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발바닥에 불붙었다.
부랴부랴 머리 맞대 마취과 펠로우 추가 증원을 요청했다. 촉박한 시한이 도리어 득이 되는 상황이었다. 최태우 의원의 입김이 아직 살아 있는 데다 진상건이 방해할 시간 자체가 없는 덕이었다.
진충기 교수의 진료실 공유 방안을 확정한 후 연구실을 배정해 바로 내부 공사에 들어갔다. 깨끗이 청소하고, 필요 집기만 들이면 되는 일이었지만 초빙한 교수인 만큼 김지훈도 특별히 신경 썼다.
“마음 편히 진료하실 수 있도록 확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소파는 언제 들어와요? 명패는 만들었죠?”
꼼꼼히 확인한 김지훈이 가장 중요한 일에 집중했다. 바로 다섯 번째지만 사실상 세 번째가 될 간 이식 수술 팀 준비였다.
김지훈이 주요 의료진을 모두 모았다.
공식 회의였다.
다들 진지하게 임했다.
김지훈이 모두발언을 했다.
“사전에 충분히 논의하지 않고 진충기 선생님을 영입하게 된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병원이 본궤도에 오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분이라 확신하기에 성사시킨 일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 정식 근무를 시작하시면 모두 반갑게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는 이미 개인적으로 불미한 일이 있다고 들었을 것이다. 여러 말이 나돌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거론할 일이 아니었고, 진충기 교수가 해결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폐쇄적인 분위기가 아니기에 다들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윤석진 선생님, 내과는 누가 담당하기로 했습니까?”
“제가 김 과장님과 손일석 선생님 수술을 맡고, 공정식 선생이 진 교수님, 서도진 선생, 강병옥 선생 팀을 맡기로 했습니다.”
당분간 서도진과 강병옥은 매주 번갈아 수술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다섯 번째 수술 팀까지 본격적으로 가동된다고 해도 내과 역시 교수 자원을 키우고 있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식 선생님,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겠지만 진충기 선생님은 정말 실력 있는 분입니다. 혹시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먼저 이해해 주시고, 호흡을 잘 맞춰 주기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여자 수술 팀은 어떻게 배정했습니까?”
신현수가 확실하게 기억해 달라는 듯 윤석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준영 선생님은 과장님 수술만 맡기로 했습니다. 제가 진충기 선생님과 손일석 선생님 수술을 담당하고, 남은 수술은 안호석 선생이 들어가게 될 겁니다.”
“좋습니다. 고경아 선생님, 갑작스럽게 팀이 늘었는데 수술실은 문제가 없겠습니까?”
“신입 간호사를 선발할 때부터 준비했습니다. 우리 간호과는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습니다.”
“다섯 팀이어도 문제없겠습니까?”
“기간은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큰 힘이야. 경아 씨, 아니 간호 과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믿습니다.’
“당분간 가장 힘들 수밖에 없는 마취과 선생님들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펠로우 선발만 확실하게 해 주세요.”
윤서연 역시 깔끔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수혜자 수술 팀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빠르면 이 주 후부터 네 팀이 수술하게 될 텐데, 불행히도 현재 어시스트가 가능한 펠로우는 두 명뿐입니다. 펠로우 선발 때까지 정원 부족을 해결해야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다들 집도의라고 뒷짐 지고 있다간 이혁원과 송진우에게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살인적인 일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난처한 것인지, 이미 답이 나와 있어 머뭇거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과도기를 헤쳐 나갈 방안은 단 하나뿐이었다.
가장 직설적인 서도진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강병옥 선생과 저는 아직 더 배워야 합니다. 펠로우 충원 때까지 번갈아 가며 퍼스트를 서겠습니다.”
앞장서 자원했다.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인데 뜻밖의 소식까지 전했다. 사실 모두 예견한 일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벌어질 줄은 기대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모찬우 선생이 펠로우 선발과 상관없이 근무하겠다는 연락을 해 왔습니다. 법적으로는 수련 기간이 남았다며, 다음 주에 바로 남은 근무를 시작하겠답니다.”
“모찬우 선생이?”
“예.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 같습니다.”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다들 웃었다.
펠로우로 뽑아 달라는 의도가 뻔뻔할 정도로 노골적이었지만 믿음직한 후배가 분명했다. 능력과 열정을 모두 갖췄으니 향후 크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부족했다.
김지훈이 서도진을 보며 손을 들었다.
민정호와 진충기 교수 덕에 시일이 앞당겨졌지만 김지훈 자신의 목표가 분명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마냥 미룰 일이 아니었다.
“저도 시간이 되면 퍼스트 서겠습니다.”
손일석이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휴! 과장님에 찬우까지 이러면 나도 어쩔 수 없네요. 혈관 수술까지 너무 바쁘지만 저도 동참합니다. 이러면 인력 부족은 해결되는 거죠? 민 부원장님, 추가 수당 확실하게 계산해야 합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많이만 하십시오. 수당은 확실하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더 큰 웃음이 터졌다.
편안하게 오가는 대화를 듣던 김지훈이 자리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신현수가 발언을 요청했다.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썼다.
잠시 입을 열지 못하던 신현수가 돌연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눈길을 주며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정신없이 힘들기만 했던 시간이었는데 어느덧 목표했던 간 이식 수술 팀이 완성 직전에 들어섰다. 다른 파트 역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결과였다.
앞으로 더 큰 목표를 위해 계속 달려야 하겠지만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이런 발전의 원동력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러분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드립니다. 우리 병원이 이룬 모든 성과를 공유하겠습니다. 모든 분들이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순 침묵이 흘렀다.
교수이자 스탭 중 한 명인 신현수가 아니라 재단 이사이자 전문 병원의 경영자로서 마음속 고마움과 뜨거움을 고스란히 전했다.
“아울러 김지훈 과장님이 우리 병원 운영이사로 선임됐음을 공식적으로 알려 드립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김 과장님께도 각별한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민망해진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그때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이내 우레처럼 커졌다.
신현수의 마음이 전해졌다.
김지훈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지만, 김지훈이 없었다면 지금도 초반의 어려움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스스로 이룬 일이었다.
“왜들 이래요? 우리가 함께 이룬 일인데……. 신 교수는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래.”
당황스러워 쩔쩔매는 모습에 즐거운 웃음까지 터졌다. 불현듯 모든 이의 뇌리 속에 전문 병원 참여를 설득하던 김지훈의 얼굴이 스쳤다.
‘그때는 불안했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지금처럼만 해 주세요.’
‘지훈 씨, 파이팅!’
이 자리에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가 새삼 다가왔다. 원장과 부원장이 운영이사 선임을 모를 리 없었다.
자격이 충분하다고 인정했다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참석한 모든 이들이 미래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했고, 기꺼이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떠들썩하게 자리가 끝났다.
손일석이 외쳤다.
“민 부원장님, 전체 회식 한번 합시다.”
“전체 회식이요? 그런 장소가 있습니까?”
“과마다 돌아가면서 하면 되죠. 중요한 건 돈 아니겠습니까? 부족하면 재단 이사님과 운영이사님께 찬조를 받는 것은 또 어떨까요?”
계산기 돌아갔다.
“그게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김 이사님, 신 교수님, 금일봉 부탁드립니다.”
“두둑하게!”
꼼짝없이 찬조를 하게 된 김지훈과 신현수가 움찔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고경아와 윤서연이 매서운 눈으로 손일석을 노려보았다.
“맞벌이 부부들이 왜 이래? 좋은 게 좋은 겁니다. 수당도 나오잖아요. 간만에 소고기 먹게 생겼네. 하하하!”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무턱대고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밥 한 끼 쏘는 것도 좋았다. 물론 지엄하신 마님의 허가가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신 교수, 얼마 낼 거야?”
“왜?”
“그것보다 적게 내려고. 내가 하나 아래잖아.”
적당한 선을 만들어 고경아의 심한 불안을 씻어 주었다. 그래도 먹을 입이 워낙 많은 데다 과장이란 타이틀까지 있어 만만치 않게 나갈 것이다.
김지훈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모처럼 함께하는 퇴근길이었다.
회의에서 보인 고경아의 준비성과 딱 부러진 태도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혼자 몇 사람 몫을 하면서도 빠트리는 일이 없다니 진정한 능력자가 분명했다.
기쁜 일이 또 있었다.
“지훈 씨, 희연이 학교 배정 받았어요.”
드디어 희연이가 입학한다!
“그래요? 어디예요?”
“바로 집 앞인데, 횡단보도가 몇 개 있어서 걱정이네요. 매일 경희한테 맡기기도 미안하고요.”
기쁨도 잠시, 들을 때마다 미안하고 갑갑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봐주는 가사 도우미를 쓴다고 해도 오히려 펄쩍 뛰는 고경희와 이모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희연이를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욕심이 분명했다.
문득 손일석까지 떠올랐다.
“후우! 애 소식은 없어요?”
“아무 이상도 없다는데 왜 아이가 안 생기는지 모르겠어요. 지나가는 말이겠지만 며칠 전에 입양 소리까지 해서 정말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입양이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 정서상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사람들의 인식이나 시선도 신경 쓰이기 마련이었다. 당장 김지훈도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었다.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했어요. 아직은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잖아요. 입양한 후 갑자기 애가 생기면 그것도 곤란할 테고요.”
“조언을 할 수도 없는 문제네요.”
때문일까?
희연이가 더없이 소중했다.
진정 감사한 존재였다.
덕분에 혼났다.
“지훈 씨, 과자는 하나만 사요. 초콜릿은 또 왜 집어요? 이빨 다 썩는단 말이에요.”
“두고두고 먹으면 되잖아요.”
“일단 지훈 씨가 먹질 말아야지, 매일 구진구진하다며 과자 하나는 꼭 뜯는데 그게 되겠어요?”
김지훈이 못 들은 척 앞장섰다.
‘자기가 더 먹으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쪼르르 달려 나와 함박웃음을 짓는 희연이가 마음속 불만을 싹 날려 주었다. 고경아는 절대 안 먹는다며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옆에 앉는 순간 과일과 과자 없어지는 속도가 확실히 빨라졌다.
오도독! 오도독!
“어머머! 저 여자가 숨겨 놓은 딸이었어? 그럼 아들하고 어떻게 되는 거야? 막장이 따로 없네. 막장이.”
드라마는 또 언제 볼까?
멀쩡한 배우 물고 뜯으며 분개하는 아내를 보는 일 또한 행복이었다. 물론 바둑이나 다큐멘터리 채널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무한히 반복되는 한 주가 또 지나갔다.
***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진충기 교수가 첫 출근을 했다.
병동에 올라와 미처 인사하지 못한 외과 동료들과 간호사에게 일일이 자신을 소개했다. 분명 서먹할 텐데 상당히 편안한 말투와 태도를 보였다. 그사이에 자신감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선생님, 전 수술이 있어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인사는 민 부원장님과 함께하시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간 이식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 이혁원, 고경아, 김진호 교수.
이준영 교수, 안호석, 노련한 간호사, 윤서연.
공여자, 수혜자 할 것 없이 최고의 수술 팀이었다. 건강한 간 일부가 절제되고, 망가진 간을 제거한 후 혈관을 다듬는 과정이 물 흐르듯 진행됐다.
“공여자 간 절제됐습니다.”
“받을 준비 끝났습니다. 바로 옮기세요.”
잠시 부산했던 수술실이 이내 정적 속에 잠겼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장박동과 인공호흡기 소리만이 수술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렸다.
진충기 교수가 눈가를 좁혔다.
쉬지 않고 수술을 좇았다.
복강경 수술은 정확하면서도 신속했고, 혈관 수술은 신중하고도 정교했다. 전문 병원이 빠르게 발전한 원동력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준영 선생님과 김지훈 선생은 물론, 전주에 봤던 손일석 선생까지 모두 최고의 써전이다. 오길 잘했어. 이런 선생들과 한 공간에서 경쟁하려면 나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올바른 선택이라 확신했다.
가슴속 깊숙이 묻어야 했던 욕심과 야망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지난날의 과오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다른 사람을 누르려 하면 지는 병원.
함께하려 하면 스스로 승리하는 병원.
그것이 전문 병원이었고, 함께할 써전들이었다. 김지훈이 먼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란 이준영 교수의 말만으로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자!’
진충기 교수가 생의 두 번째 길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