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41화 (1,141/1,329)

7화

새로운 주가 시작됐다.

김지훈이 심각한 고민에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병원 상황상 초미의 관심사는 역시 펠로우 선발이었고, 다들 다르지 않아 걱정이 큰 때문인 정도로 넘겼다.

오늘도 힘든 일과를 끝낸 김지훈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뭔가 결심한 듯 얼굴을 굳히며 휴대폰을 꺼냈다.

“오창도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어이쿠! 소식은 듣고 있는데 전화 한 통 못했네요. 잘 지내셨죠?)

간단하게 안부를 주고받은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좋은 일이 아닌 데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 묻는 일이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진충기 선생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진충기 교수와 가장 친한 오창도 교수였다.

지금도 연락을 유지하고 있어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을 텐데 구체적인 언급을 꺼려했다. 당사자가 아닌 탓이거나 확실하지 않아 말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목소리가 밝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누구보다 안타까워하고 있었지만 고작 서로의 걱정을 들어 주는 것으로 통화가 끝났다.

“제가 관여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연락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연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오창도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지훈 선생님, 고맙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가슴이 먹먹했다.

한 다리 건너 이어진 인연에 불과했지만 진충기 교수 역시 동료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어쩌면 다른 병원 소속 의사 중 유일하게 라이벌로 인정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에게 라이벌이란 단순한 경쟁자만을 의미하지 않으니 말이다.

은근히 초조한 나날이었다.

일견 낙천적으로 보이는 손일석까지 얼굴 볼 때마다 결정이 났는지 물었다. 간 이식 파트와 함께 혈관 파트까지 맡고 있는 탓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김 과장, 연락 없었어?”

“이번 주 내에 결정 나니까 안달복달하지 말고 기다려. 현수 말로는 최태우 의원의 입김이 제일 세다잖아. 진상건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어휴! 진상건! 진상건! 앞에 있었으면 한 대 때려 주고 싶네. 우리 병원에 돈 한 푼 안 들이면서 왜 그 지랄인지 몰라.”

“이유야 너도 잘 알잖아?”

“역시 돈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야.”

덩달아 무척 답답해지는 순간 민정호가 찾아왔다. 펠로우 선발은 전화 한 통이면 되고, 진충기 교수 일이라면 혼자 왔어야 하는데 무슨 일인지 신현수와 함께였다.

뭔가 들고 왔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귀를 활짝 열었다.

신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펠로우 선발 인원 통보받았어.”

꿀꺽!

은근한 긴장이 감돌았다.

“아홉 명 신청에 아홉 명 결정!”

“우와아아아!”

김지훈과 손일석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원칙대로 진행됐다면 불안해하는 것이 이상할 만큼 당연한 일이건만 생각 이상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왜 이렇게 좋지? 이게 다 진상건 덕분이네. 물 흐르듯 흘렀으면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갈 일이 나쁜 놈 때문에 너무 기쁜 일이 됐어. 하여튼 그놈은 그놈이고, 이렇게 된 이상 강호의 도의를 지켜야겠지?”

“무슨 소리야?”

“최태우 의원!”

민정호가 바로 끼어들었다.

“신 교수님과 함께 약속 잡을 생각입니다.”

“빠르네.”

“좋은 인연에 훌륭한 인맥입니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사회생활 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사업체든 병원이든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문제가 많아지고,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일도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강호의 도의를 아는 사람이 설마 청탁을 하진 않겠죠? 진상건 같은 놈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우리만이라도 정도를 걸어야 하지 않겠어요?”

“시각에 따라 다르죠. 국회의원이라고 땅 파서 먹고사는 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다는 말은 일종의 진리입니다.”

“흠! 마음에 안 드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네.”

“감사합니다. 손 교수님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왜 나만 겉도는 것 같지?’

딱 필요한 말만 하는 민정호가 손일석과 장단을 맞출 줄은 몰랐다. 웃고 있는 신현수까지 어째 밥 몇 번 먹은 사이처럼 보였지만 듣고 싶은 말이 먼저였다. 마침 이경석이 합류해 사정에 따라서는 자리까지 알맞았다.

“민 부원장님, 제가 부탁드린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 알아보는 중인가요?”

“진충기 교수님 일이요?”

“그렇습니다.”

다들 의아한 눈치였다.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무척 곤란한 처지에 빠지신 것 같습니다.”

“곤란하다니요?”

“간 이식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다른 병원에서 스카우트한 선생님들과 직위와 권한 문제를 두고 충돌한 모양입니다.”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최인호 과장 같은 사람이 온 것일까?

아니면 진충기 교수가 예전으로 돌아간 것일까?

“알력 싸움이라도 한단 말입니까?”

“과장님, 다른 병원 일입니다. 저도 들은 말을 전해 드리는 것뿐이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흠흠! 죄송합니다.”

민정호가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새로 부임한 선생님 중에 재단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 모양입니다. 알력 싸움이라기보다 진충기 교수님이 일방적으로 밀려나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H 병원도 재단 때문에 말썽이 생긴다고요?”

“굴지의 병원이라고 해서 학연, 지연, 혈연이 작동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처럼 생존과 직결된 재정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도리어 더 심하게 곪을 수도 있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래서 간 이식 실적이 우리보다 좋지 않았군요.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새로 왔다는 선생님들은 실력이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네요.”

“수술 실력에 이견은 없답니다. 다만 외과 전체를 자신의 손안에 두려는 것이 문제겠지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상황인데 반발이 없을 수도 없고요.”

“서로 협력하면 정말 무서운 경쟁 병원이 될 텐데, 왜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지 모르겠네요.”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관계자 말로는 일종의 본보기가 된 것 같다고 합니다. 자신의 권위나 미래에 도전할 만한 사람을 미리 제거하는 거지요. 일반 사업체에서는 흔히 보는 일이고, 어차피 자리가 한정돼 있는데 병원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있습니까?”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최인호 과장과의 문제부터 모두 알고 있는 사인방 역시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마치 환골탈태한 것처럼 달라진 진충기 교수 역시 동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석이 형, 어느 동네나 바람 잘 날이 없네요. 강호라면 칼이나 뺄 수 있지, 이놈의 세상이 왜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걸까요?”

“우리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간담췌 부분과 라파로가 더 발전하려면 정말 이기기 힘든 경쟁자가 있어야 하잖아. 특히 간 이식은 이제 활성화되는데 H 병원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면 오히려 손해가 될 공산이 높아.”

“독점의 이득도 있지 않을까요?”

“라파로 초창기를 생각해 봐. 환자 자체가 적었잖아. 간 이식 부분은 더 심해서 전체 파이 자체가 훨씬 작은데 독점하면 뭐 해?”

냉철한 판단이었다.

독점이 마냥 유리하다면 각 병원 모두 자신들의 장기를 숨기기 급급했을 것이다. 정보와 지식 교환의 장인 학회라는 단체는 아예 사라지고도 남았다.

신현수가 일어날 채비를 했다.

“좋은 일도 아닌데 그만하자.”

결국 다른 병원 일이었다.

왈가왈부해야 가뜩이나 힘든 사람 얼굴에 침 뱉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김지훈이 자리를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 일어나? 퇴근 안 해?”

“할 얘기가 더 있어. 다들 앉아 봐.”

자못 심각했다.

“일단 우리 병원 상황부터 다시 생각해야 돼. 현재 간 이식 파트는 네 개야. 펠로우를 충원한다고 해서 주당 다섯 건씩 할 수 있을까?”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게 걱정이긴 했어. 책임지고 집도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잖아. 혁원이를 키운다고 해도 최소 일 년에서 이 년 이상 공백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어.”

진지하게 말하다 말고 돌연 고개를 홱 돌렸다.

“김 과장, 설마?”

김지훈이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한 일이지만 우리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어. 인원 보강은 펠로우만이 대상이 아니다.’

“진충기 선생님을 만나 보고 싶어. 만일 민 부원장님 말처럼 심각한 상황이면 우리 병원 교수로 초빙했으면 해.”

“잠깐! 고민은 하고 말하는 거야?”

“학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어. 전문의 면접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놓친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달았고.”

차근차근 느낀 바를 말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했던 문제기에 십분 동의했지만 진충기 교수 영입은 또 다른 문제였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현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 과장, 진충기 선생님이 누구보다 뛰어난 써전이란 사실은 분명해. 하지만 실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어.”

“무엇이 문제일까?”

“일단 선배야. 우리가 과장 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하지만, 권한과 책임이 있는 이상 무시해도 되는 일은 아니야. 주도권을 두고 싸운다는 말에서 난 진충기 선생님이 아직도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당연한 우려였다.

“또 걱정해야 하는 일이 있을까?”

“진충기 선생님이 간 이식을 보는 관점이 우리와 똑같을까? 간 이식은 공여자 수술 팀만이 아니라 내과, 방사선과, 간호과까지 모든 부분의 절대적인 협력이 필요해. 만일 시각이 다르다면 최악의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어.”

“존중 대신 자신의 뜻대로 운영하고자 할 수도 있단 말이지? 예전 일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도 사람 속까지 완전히 바뀌는 일은 쉽지 않아. 당장 우리 과 내부에서 파열음이 들릴지도 몰라.”

이경석까지 우려를 표했다.

민정호 역시 할 말이 있었다.

“과장님, 재정도 생각해야 합니다. H 병원 보수는 국내 최고 수준입니다. 동일한 대우를 요구한다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감수할 수 없을까요?”

“신 교수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전 당연히 대우하는 만큼 성과를 요구해야만 합니다. 결국 수술을 더 하거나, 혹은 다른 선생님의 실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우리 병원 분위기와 운영 원칙을 볼 때 분란이 안 생길까요?”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자 예상외로 심각하게 다가왔다. 가히 폭탄 발언에 가까운 중대한 사안임에도 고민이 짧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소가 빠졌다.

“신 교수, 진충기 선생님을 만나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내 판단으로는 다소 무리가 가더라도 지금이야말로 진충기 선생님과 같은 써전을 확보해야 할 때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우리 과 펠로우만 다섯 명을 선발하지만 정작 예약 기간을 줄일 방법이 없어. 반드시 필요한 다섯 번째 파트를 만들 대안이 있어?”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신현수가 절충안을 제시했다.

“좋아. 개인적으로 찬성할게. 대신 조건이 있어. 과장 자리나 간 이식 파트 권한 부여는 우리 병원 시스템을 따라야 돼. 즉, 지금은 과장인 너를 중심으로 관리하고,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말이야. 선배 혹은 경력자라고 해서 예외를 두거나 우대할 수 없어. 다들 조건이 있으면 말해 봐.”

“보수 역시 우리 병원 상황에 맞춰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신 교수님이나 손 교수님 수준이 되겠군요. 협상의 여지는 없습니다.”

손일석이 손가락을 튕겼다.

“나도 동의! 우리에겐 능력만 갖춘 써전이 아니라 진짜 동료가 될 써전이 필요해. 부족한 손은 어떻게든 고칠 수 있지만,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는 단 한 시간도 함께하기 힘들잖아. 선배라고 과장 자리 양보할 생각도 없어.”

이경석이 눈을 흘겼다.

“손일석, 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아이고! 형님, 왜 이러십니까? 우리야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도 서운하네. 김 과장, 나도 만나 보는 것까지는 찬성이야. 나이 비슷한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다들 동의했건만 김지훈이 얼굴을 펴지 못했다.

“결국 지금까지 쌓은 것 모두 털고 와야 한다는 말이죠? 나 같아도 거절할 것 같네요.”

“김 과장, 아까 면접 볼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했지? 진충기 선생님 역시 미래를 보고 와야 해. 가진 것을 단 하나도 잃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줄 자리는 없어.”

이경석의 말이 진하게 다가왔다.

언제나 든든한 맏형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의 공력이었다. 문득 이경석이야말로 과장에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진충기 선생님을 만나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

“연락이 돼도 만날 수 있을까?”

“며칠 전 오창도 선생님과 통화했습니다. 간담췌에서 알아주는 선생님인데 초빙도 아니고 참 난감하지만, 만나 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많이 늦었네요. 퇴근하죠.”

눈가를 찡그리며 일어서려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바로 일어날 줄 알았던 사인방은 물론 민정호까지 묘한 눈초리로 김지훈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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