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45화 (1,145/1,329)

11화

새 직장에 출근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진충기 교수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외래로 들어가지도, 병동으로 올라가지도 못한 채 서성거렸다. 진료할 환자가 없었고, 당연히 수술은 기약이 없었다.

항상 바쁘게 살아왔던 병원에서 느끼는 한가함이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H 병원을 나온 이유도 신임 교수와의 충돌만이 아니라 이런 느낌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겉도는 기분이랄까?

수술을 참관할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김지훈 말고는 친분이랄 것도 없어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자칫 해당 집도의에게 실례를 범할 수도 있었다.

‘빨리 적응해야 할 텐데 난감하네.’

그때 손일석이 다가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선생님, 갑자기 할 일이 없어서 갑갑하시죠?”

“출근 첫 주부터 연구실에 박혀 있기도 그렇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애매모호하네요.”

“선생님 수술 팀까지 다 만들어 놨으니까 곧 바빠지실 겁니다. 그 전에 절 도와주시면 더 좋고요.”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간 이식 수술이 늘어나면서 혈관 수술을 같이 들어갈 사람이 없네요. 혼자 할 수 있는 수술도 아니라 고민이었는데, 괜찮으시면 함께하실까요?”

꿩 대신 닭이다!

진충기 교수가 반색하다 말고 슬쩍 손일석을 보았다. 혹시 자신의 실력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려는 의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간 이식 수술의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혈관이기에 더욱 의심스러웠다.

잠시 말이 끊겼다.

손일석이 돌연 손사래를 쳤다.

‘안면도 거의 없었는데 너무 성급했나?’

“아이고! 이제 이틀 되셨는데 제가 너무 성급하게 말씀드린 모양입니다. 적응하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시겠죠? 죄송합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였다.

순간 진충기 교수의 얼굴이 벌게졌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잘못 생각했다.

상대의 호의를 호의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한때 김지훈과 각을 세웠던 과거가 주는 묘한 부담, 평생직장이라 여겼던 병원에서 느꼈던 실망과 불화에서 비롯된 감정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손일석의 진심을 곡해했다.

어느 조직이든 신입 사원보다 경력자가 새로 들어왔을 때 훨씬 대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또한 써전은 서로의 손을 보고 배우며 친분을 쌓아 가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입장을 고려하며 딱딱한 분위기를 깨고자 했을 것이다. 더구나 회진을 돌기 위해 병동으로 가려면 굳이 외래를 통과할 이유가 없었다.

일부러 왔다는 말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실력을 의심했다면 영입을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말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일을 이렇게 받아들이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네.’

손일석이 돌아서기 직전이었다.

진충기 교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언제 수술하십니까?”

“함께하시겠습니까?”

“당연하죠. 손도 풀어야 하지만 선생님들과 친해질 좋은 기회 아닙니까?”

“하하하! 일거양득이네요. 오후에 연달아 세 건 시행하는데, 준비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병동으로 향하던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함께 수술해 보면 더 잘 알겠지만, 김 과장 말대로 확실히 예전의 진충기 교수가 아닌 것 같네. 그나저나 입장 난처한 일은 꼭 날 시키네.’

직접적으로 다가간 이유가 있었다.

김지훈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탓이었다.

진충기 교수보다 기존 의료진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며 먼저 다가가라는 강요 아닌 강요를 했다. 결코 소외당한다는 느낌을 주면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김지훈이 간과한 일이 있었다.

수술실에 들어서는 순간 손일석은 저승사자처럼 변했다. 상대가 누구이건 부족한 면이 보이면 면도날보다 더 날카롭게 지적하는 써전이었다.

신기동 교수의 칠지도 저리 가라였다.

그날 오후.

진료 사이 잠깐 짬을 내 손일석의 수술실을 찾았던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진충기 선생님, 혈관 쪽이 의외로 약하시네요.”

“투석을 위한 수술은 한 번도 안 해 봐서 익숙하지가 않네요. 간이나 다른 수술과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당분간 혈관 수술을 쭉 들어오셔야 하겠습니다. 간 혈관 기형을 만났을 때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펠로우 교육도 하셔야죠.”

말만 정중할 뿐 비수 뿌려 대고 있었다.

김지훈의 눈에는 상당한 실력으로 보였지만 손일석은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펠로우와는 전혀 다른 수준을 갖고 있어야 하긴 했다. 차마 진충기 교수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발갛게 달아오르고도 남았다.

당연히 분위기 싸했다.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주말 집담회!’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 역시 근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혹은 이미 실력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정을 두지 않을 써전들이었다. 물론 어떤 문제도 없겠지만 진충기 교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답은 하나였다.

은근슬쩍 전문 병원의 분위기를 전하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기존 의료진의 텃세나 견제라고 느낀다면 사달이 나고도 남겠지만, 진충기 교수는 더 이상 자기 자신 속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더구나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써전이었다.

‘실력 어디 가겠어? 일석아, 언제 역전당할지 모르는데 살살 해. 그러다 나중에 혼난다.’

우려에 불과했다.

가시적인 변화가 바로 나타났다.

진충기 교수는 근무 첫 주임에도 불구하고 무난하게 첫 간 이식 환자를 진료했고, 준비 팀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무엇보다 시간 날 때마다 각종 수술의 참관을 자청하며 후배들의 의견까지 경청해 기존 의료진과의 친분도 빠르게 쌓아 갔다.

덕분에 김지훈은 더 바빠졌다.

생각보다 빠르게 주당 네 건의 간 이식이 잡혔다. 결국 이를 뒷받침할 부분, 그중에서도 의료진 충원이 발등의 불로 다가왔다. 펠로우 선발을 하루라도 빨리 진행시켜야 했기에 신현수와 논의 끝에 바로 절차를 진행시켰다.

빠른 진행이었지만 문제없었다.

모찬우와 한수영처럼 다들 펠로우를 하고 싶은 병원을 정했을 때였고, 전문 병원의 위상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바라고 또 바랐던 일이 벌어졌다.

복강경을 이용한 휘플을 최종 목표로 삼은 서도훈이 스스로 중대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오랜 고심 끝에 무엇이 더 필요한지 정확하게 잡아냈다.

“과장님, 간 이식 수술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왜?”

“간 이식 때 처리해야 하는 혈관들이 휘플 때도 무척 중요하지 않습니까? 해부학적 구조를 보다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휘플을 라파로로 할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험이 더 필요합니다.”

김지훈이 반색했다.

일종의 개안이자 자각이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써전으로서 깊은 토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신현수, 민정호와 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지만 홍보에 관한 일이었기에 빠져도 큰 상관이 없었다.

“신 교수, 서도훈 선생과 긴히 할 말이 있어 난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 난 무조건 따를 테니까 둘이 결정하셔. 미안해.”

기분 좋은 자리였다.

역시 홍보처럼 행정적인 일보다 의료에 관한 일이 훨씬 더 적성에 맞는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어떤 말이 오가는지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어째 서도훈 선생이 먼저 술을 살 것 같다.”

“노력하겠습니다.”

“나야 얻어먹으면 좋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요청해. 바로 해결해 줄게. 기대한다.”

즐거운 웃음이 이어졌다.

한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보며 초조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들이 있어 김지훈도 더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이틀 후.

김지훈이 깜짝 손님을 맞이했다.

정훈철이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왜 그렇게 놀라? 얘기 못 들었어?”

“무슨 얘기요?”

“오늘 다 같이 만나 민 부원장과 내가 제기한 건 마무리하기로 했잖아. 생판 처음 듣는 사람처럼 왜 이래? 운영이사 아니야?”

이제야 감 잡았다.

불가피하게 참석하지 못했지만 며칠 전 논의한 홍보와 관련된 일이 틀림없었다. 정훈철이 온 이상 방송과 관련된 일이 빤한 데다 명색이 운영이사라 짐짓 잊은 척하며 얼렁뚱땅 넘겼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홍보를 하겠다는 거야?’

다들 바쁜 사람이었다.

곧바로 운영 회의를 열었다.

논의를 지켜보던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언제 접촉했는지 몰라도 민정호와 정훈철이 각자 조건을 걸고 각종 선천성 질환을 가진 아이들을 위한 특집 방송을 기획했다. 김지훈의 인맥을 이용한 민정호의 강력한 홍보 전략이라 할 수 있었다.

“김 과장, 이런 방송에 광고가 붙는 것도 아니고, 제작 비용을 감수할 정도는 해 줘야 뒷말이 안 나와. 신 교수와 민 부원장은 지금도 동의하죠?”

“예, 동의합니다.”

“김 과장만 오케이 하면 돼. 방송국은 내가 책임질게.”

“형님, 저야 당연히 환영이죠. 하지만 마지막 조건은 여러 문제가 있어요. 파트에 따라 수술하는 것이 맞습니다.”

“좋아. 일단 두 가지는 해결된 거야.”

정훈철이 확정 표시를 했다.

‘특집 방송을 진행하며 전문 병원을 간접적으로 소개한다. 대신 향후 일 년간 한 달에 한 명씩 불우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무상으로 진료하고 치료한다.’

김지훈으로서는 더없이 환영할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재정에 극도로 민감한 민정호가 무상 치료를 기획하다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문제는 마지막 조건이었다.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분야를 막론하고 왜 내가 꼭 집도를 해야 합니까? 아이들에게 집중하면 병원 홍보는 저절로 될 텐데, 굳이 과장이 집도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이유가 없잖아요.”

민정호가 고개를 저었다.

“과장님, 사람들은 말이죠. 병원 의사 중 과장을 가장 실력이 뛰어나고 바쁜 의사로 인식합니다. 따라서 병원 홍보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과장님이 직접 수술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내 파트 환자면 얼마든지 수술한다니까요. 하지만 예를 들어 대장 질환을 갖고 있는 아이라면 이경석 선생님이 하시는 게 맞죠. 내가 전적으로 수술한다고 홍보 효과에 얼마나 차이가 나겠어요?”

당연한 말이었다.

“말씀대로 차이가 안 날 수도 있지만 효과가 상당 부분 떨어질 수는 있죠.”

“효과가 떨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속된 말로 얼굴마담이란 말이 있습니다. 누가 됐든 한 사람이 대표해서 모든 치료를 진행해야 신뢰도가 올라가기 마련이라는 의미죠. 그동안 방송 출연 여러 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경험을 살려 약간의 언변과 믿음을 주는 스타일까지 갖추면 더 좋겠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만, 특집 방송 한 번인데 무슨 얼굴마담이 필요해요?”

생각을 굽히지 않던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고민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런데 무언가 결론을 낸 표정을 지으며 당사자인 김지훈이 아니라 한 발 비켜나 있는 정훈철을 보았다.

“한 번뿐이라면 과장님 말씀이 맞긴 하네요. 반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도 아닙니다. 형님!”

헉! 정훈철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정말 인맥에 목숨 거는 모양이었다.

“왜? 나도 김 과장이 전적으로 맡아 줬으면 좋겠지만, 자기들끼리 결정해야 할 일을 두고 왜 날 봐? 설마? 더 이상은 안 돼.”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이 이어졌다.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방송하시죠. 최소한 어떤 수술을 누구에게 했는지 정도는 알려 줘야 시청자들도 믿고 후원을 하지 않겠습니까? 치료 후에도 환경이 나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신 교수님,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일차적으로 치료가 급선무지만 우리들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생활환경일지도 모릅니다. 후원이 절실하게 필요하겠죠. 후원하는 사람이 많아야 방송도 뜰 테고요.”

김지훈이 이리저리 얼굴만 쳐다보았다.

다 좋은 말이었지만 원하는 답과 거리가 멀었다.

“민 부원장님, 방송 횟수는 핵심이 아니죠. 무상이라고 해도 최고의 진료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논의를 하는 겁니다. 이미 여러 선생님께 과장님이 소아 수술에 있어서도 독보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 교수, 소아과는 또 어떻게 할 거야?”

“서울 병원 원장단과 펠로우 파견을 두고 협의 중이야. 원장님은 반대할 가능성이 높지만 전체적으로 긍정적이니까 무난히 해결될 것 같아. 진상건 이사장이 직접적으로 개입할 일도 아니고 말이야.”

이미 상당한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 해도 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려 하는지 김지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과장이란 직함을 보는 시각의 차이였다. 특히 젊고 유능한 의사가 대학 병원 과장이라면 상품성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고, 이를 간과할 민정호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공은 정훈철에게 넘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