실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있을 곳은 딱 한 군데였다. 이준영 교수가 유일하게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원장실이었다.
무언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무 기쁜 소식이었지만 실례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 중요한 말씀 중이시면 나중에 다시 올까요?”
“괜찮다. 무슨 일이야?”
“논문 통과됐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순간 움찔거렸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김지훈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훈아, 앉아. 앉아. SCI급 국제 학술지 맞지? 그치? 잘했다. 잘했어. 이제 길 뚫었으니 다들 매년 한 편씩 제출하면 되겠다. 우리 김 과장이 검수하면 무조건 통과다. 통과.”
“열심히 하겠습니다.”
“언제 게재한대? 언제?”
“다음 호에 실리니까, 두 달 후가 아닐까요?”
“이왕 실리는 거 빨리 싣지. 너무 늦다. 늦어. 이 교수, 뭐라고 한마디 해. 한마디. 제일 초조하게 기다렸잖아.”
말할 틈도 안 준 송재덕 교수를 힐끗 본 이준영 교수가 이제야 입을 열었다. 무뚝뚝한 표정은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수고했다.”
“에이! 그게 다야? 하여간 속을 너무 안 드러내요. 그거 고쳐야 된다. 고쳐야 돼. 허허허! 요새 같으면 살맛 난다. 살맛 나. 진충기 교수 영입했고, 펠로우는 열두 명이나 뽑았고, 선천 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무료 치료까지 좋은 일이 연달아 터지는구나. 연달아. 좋다. 좋아.”
송재덕 교수가 자식이 사법고시에라도 붙은 것처럼 좋아했다. 한동안 축하의 말과 덕담을 주고받던 이준영 교수가 갑자기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을 꺼냈다.
“원장님, 어차피 김 과장도 알아야 할 일이니까 지금 마무리 짓죠.”
송재덕 교수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헛기침을 했다.
“이 교수, 오늘 같은 날 꼭 결정해야 돼?”
“이미 말씀드렸던 일입니다.”
“에휴! 김 과장, 이 교수가 이번 주를 끝으로 김진호 교수에게 부원장 자리를 넘기겠단다. 이거 말려야 하지 않겠니? 그치? 아직 이 교수가 필요하지?”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선생님, 그게 정말입니까?”
“호들갑 떨 일 아니다. 예정보다 빠를 뿐이야. 김진호 선생과도 얘기 끝났다.”
방 안 공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좋다고 부원장 자리를 넙죽 받았을 김진호 교수가 아니었다. 그동안 말은 오갔겠지만 백이면 백 통보하다시피 자신의 결정을 알렸을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간에 김지훈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부원장이라는 자리 때문이 아니라 왠지 스승이 현직에서 물러나는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선생님, 다시 생각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개원 때부터 말했잖아.”
“원장님이 계시지만 우리에겐 중심을 잡아 줄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김진호 교수가 잘할 거다.”
이준영 교수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격한 반응을 보였어야 할 송재덕 교수는 그리 다급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각자에게 맞는 길을 가는 것이 순리라는 인상까지 풍겼다.
‘왜 적극적으로 안 말리시지?’
스승의 어깨를 다시 봐야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돌이켜 보면 자리 욕심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었던 스승이었다. 음성으로 가게 된 가슴 아픈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오직 환자에게만 집중하고 싶어 했다.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전문 병원 개원 후, 부원장을 맡아 도리어 책임이 더 막중해졌다. 모든 일을 제자에게 맡긴 것 같아도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고민하며 노력해 왔다.
‘남들은 가지지 못해 안달인 자리가 그렇게 갑갑하셨나? 우리를 위해 원장님까지 하시는 것이 맞는데, 스승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네. 어후!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 생각이 정말 맞는 걸까? 원장님은 왜 보고만 계시지?’
정반대인 스승의 바람과 제자의 바람 사이에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을 본 이준영 교수가 쐐기를 박았다. 이럴 때 왜 어울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발휘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결정한 일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선생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김진호 교수였다.
“여기 계셨네요. 원장님, 당장 부원장님께 할 말이 있는데 해도 되죠?”
“똥고집이다. 똥고집. 빨리해. 빨리.”
“선생님, 한창 마취 준비하느라 바쁠 때 다음 주부터 부원장 하라는 말만 툭 던지고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최소한 제 의견을 물어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에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때도 이 년 채우시고 나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잖습니까? 다른 말씀 마시고 기한부터 채운 후 말씀하세요.”
“김 교수, 왜 이래?”
“선생님, 혹시 저 욕먹게 할 생각이십니까? 이건 누가 봐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어받은 게 아니라 밑에서 치고 올라간 꼴입니다.”
김진호 교수가 격하게 반발했다.
희한한 자리싸움 났다.
서로 안 하겠다고 난리였다.
김지훈은 김진호 교수 편에 서서 열심히 응원하는 반면, 송재덕 교수는 뭐가 좋은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아쉽지만 김진호 선생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자세면 이 교수가 자리를 넘겨도 좋겠어.’
“자자! 그만하자. 그만. 김 교수, 고맙다. 부원장 역할 훌륭하게 해낼 것이라 믿어. 각 과 과장들하고 신 교수와 함께 논의해서 결정할 테니 업무 시작할 준비해. 이 교수, 그동안 고생했다.”
“원장님!”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어. 우리 욕심에 이 교수에게 갑갑한 옷을 너무 오래 입혔다. 그동안 열심히 해 준 것 고맙게 여기면 돼.”
‘이건 아닌데. 정말 아닌데.’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무척 편해 보였다.
방금 전 부원장 자리를 놓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렇게 무뚝뚝했던 얼굴에 진한 미소까지 감돌았다.
“원장님,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김 교수, 김 과장 논문이 통과됐어.”
“예? 그… 그렇습니까? 김 과장, 축하해.”
김진호 교수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김지훈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면서도 어정쩡한 얼굴로 이준영 교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음성부터 시작된 인연이 전문 병원까지 이어졌건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가장 가까이 있었던 김지훈도 속을 알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분위기 묘해졌다.
앞으로 대세가 되겠지만 당시에는 분명 희소가치가 있는 SCI급 국제 학술지 논문 채택이란 경사와 이준영 교수의 퇴진이라는 우울한 사실 앞에 다들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결자해지였다.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 과장, 커피 한 잔 먹자.”
“블랙으로 탈까요?”
“믹스 커피가 좋겠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믹스 커피에 담긴 추억 때문이었다.
“원장님, 김진호 선생님, 어떻게 드시겠습니까?”
송재덕 교수가 눈을 부라렸다.
“이 교수, 부원장이어도 안 될 일인데 과장한테 커피를 타라고 하면 어떻게 하니? 어떻게? 하여간 누릴 건 다 누리려고 해요. 에이! 김 과장, 우리도 믹스로 하자.”
달달하고 고소한 커피 향이 퍼졌다.
지나온 세월이 스쳤다.
동시에 다가올 날이 그려졌다.
“김 과장, 논문 게재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 것 같아? 원장님 말씀대로 이제부터 우리 병원에서 작성하는 논문은 모두 국제 학술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좋겠다.”
말 없는 사람의 입이 쉬지 않았다.
이준영 교수에겐 또 하나의 시작일지 몰랐다.
버림으로써 얻는 것일까?
그 시간.
진상건이 바들바들 손을 떨고 있었다.
“김 이사님, 펠로우를 열한 명이나 뽑은 것도 모자라 소아과에서 파견을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요?”
“그게 최태우 의원이 개입을 해서…….”
“상대가 누가 됐건 이사님 돈도 아니고 내 돈을 처발랐는데 성과가 나야 할 거 아닙니까? 외부 문제도 문제지만 병원 관리 하나 똑바로 못합니까?”
“원장을 빼고는 말을 잘 안 듣는 데다 송재덕과 이준영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아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투표 건까지 이사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 도대체 뭡니까?”
“죄송합니다.”
진상건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김병오 이사는 연배가 한참 위건만 창피하지도 않은지 쩔쩔매며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다. 돈이 무서운 것인지, 자리가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김병오 이사님, 빠른 시일 내에 전문 병원을 내 손안에 휘어잡을 수 있는 계획을 짜 오셔야 할 겁니다. 기필코 신현수와 윤서연 집안이 망하는 꼴을 봐야겠습니다. 아니면 김 이사님이 망신을 당할 겁니다.”
김병오 이사가 눈치를 보았다.
“이사장님, 독립채산제에 인사권까지 넘겨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몇몇 의사를 빼고는 대부분 나가서 개업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자존심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래서요?”
“전문 병원은 내버려 두고 부지 활용에만 전념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현재 서울과 천안 병원은 이익이 거의 나지 않는 상태니까, 곧 자금이 필요하게 될 겁니다.”
진상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물만 빨고 싶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이사장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돈을 벌고 싶으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세요. 전문 병원을 폐업시켜 부지를 넓혔을 때 추가로 얻는 이득이 얼마인지 계산은 해 봤습니까?”
막대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김병오 이사님, 우리 집안은 수모를 준 놈들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는 것도 확실하죠. 무엇보다 내가 아니면 이사님은 일개 이사 중의 한 명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내가 지시한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빨리 나가 보세요.”
진상건이 손을 휘휘 저었다.
김병오 이사는 장기판의 졸에 불과했다.
‘최태우 의원을 어떻게 구워삶았지? 동생을 수술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인가? 이유가 뭐가 됐든 우리 측으로 끌어들여야 해. 제길! 들어오는 것 없이 돈 나갈 일 천지군.’
눈가를 찌푸리던 진상건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급격하게 표정을 바꿨다.
“의원님, 진상건입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일전에 부탁드린 일 힘써 도와주셨는데 사례도 제대로 못했고, 혹시 최태우 의원님과 친분이 있으실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은밀한 말이 오고 갔다.
“하하하! 그럼 제가 즐겨 모시는 곳에서 뵙겠습니다. 겸사겸사 지금 추진하는 일에 도움을 주신다면 인사 한번 크게 드리겠습니다. 물론 항상 해 오던 것처럼 꼬리표 안 달린 물건으로 말이죠.”
통화를 끝낸 진상건이 눈가를 좁혔다.
돈은 단 한 푼도 포기할 수 없었고, 자존심을 굽힐 생각도 없었다.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핵심은 바로 전문 병원이었다.
폐업은 곧 주체하기 힘든 돈이었다.
그것이 곧 신현수와 윤서연 집안의 몰락이었다. 아울러 사사건건 바짝 고개를 세우고 덤벼든 송재덕, 이준영, 김지훈과 배신자인 민정호까지 잡아 버릴 기회였다.
‘네놈들이 힘을 동원했단 말이지? 진짜 힘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또 다른 번호를 눌렀다.
“보건복지부와 심평원에서 전문 병원에 현지 조사 나가도록 조치해. 돈은 걱정하지 말고 소방 점검, 위생 점검까지 병원 운영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알겠습니다.)
재정을 책임진 민정호를 정신없게 만든다면 어딘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민정호는 매사 직접 챙기는 성격이기에 대응에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이다.
흔들어 대면 결국 열매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세무조사 건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말씀만 하시면 바로 진행될 겁니다.)
“결정타로 써먹어야 하니까 익혀 두기만 해.”
진상건의 입꼬리가 말렸다.
전문 병원 때문에 신경이 쓰였지만 일종의 변수에 불과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굴지의 대형 병원과 막대한 돈을 동시에 손안에 쥐면 되는 일이었다.
누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일 수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전문 병원은 흔들림이 없었다.
토요일 일과가 모두 종료됐다.
송재덕 교수 주관하에 간호과를 포함한 각 과 과장과 신현수가 모여 김진호 교수를 부원장으로 추인했다. 재단의 고유 영역이었던 인사권을 자신들이 행사했다는 사실에 다들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들 이준영 교수의 퇴진을 아쉬워했다. 본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이취임식을 열기로 결의했다. 김지훈도 씁쓸하기 짝이 없었지만 스승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도리였다.
“다음 주 월요일 오후 여섯 시에 이취임식을 열겠습니다. 가급적 많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하필이면 월요일이냐. 난 참석을 못하네.’
마음만 아플 것이다.
심란해 회의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 벌써 퇴근했어야 할 손일석이 슬그머니 들어와 옆에 앉았다.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