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신현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오창도 선생님과 통화까지 했으면 며칠 고민하고 얘기한 게 아니네. 은근히 음흉하다니까.”
“본격적으로 생각해 본 건 며칠밖에 안 돼.”
“됐네요. 우리 김 과장이 이 정도로 신경 썼다면 오든 말든 결과가 나쁠 리가 있겠어요? 김 과장, 손 그대로고 마음 확실히 변했으면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아. 어차피 경쟁 사회인데 한 명 더 는다고 해서 변할 게 있겠어? 아! 모든 조건을 받아들여도 문제네. 진충기 선생님이 하오문의 쓴맛을 보기 전에 강호의 도의부터 알아야 하는데 걱정이야.”
“다른 사람이 중간에 개입하면 자신도 모르게 조건을 변경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오창도 선생님이 계신 자리에서도 보수 문제만큼은 확실해야 합니다.”
“와! 우리 민 부원장은 역시 정말 일관된 사람이야. 돈돈돈을 이렇게 외치는데 왜 점점 마음에 드는 거야?”
“사적인 감정 표현은 삼가해 주십시오.”
결국 웃음 터졌다.
김지훈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무작정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힘든 몸을 상쇄하고도 남을 지금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깨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반면 부담은 더 커졌다.
초빙이라는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빡빡한 조건에 말도 꺼내지 못할 수 있었다. 진충기 교수를 둘러싼 일의 진실 역시 투명하지만은 않았다. 반면 전문 병원의 핵심이 되고도 남을 써전임은 분명했다.
‘조건을 떠나 어려운 상황을 알고 연락한 것으로 생각하면 자존심까지 상할 텐데,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여러 걱정이 앞섰다.
변수 하나가 생기면 필연적인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신현수와 민정호가 김진호 교수와 심각한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신 교수, 만일 진충기 교수가 오면 간 이식 수술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잖아. 다른 수술까지 늘어날 테고, 그렇게 되면 마취과에 가해지는 부담이 너무 커. 수술 증가 속도가 너무 빨라.”
“그 생각을 못했네요.”
순차적으로 수술을 늘린다는 계획하에 움직였고, 현재 수준에서는 다소 여유가 있어 마취과 펠로우는 증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호 교수 말대로 진충기 교수를 영입한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몇 명이나 더 필요할까요?”
“최소 두 명은 더 있어야 돼.”
이미 펠로우 선발 정원은 정해진 상태기에 난감한 일이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유를 제출하고 추가 선발을 요청하면 가능했지만 진상건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이었다.
민정호가 말을 잃었다.
진충기 교수에 이어 펠로우 추가 선발은 재정을 책임진 입장에서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넘어서는 사태였다. 규모가 크다면 예비비를 이용할 수 있겠지만 그런 형편도 아니었다.
신현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만일 예산이 받쳐 주지 못한다면 진충기 교수 영입 자체를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더구나 오자마자 뚝딱 환자를 만들어 칼바람을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민 부원장님, 가능하겠습니까?”
답은 빤했다.
현재 능력과 수개월 후 예측되는 실적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그것이 행정부원장의 업무이기도 했고, 민정호의 장점이었다.
그런데!
“가능하도록 만들어야죠. 변수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제 예측보다 훨씬 빠르게 확장되는 양상이라 도리어 도전 정신이 생깁니다. 저 때문에 발전이 늦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번 일에 있어서는 제 의견이 필요할 것 같지 않습니다. 선행돼야 할 펠로우 추가 선발은 신 교수님, 진충기 교수님 영입은 김 과장님 일이 아닙니까? 김진호 교수님, 아무 문제 없도록 최대한 보조하겠습니다.”
“하하하!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감사합니다.”
계획대로 무난하게 진행될지, 또다시 골머리를 싸매야 할지 김지훈에게 달렸다. 게다가 추가 선발 요청 시한이 걸려 일주일 내에 진충기 교수 영입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압력 아닌 압력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에게는 대단한 부담이었다.
한두 번 만나 해결할 일이 아니기에 촉박한 시간도 문제였지만, 한 사람의 영입이 병원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한 압박이었다.
‘진충기 선생님이 우리 병원에 꼭 필요한 사람인가? 현실에 안주한다면 모를까, 미래를 생각한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확신을 갖고 만나자.’
다행히 오창도 교수가 바로 자리를 만들었다.
황금 같은 주말에 툭하면 서울로 가야 했지만 지금의 고생이 훗날 웃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영입에 실패한다고 해도 값진 경험임은 확실했다.
진충기 교수를 만났다.
오창도 교수도 함께 자리했다.
안부를 주고받는 내내 웃고 있었지만 마음고생이 심한지 눈가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매번 볼 때마다 느꼈던 강한 자신감도 찾을 수 없었다.
서글픈 일이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예의가 아닐뿐더러 분위기만 망칠 뿐이었다. 초빙이란 말을 꺼내기 힘든 자리일 수도 있었지만, 진충기 교수도 단지 식사 한 번 하기 위한 자리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서로를 인정하지만 그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차근차근 풀어 가야 할 자리였다.
“간 이식 수술 많이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군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만 아직 멀었습니다.”
“하하하! 욕심이 과하십니다. 이런! 처음 식사하는 자리인데 술이 없네요. 한잔하실까요?”
“술은 다음에 하시죠.”
“써전끼리 만나는 자리인데 술을 못 마신다니 아쉽네요. 그렇게 하죠.”
자연스럽게 병원 이야기가 이어졌다.
진충기 교수는 전문 병원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H 병원 상황은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사실 간 이식 부분은 실적이라고 내세울 성과도 없는 상황이었다.
속이 꽤 상할 것이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는 동안 김지훈이 적절한 기회만 찾았다. 하지만 다리 역할을 해야 할 오창도 교수조차 본론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말만 안 할 뿐 곤란한 처지라는 건 나도, 오창도 선생님도, 진충기 선생님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감정을 앞세우다간 시간만 허비하고 만다. 지금은 내가 온 목적만 생각하자.’
“선생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 뵙자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대충 들었습니다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우리 병원은 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확장이나 종합 병원 승격은 차치하고 당장은 간 이식 수술을 일주일에 다섯 건 정도 하고자 합니다.”
“다섯 건이나요? 하긴 예약이 몇 달 이상 밀려 있다고 하던데 불가능한 일은 아니군요.”
“저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능할 줄 알았는데 현재 상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이준영 선생님을 비롯해 쟁쟁한 써전이 한둘이 아닌데 그럴 리가요? 엄살 아닙니까?”
김지훈이 바싹 당겨 앉았다.
“간 이식 파트를 맡아 책임지고 집도할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오늘 선생님을 만나고자 했고,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 합니다.”
“제안이라니요?”
“우리 병원 스탭으로 와 주십시오.”
진충기 교수가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예견했다는 얼굴이었다.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가장 하기 힘든 말이 남았고, 이제 와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함을 무릅쓰고 조건을 말했다.
진충기 교수가 허탈하게 웃었다.
“제안은 고마운데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름 대학 병원 과장까지 했는데 스탭 중 한 명에 보수는 전문 병원 수준에 맞춰 달라니 당황스럽네요. 날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병원으로서는 최선이지만, 선생님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라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 병원의 미래를 함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미래요?”
“간담췌 분야의 최고 병원을 만들고 싶습니다. 간 이식 분야는 미국이나 일본 굴지의 병원에 버금가는 규모와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목표를 이뤄 낼 써전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충기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대단한 포부였다.
김지훈의 말에 살짝 흔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래는 바람일 뿐이었고, 현실은 당장 살아 나가야 하는 문제였다. 돈, 명예, 권한을 포기하지 못한다고 해도 정당하게 얻은 이상 속물이라 불릴 이유도 없었다.
수락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분위기가 묘해졌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오창도 교수는 진충기 교수를 보면서도 정작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도 비슷한 처지에 빠졌었고, 지금은 무척 만족스럽지만 상황이 다른 탓이었다.
‘난 H 병원에 비견되는 서울 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선생님이 제시받은 자리는 신생 병원에 불과해. 김지훈 선생과 미래를 믿고 가기에는 무리겠지.’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무리한 일이 분명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진충기 교수의 대답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잠시 처졌던 김지훈이 돌연 어깨를 활짝 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도 의미 없는 자리가 아니었다. 외부 병원 의사 중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써전과 처음으로 사적 자리를 가졌고, 은연중 서로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됐다.
그 자체로 고마운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늦었지만 술 한잔하실까요?”
“그럽시다.”
마음속 괴로움이 고스란히 술에 녹아들었는지 진충기 교수가 꽤 많이 마셨다. 혀가 꼬부라지기 직전까지 한탄이나 불만을 터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 이식에 관한 말만 했다.
아쉬움일 것이다.
누구보다 간 이식을 충실히 준비해 왔고, 실력도 충분하건만 이제 H 병원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호소하는지도 몰랐다.
결국 몸을 가누지 못했다.
“오 교수, 난 욕심 없어. 과장 자리 지켜야 한다고 한 적도 없다. 내가 설 자리만 주면 되는데 왜 그것도 허락하지 않을까? 책임을 갖고 간 이식 수술하고 싶다는 게 욕심이냐? 내 발로 나가기를 바란다면 나가야지.”
“많이 취하셨어요. 그만 일어나시죠.”
“우리가 언제 시간 정해 놓고 마신 적 있어? 오 교수, 한 잔 더 하자. 그때 오 교수 마음이 이랬구나. 예전 생각하니까 미안한데 좋다.”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만 내쉬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 받고 오창도 교수에게 기댄 채 비틀비틀 걸어가는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 술 힘을 빌려 발버둥이라도 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모두 바친 병원이기에 모든 욕심을 버린다고 해서 편할 것 같지도 않았다.
진충기 교수 목소리가 들렸다.
“김 과장님, 언제 한 번 수술 보러 병원에 들르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죠?”
“언제든 오십시오.”
대답을 듣긴 들었을까?
아니, 자신의 말을 기억이나 할까?
결국 진충기 교수 영입은 실패했다.
손일석, 서도진, 강병옥 이외에 한 명 더 필요했지만 답이 없었다. 그러나 결코 우울해할 일이 아니었다. 신현수와 민정호 역시 아쉬워할 뿐 재정 부담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에는 관심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명확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목표가 있다.
어떤 난관이나 고비도, 진상건이 미쳐 날뛴다고 해도 전문 병원의 발전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김지훈을 비롯한 모든 의료진의 강한 각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들 결과를 듣고 아쉬워했지만 연연할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도 깔끔하게 잊으려 했지만 갑자기 들은 소식에 착잡하기만 했다.
“사직서를 내셨다고요?”
“H 병원 총무과 과장 말이니까 확실할 겁니다. 반려될 것 같지 않다고 합니다.”
“조금 더 버티시지.”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던 모양입니다. 전공의 때부터 쭉 근무하셨다고 들었는데, 배척당한다고 느껴진 순간 받은 타격을 누가 알겠습니까?”
써전에게 마음의 안정은 수술의 안정성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유로 사직서까지 냈다면 당분간 칼을 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오창도 선생님도 속상하시겠네.’
이런 때일수록 일과에 충실해야 했다.
수요일 아침이 밝았다.
담낭암이 예약돼 있었다.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친 김지훈이 수술실로 들어가 바삐 움직이는 동료들을 보았다. 비록 몸은 힘들지만 마음 놓고 집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 띠! 띠! 띠!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각 방에서 동시에 수술이 시작됐다.
써전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자신의 손으로 한 사람의 생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보람은 없었다. 간 이식을 하는 손일석이 가장 늦게까지 수술실을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대신 자부심을 얻을 것이다.
첫 수술이 막바지에 달했다.
누군가 창밖을 스쳐 지나갔다.
‘현수가 맡은 공여자 수술이 벌써 끝났나?’
마무리를 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