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정훈철이 피식 웃었다.
‘신 교수나 민 부원장이나 애초 원했던 바를 반드시 이루겠단 말이지? 설마 김 과장 반응을 예측하고 이런 식으로 이용할 생각은 아니었겠지?’
민정호가 다소 의심스러웠지만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능력으로 보였다. 더구나 지금도 승희가 아프거나 힘들어할 때마다 졸지에 딸을 잃을 뻔한 기억이 나곤 했다.
때문인지 아픈 아이들을 위한 방송을 기획할 때마다 마음이 편해져 어느 때보다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장이라 해서 편성권을 쥐고 흔들 수는 없었다.
주는 것만큼 받아야 윗선까지 설득할 수 있었다.
“무작정 횟수를 늘리는 것은 곤란해.”
민정호가 곧바로 반응했다.
“저희도 무작정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역시 민정호였네. 하지만 나도 대비를 했지.’
“방법이 있긴 있어. 무상 치료 기간을 이 년으로 늘리자. 그래야 스무 명 정도 간신히 치료해 주는 거 아니야?”
일순 정적이 흘렀다.
선천성 질환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데다 기본적인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었다. 너무 고가인 탓에 비용을 전액 청구하기도 어려워 치료하면 할수록 오히려 손해를 입는 경우까지 발생하곤 했다.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병원이 없는 까닭이었고, 대형 병원조차 무상 치료는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생 병원이 이 년에 걸쳐 시행하다니 부담이 커도 너무 컸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형국이었다.
아예 감당이 안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현수는 말할 것도 없었고, 자신의 어깨에 전문 병원의 재정을 짊어지고 책임져야 하는 민정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했다.
민정호가 신현수를 보았다.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김지훈에게는 부담 팍팍 가는 눈길을 던졌다.
“좋습니다. 대신 방송 횟수를 더 늘려 주시죠.”
“얼마나?”
“일 년에 두 번씩 총 네 번입니다. 아울러 아이들 사연에 집중해야겠지만 치료 과정을 보다 상세하게 다뤄 주십시오.”
“전문 병원을 확실하게 노출시켜 달라?”
“어느 지역의 어떤 병원인지 알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과장님도 네 번이면 간판이 필요하다는 점 인정하시죠?”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병원 입장에서는 실로 엄청난 출혈이었다.
다른 홍보 수단을 찾으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동일한 효과를 낼 수도 있었다. 김지훈에게 집도를 맡긴 것도 조금이나마 효과를 더 보기 위한 방편이었다.
‘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네.’
정훈철이 웃었다.
“민 부원장, 도장 찍자.”
“좋습니다.”
김지훈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합의가 끝났다.
‘모든 집도는 과장인 김지훈이 한다.’
동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 일을 기획한 의도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명색이 운영이사인 이상 절차상의 문제도 지적해야 했다.
“신 교수, 민 부원장님, 왜 나는 사전 상의에서 빠진 겁니까? 운영이사는 아무것도 아닙니까?”
“분명히 연락드렸습니다. 서도훈 선생님과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상당히 즐거워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거야 뭐……. 이후에라도 연락을 했어야죠?”
“서운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과장님과 미리 논의했으면 아마 방송 자체를 반대하셨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습니다.”
“내가 반대를 한다고요?”
“최태우 의원 일 때 이미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마 이번 일도 선의로만 접근하셨겠지요. 의료는 인술이라고 백날 강조해 봐야 먹고사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가치관의 차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병원 경영을 알면 알수록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고, 때론 타협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이 년에 걸친 무료 치료와 네 번의 방송을 맞바꾼 이번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출혈이 너무 컸다.
김지훈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잘 알고 있었다. 내심 과감한 결정에 환호했지만 이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 부원장님, 선천성 질환의 치료 비용이 얼마인지는 알아본 겁니까? 신 교수, 재정 문제는 생각한 거야?”
“충분히 고려했어. 민 부원장님도 동의했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움직였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사자 앞에서 말하긴 그렇지만, 우리 민 부원장님이 누구보다 철두철미하잖아.”
김지훈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민 부원장이 주도했다고?’
“일전에 공익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기회에 정훈철 형님과 좋은 인연을 쌓을 수도 있고요. 형님, 안 그렇습니까?”
“그야 그렇지.”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수 하나 잡았다.
“인맥? 사익을 추구하면 안 되죠.”
“개인적인 목적뿐이었다면 좋은 자리 만드는 게 훨씬 더 빠릅니다. 어쨌든 막대한 돈을 들이는 만큼 과장님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끙! 소리만 터졌다.
민정호가 정훈철을 살뜰하게 대했다.
“형님, 먼 길 오셨는데 식사하고 가시죠. 과장님 말씀대로 서로의 인맥이 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보면 볼수록 참 솔직해. 민 부원장 같은 인맥이 있으면 나도 좋지. 김 과장도 같이 가자.”
대화 내내 밀렸다.
평소 바라 마지않던 일이 성사됐지만 왠지 민정호가 얄미웠다. 술 힘을 빌려서라도 뭔지 모를 울분까지 토할 겸 당연히 그래야 했다.
그러나!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당직이다.
(과장님, 35세 남자 환자입니다.)
신현수, 정훈철, 민정호가 안타깝다는 눈길을 던지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놈의 일복은 끝이 없는지 초저녁부터 환자가 밀려들었다.
김지훈이 피눈물을 집어삼켰다.
***
진충기 교수의 첫 주 근무가 무사히 끝났다.
서도진을 비롯해 후배 사인방 모두 활활 타는 주말 집담회에 참석한 후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빨리 적응할 일이었다.
김지훈은 모처럼 즐거운 주말을 보냈다.
오래간만에 원주를 찾아 얼굴 잊어 먹는 줄 알았다는 장인어른에게 한 소리 들은 것 빼고는 붕붕 뜨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온 가족이 모인 덕이었다.
고경순과 서정호는 맏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손일석과 고경희는 조카들을 보며 웃기 바빴고, 늦은 저녁 고경철까지 도착해 분위기를 띄웠다.
막내는 나이 들어도 귀여운 모양이었다.
“김 서방, 손 서방, 경철이 저놈 잘하고 있나?”
“이제 일 년 차 말인데 잘하고, 못하고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하면 다행이죠.”
“말 안 들으면 팍팍 태워서라도 멀쩡한 써전 만들어 놔. 매형이 그 정도는 해야지. 특히 김 서방은 과장이니까 책임이 크다.”
“병원이 달라서 태울 방법이 없습니다.”
“큰일이네, 큰일. 이혁민 교수나 신기동 교수에게 전화라도 해야 하나?”
“아버지! 매형! 왜 이러세요.”
“다 널 위해 하는 말이야.”
서정호가 투덜거렸다.
“검사를 만들었으면 비교도 안 되게 군기를 잡았을 텐데 아깝네. 처남, 지금이라도 직업을 바꾸는 게 어때?”
“큰 매형까지 왜 그러세요.”
소주에 곁들인 고경철이라는 안주는 정말 고소했다. 장모님과 누나 셋이 편을 들었지만, 천생 써전인 아버지와 직장 상사인 김지훈과 손일석의 위세를 누르지 못했다.
의사 고경철과 아들 고경철은 달랐다.
장모님까지 고경철을 궁지에 밀어 넣었다.
“경철아, 넌 여자 친구 없니? 이젠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엄마, 연애할 시간 자체가 없는데 누굴 만나요?”
“선이라도 봐야 하나? 너희들은 누나면서 동생 신경도 안 써? 주변에 참한 처자 없어?”
“그러게. 경철이도 나이 먹었는데 우리가 신경 써야 되겠네. 언제 장가갈 때가 됐대.”
“누나까지 왜 이래?”
벌게진 얼굴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런 주말 바다와 맛있는 음식이 빠지면 섭섭한 법이었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장모님 밥상으로 아침을 때우고 곧바로 대관령을 넘었다.
바다다!
김지훈이 심호흡을 했다.
여름이면 여름대로, 겨울이면 겨울대로 탁 트인 동해 바다는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까지 날려 버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무 생각이 없어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맛집이 필요했다.
칼칼한 강릉 장칼국수가 유력한 후보로 대두됐다. 소문난 세 곳을 두고 저울질을 하는 순간 손일석이 특급 정보라며 횡계의 한 식당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원 칼국수였다.
현지 주민들이 적극 추천하는 식당이야말로 최고의 맛을 보장한다는 손일석의 말에 김지훈도 동의했고, 확신에 찬 모습에 다들 기대만발이었다.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를 넘어 횡계에 도착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길게 뺐다.
“경아 씨, 터미널 근처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는데. 그럴듯한 식당이 왜 안 보이지?”
“슬슬 불안해지네. 일석이를 너무 믿었나?”
“제부 입맛이 보통 아니니까 믿어 봐요.”
간신히 찾았다.
아는 사람에게는 바로 보여도 초행인 사람에게는 식당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무색하게 하는 위치에 있었다. 허름한 간판이 뭔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달리 보면 흔히 보는 가게라는 말이기도 했다.
식당에 들어섰다.
탁자가 달랑 다섯 개였다.
‘정말 맛집 맞나? 불안하네.’
식당 찾느라 점심시간이 지났기에 망정이지, 소문대로 맛집이 맞는다면 앉을 자리도 없을 뻔했다. 메뉴는 해물파전과 할머니 손칼국수가 다였다.
“뭐 먹을 거야? 해물파전은 다 떨어졌어.”
결국 칼국수만 먹으라는 말이었고, 주인 할머니 말투는 욕쟁이 할머니의 순화 버전이었다.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며, 강한 공력의 소유자임을 짐작케 했다.
“칼국수 열세 개요. 아버님, 분위기상 정말 맛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흠흠! 그런가? 손 서방 자네를 믿어야지.”
다들 기대 반 불안 반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칼국수를 맞이했다.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지만 한 입 먹는 순간 무릎을 치고 말았다. 구수하면서도 시원한 국물과 할머니가 직접 담근 김치가 가히 예술이었다.
“할머니, 김치 좀 더 주세요.”
“작작 먹어. 요새 배추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그럼 맛없게 담갔어야죠.”
“칼국수는 뭐 하고 먹어?”
틱틱 신경질을 내면서도 김치는 한 가득이었다.
다들 머리 박고 칼국수와 김치의 오묘한 조화를 만끽했다. 할머니만의 비법이 담긴 것 같은 간장 양념장을 타자 또 다른 맛까지 즐길 수 있었다. 결국 남자치고는 상당히 양이 적은 서정호까지 ‘한 그릇 더’를 외치다 못해 밥까지 말아 먹었다.
꺽꺽! 이것이 바로 행복이었다.
먼 길을 달려 저렴한 음식으로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입맛이나 취향에 따라 다르다 해도, 대관령 근처에 갈 일이 있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식당으로 감히 추천한다.
다 맛있다.
해물파전은 빨리 가지 않으면 못 먹는다.
할머니 나이가 많으니 늦지 않게 꼭 가 보자!
식후 커피까지 즐기면 금상첨화다.
길거리 자판기도 좋고, 수려한 산세를 전망으로 둔 카페도 좋다. 커피 맛을 알지 못하는 김지훈 같은 사람에게는 맛보다 분위기니 말이다.
맑은 공기까지 한껏 들이마신 김지훈이 아쉬움에 콧등을 찡그렸다. 어느새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됐지만, 유난히 즐거웠던 주말이라 며칠 더 묵고 싶을 지경이었다.
“서 서방, 건강 잘 챙겨. 김 서방하고 손 서방도 환자만 챙기지 말고 자기 자신도 챙겨야 해. 하는 일 다 잘되도록 기도할게.”
천주교 신자지만 단 한 번도 종교로 부담을 주지 않는 장모님의 말이 따스하기만 했다.
“경철아, 빨리 가. 내일 일하려면 푹 쉬어야지. 수술 들어가 졸지 말고 똑바로 봐. 김 서방, 손 서방, 언제 시간 나면 간 이식 보러 가도 되지?”
“언제든 오십시오.”
손일석이 눈가를 좁혔다.
“김 과장, 형님에게 슬쩍 던져 볼까?”
“진상건?”
“지저분한 놈인데 뭐라도 걸리지 않을까?”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민 부원장 말대로 때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민 부원장이 말하는 때가 언제 올지 모르겠네. 에이! 단칼에 베어 버릴 방법이 없을까? 아이코! 희연아, 갈 때는 이모부 차 타고 가자. 어때?”
“좋아요.”
“어이구! 예뻐라. 가자. 조심조심!”
아빠보다 더 물고 빨았다.
김지훈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문득 입양이란 말이 생각났지만 그것이야말로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일이었다.
아쉬운 작별을 끝으로 각자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김지훈이 내내 웃었다.
오늘의 충전으로 한동안 힘차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는 뒤로하고 가급적 찾아봬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