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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43화 (1,143/1,329)

9화

메이저 수술은 백이면 백 점심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유 하나로 식사를 해결한 김지훈이 눈을 빛내며 서도훈의 수술실을 찾았다.

상당한 의미가 있는 수술이었다.

서도훈이 드디어 췌장공장 문합술의 첫 집도를 맡았다. 나종진이 퍼스트를 섰고, 이경석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수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지훈이 복도에 서서 모니터를 보았다.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거나, 혹은 파트장이 수술을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부담을 가질 수 있어 되도록 간섭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김지훈이 어려운 수술을 집도할 때 창밖을 서성인 이준영 교수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첫 수술인데 잘하네. 이 고비를 넘기면 정말 강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거야.’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린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 한 쌍은 분명 신현수가 맞는데 곁에 선 사람이 너무 낯설었다. 눈가에 힘을 주며 누구인지 확인하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진충기 선생님?”

“며칠 만에 또 보네요.”

수술을 보러 온다더니 정말 왔다. 무척 반가웠지만 사직서를 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냥 웃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묘한 기대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얘기 들으셨죠? 선생님과 만난 다음 날 바로 사표 냈습니다. 머리부터 식힐까 하다 간 이식 수술을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괜찮으시죠?”

“언제든 환영합니다. 마침 손일석 선생이 수술하고 있는데 보셨습니까? 저를 비롯해 모두 부족한 점이 많아 항상 긴장하고 있습니다.”

마스크가 실룩 움직였다.

어떤 의미를 가진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진충기 교수가 수술실을 보았다.

보험 적용이 된 이후 전문 병원이 간 이식 수술에 있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간담췌 분야를 망라한 전체적인 수준은 다소 회의적으로 보았다.

판단 근거는 분명했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이 있지만 기존 대형 병원에 비해 장비, 규모, 시설까지 모든 것이 열악할 것이라 여겼다. 더욱이 신생 병원은 능력 있는 의료진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어 자리를 잡는 데만 몇 년이 걸리는 실정이었다.

그도 모자라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 더 있었다.

진상건이었다.

설왕설래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전문 병원이 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가장 확실하게 발전을 담보하는 수단이 없는 것이다. 최근 자신이 처한 상황과 맞물려 더더욱 회의적으로 보았다.

이직을 생각하면서도 전문 병원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간 이식이 아니어도 자신을 원하는 병원은 많았고,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때쯤 오 교수가 연락했었나?’

김지훈이 자신을 찾아온 일은 정말 뜻밖이었다.

평범한 교수 한 명을 선발하는 정도의 조건에 자존심이 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표를 내자 무언지 모를 아쉬움이 강하게 발목을 잡았다. 곧바로 수리한 병원 측 태도에 자칫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도리어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간 이식을 향한 열정이었다.

간담췌 최고의 써전이 되겠다는 야망 역시 결코 죽지 않았다. 노력도 안 해 보고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김지훈에게 뒤처질 수는 없었다. 마지막 목표인 대가 이준영 교수는 아예 넘보지 못할 존재가 될 것이다.

‘하고 싶은 수술을 못하면서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내 삶은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기회라도 부딪쳐 보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일이 없다.’

생각을 바꿨다.

어떤 기회인지 알고 싶었다.

희망을 본다면 자존심을 굽혀야 했고, 원하는 미래가 없다면 또 다른 기회를 찾는 것이 마땅했다. 술김에 한 말이 기억나 민망함을 무릅쓰고 전문 병원을 찾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모든 불신과 의심을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대형 병원 이상으로 바쁜 수술실, 열정과 의욕에 넘치는 의료진, 간 이식을 비롯해 여타 병원들이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수술까지 전문 병원은 활력 그 자체였다.

온몸으로 부딪치며 일하고 싶은 병원이 분명했다. 반면 어떤 일이든 적절한 때가 있기 마련이었고, 때론 단 하루 만에 앞날이 좌우되기도 했다.

진충기 교수가 눈가를 좁혔다.

‘이미 늦었을 수도 있지만 정말 내가 일하고 싶은 병원일까? 너무 성급한 판단은 아닐까?’

신중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다는 아닐 것이다.

오랜 기간 함께한 동료들과 비교해 자신의 입장이나 처지가 같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문 병원의 열정 속에 묻히다 보면 오래 지나지 않아 동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써전은 손으로 말하는 법이었다.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김지훈이나 신현수의 의중도 알 수 없었다.

‘불과 삼사 일 전에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아직 기회가 있는 걸까?’

그때 김지훈이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 우리 병원 수술실을 보시니까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모든 분들의 열정이 눈에 보이네요.”

김지훈과 신현수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긍정적으로 보셔서 다행입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제가요?”

“선생님께 말씀드린 제안 아직도 유효합니다. 개인적으로 선생님과 동료로서, 써전으로서 경쟁하고도 싶고요.”

진충기 교수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써전으로서 경쟁하자고?’

여전히 자신의 입으로 합류 의사를 밝히는 것이 민망할 것이란 생각이 든 김지훈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앞장섰다.

“수술실은 천천히 보시죠. 이왕 오셨는데 커피 한잔하실까요? 신 교수, 이왕이면 인맥 중시하는 민 부원장님에게도 연락하는 게 좋지 않겠어?”

“오케이!”

“인맥이라니요?”

“우리 병원 행정부원장이 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아마 선생님과도 꼭 안면을 트고 싶어 할 겁니다. 물론 우리 제안과는 무관합니다.”

진충기 교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김지훈, 신현수, 민정호, 진충기.

고소한 커피 향이 감도는 가운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병원에 관한 사항이 오갔고, 진충기 교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잠깐 놀라긴 했다.

“김지훈 선생님이 운영이사시라고요?”

“신 교수, 왜 이래?”

“이사라는 말이 아직도 어색해? 이젠 적응할 때도 됐잖아. 다들 알게 손 교수한테 이사라고 얘기 좀 해. 진 교수님, 굳이 김 과장이 운영이사를 겸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건 우리 병원 운영 방침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의사를 비롯해 모든 직원이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강한 동기가 되겠군요.”

“능력만 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에 못지않은 친화력과 동료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진충기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원하던 분위기가 조성됐다.

신현수가 눈가를 굳혔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진 교수님, 정식으로 초빙하고자 합니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시겠지만 신생 병원이라는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닙니다. 중요합니다. 단,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병원이 반석에 올라서면 어떤 부분도 소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드립니다.”

진충기 교수가 입술을 모았다.

주어진 시간을 함부로 허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잘못 선택한다면 단 일 년이란 시간만으로도 인생의 방향이 바뀔 수 있기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민정호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미처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교수님께서 오시면 마취과 펠로우를 추가 선발해야 하기 때문에 단 하루도 여유가 없습니다.”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진충기 교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애초 병원 분위기를 보겠다는 의도가 훨씬 강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결정하지 않으면 영입 자체가 취소될 상황이라니 상당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계약 기간은 최소 일 년이고, 보수에 따른 실적 부분을 자주 듣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실적이요?”

“재정 상태가 불안해 어쩔 수 없습니다.”

솔직한 말은 좋았지만 점입가경이었다.

어느 의사도 행정 직원의 간섭을 꺼려하기 마련이었다. 그만큼 독자적인 영역을 중시했고, 많은 병원이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이건 월권 아닌가? 매사 돈과 결부시킨다면 의욕까지 떨어질 텐데 분위기를 잘못 읽은 건가?’

김지훈을 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는 웃음을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 부원장님 역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입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죠. 이 부분은 근무를 하셔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렵네요.”

“진 교수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맡은 업무에 충실하시면 어떤 문제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중한 것은 좋지만 질질 끄는 일은 사양합니다.”

“하하하! 선생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원래 말투가 이래요. 신 교수, 그렇지?”

민정호는 밀어붙이고, 김지훈은 무마하고!

“진 교수님,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우리도 심하게 오해를 했고요.”

“김 과장님, 신 교수님, 사적인 말을 할 자리가 아닙니다. 진 교수님,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결정해 주십시오. 그래야 번복하는 사태가 없을 겁니다.”

솔직히 초면인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한다는 것이 무척 난감한 일이었지만 민정호는 초지일관 직진만을 고집했다. 마치 지금 결정하지 못하면 며칠이 지나도 결정할 수 없다고 믿는 것 같았다.

진충기 교수가 고민을 거듭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성이라! 나만이 아니라 전문 병원도 복잡한 사정을 가진 이상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모두들 초조하게 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원하시는 날짜에 근무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정호가 서류를 꺼냈다.

완벽하게 작성된 계약서였다.

“꼼꼼하게 확인하시고, 수정할 사항이 없으면 바로 계약하시죠. 근무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가능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진충기 교수는 물론 김지훈과 신현수도 놀랐다.

“언제 준비했어요?”

“진 교수님 영입을 논의한 직후에 작성했습니다. 도장 찍는 일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 교수님, 대충 보지 마시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철저하게 확인해 주십시오.”

계약서 확인에 꽤 시간이 걸렸다.

진충기 교수가 웃었다.

“이렇게 철저한 계약서는 처음 보았습니다. 민 부원장님이 어떤 분인지 알 것 같군요. 도장을 안 갖고 와서 지장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지장을 찍은 진충기 교수가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갑갑한 마음만큼 차갑게 식어 왔을 손이 뜨거운 열기를 전했다.

김지훈이 남몰래 불끈 주먹을 쥐었다.

‘드디어 다섯 팀을 모두 만들었다. 펠로우 보강이 이뤄지면 정말 화끈하게 돌아가겠어.’

시간이 늦었지만 이대로 자리를 끝낼 수 없었다. 더구나 써전에게는 종이에 불과한 계약서보다 훨씬 강한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 있다.

바로 대가 혹은 원로와의 약속이었다.

‘쐐기를 박자.’

“진충기 선생님, 모든 식구들과 인사하기는 어렵지만 꼭 보고 가셔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진충기 교수가 또 웃었다.

‘식구? 자연스럽게 나오네.’

민정호가 재빨리 연락했다.

원장인 송재덕 교수를 찾았다.

이준영 교수와 함께였다.

계약을 떠나 찾은 김에 인사를 드릴 작정이었던 진충기 교수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존경하는 선배들에 대한 예의였다.

“진 교수, 어서 와. 어서. 며칠 전에 김 과장과 만났다고 들었다. 들었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처럼 결정했는데 왜 기쁜지 모르겠다. 잘 왔다. 잘 왔어. 하고 싶은 수술 마음껏 하자. 마음껏.”

“감사합니다.”

“허허! 오늘로 간 이식 팀이 꽉 찼구나. 찼어. 첫 수술하는 날 술 한잔하자. 내가 살게. 나 원장이야. 원장. 알지? 알고 사인했지?”

은근한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

사무적인 대화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환영에 진충기 교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쯤 되면 평소 진충기 교수를 능력 있는 써전으로 인정해 온 이준영 교수도 한마디 해야 했다.

김지훈이 슬쩍 재촉했다.

‘스승님,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합니다.’

“진 교수.”

“예, 선생님.”

“후회하지 않을 거다. 환영한다.”

“감사합니다.”

상황 끝났다.

카리스마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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