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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39화 (1,139/1,329)

5화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보호자를 만나 무언가를 부탁하는 자리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상대가 온갖 청탁의 대상인 국회의원이었다. 하지만 전문 병원 발전의 핵심 축이 될 펠로우 선발 문제가 묘하게 돌아가 어쩔 수 없었다.

며칠 전 신현수, 민정호를 만났다.

“김 과장, 진상건이 희한한 수작을 부리고 있어.”

“무슨 소리야?”

“재단 산하 병원의 펠로우 선발 인원은 동수로 유지하되, 우리 병원에서 신청한 아홉 명 중 여섯 명을 서울 병원 몫으로 바꿔 달라고 하는 모양이야.”

“여섯 명? 아예 뽑지 말라는 소리네. 정부 반응은 어떻대? 설마 긍정적인 것은 아니겠지?”

신현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민정호도 답답한 눈치였다.

“은근슬쩍 재단 상황을 흘린 모양입니다. 우리 병원 재정 문제와 내부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는 한편, 가장 규모가 큰 서울 병원 펠로우를 늘려야 한다는 점을 명분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립채산제라는 사실을 알리면 되지 않나요?”

“재단에서 법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더구나 병원 재정은 주요 감사 대상입니다. 현재 우리 병원의 재정이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진상건 이사장의 주장을 수용하는 데 법적 문제도 없습니다.”

진상건은 확실히 교활했다.

세 명의 펠로우 증원으로는 전문 병원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더불어 산하 병원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줘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했다.

답답한 일이었다.

방사선과는 몰라도 내과마저 펠로우 한 명의 충원으로는 기존 업무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외과는 확충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 빠질 것이 빤했다.

진료 능력이 정체될 것이다.

적자의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수가 좋아도 균형만 맞출 뿐 미래를 위한 투자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미래가 없으면 현 상태를 유지하기 급급할 테고, 결국 대형 병원에 밀려 그저 그런 병원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신현수가 갑갑한 한숨을 내뱉었다.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가 재단의 공식 통로로 나선 것도 모자라 친분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동원하고 있어. 이권이 걸린 일이 아닌 데다 공익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다들 호의적이라는 소문이야.”

“국회의원 같은 사람까지 개입했단 말이야?”

“배제할 수 없어. 진상건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 정도 인맥은 쉽게 동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지. 이러다 손도 못 쓰고 당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맞대응만이 답이었다.

반면 신현수는 아버지의 후광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적이 없을뿐더러 지금까지 이사가 아닌 의사로서 살아왔다. 힘깨나 쓴다는 정관계 인사와 인연이 있을 턱이 없었고, 있다 해도 진상건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정훈철 형님과 서정호 형님에게?’

무엇으로 이슈를 만들까?

펠로우 선발 건은 불법적인 일도 아니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젓고 말았다.

민정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민 부원장님, 지금이 예전에 말했던 그때가 아닌가요? 진상건을 막아야 합니다.”

“지금 역시 때가 아닙니다. 섣부른 공격은 도리어 우리에게 치명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 인맥도 진상건 이사장과 비교할 수조차 없고요.”

무리한 기대였다.

애초 방법이 있었다면 이런 자리를 가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두 손 두 발 다 놓고 처분만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펠로우 선발 규모를 유지해야 했다.

은근한 눈길이 느껴졌다.

“신 교수,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최태우 의원이 유력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야.”

“직접 부탁하라고?”

“요즘 세상에선 보기 드물게 우애가 깊은 형제고, 결정적으로 김 과장이 주치의잖아.”

“과장님, 이런 부탁은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장이 곤란하시겠지만 때론 원치 않는 일도 해야만 하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체 모를 흐릿하기만 한 무언가가 턱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이 흔히 갖는 부담감일 수도 있었고, 상대가 국회의원이란 사실이 발목을 잡는지도 몰랐다.

결국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원하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득의에 찬 진상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환자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의료 외적인 문제로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피로가 누적되는 의료진을 볼 때마다 절실해졌다.

“말씀하시죠.”

최태우 의원의 목소리에 김지훈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환자 이외의 일로 귀한 시간을 뺏는 것도 모자라 실례까지 범했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꽤 늦었습니다. 빨리 말씀하세요. 부탁이란 것이 뭡니까?”

목소리가 좋지 못했다.

심지어 인상까지 쓰고 있었다.

‘말을 못하는 걸 보니 사적인 부탁이겠군. 원칙, 원칙만 운운하더니 결국 이거였어? 도대체 뭘 해결해 주길 원하는 거야?’

최태우 의원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역구 주민들이 제기하는 흔한 민원일 수도 있었다. 동생을 수술했고, 무사히 회복되는 만큼 그런 성격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단둘만의 자리를 원했다.

병원과 관계된 일이었다면 신현수나 민정호를 대동하는 것이 마땅했다. 때문에 김지훈 자신을 위한 부탁, 즉 부당한 청탁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보기 드문 의사를 만났다고 여기며 개인적으로 기대한 바가 있었던지 화가 치밀 정도였다. 솔직히 적당한 핑계를 대고 바로 일어나고 싶을 지경이었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뜸을 들일 때는 스스로도 부끄럽다는 말이었다.

최태우 의원이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말씀 안 하실 건가요? 서로에게 곤란하거나 무리한 부탁이라면 애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의원님께 곤란할 수도 있고, 무리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

“말씀하세요. 들을 준비가 됐습니다.”

언성이 높아졌다.

“알겠습니다. 우리 병원이 내년에 펠로우 선발을 해야 합니다. 현재도 인력이 부족하고, 발전 계획도 갖고 있어 규모에 비해 많은 수인 아홉 명을 신청했습니다.”

“그래서요?”

“아홉 명 모두 선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의아한 일이었다.

“그런 문제는 정부 내 해당 부처에서 결정하는 데다 전 교육위나 보건위 소속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 쉽지 않았습니다. 경우가 아니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요. 하지만 의원님도 보셨다시피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는 많은 반면 수술할 의사는 태부족인 상황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방법이 있다면 도와주십시오.”

최태우 의원이 눈가를 좁혔다.

펠로우 선발 절차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해도 병원에서 의사를 뽑는 일이었다. 이런 성격의 일은 부탁할 일이 아니었고, 청탁을 할 이유조차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힘들어하며 말을 꺼냈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결국 의사를 뽑는 일 아닙니까? 대학 병원 산하니까 펠로우 역시 사립학교 교직원에 준하는 신분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부탁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까?”

“재단 내부의 일이고, 현재로서는 우려만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유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두루뭉술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어디나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불법이 아닌 이상 머릿속에 담아 둘 일 정도는 됐다. 한편으로 고작 이런 일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김지훈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너무 어색했다.

‘잘해야 몸만 편해지지 본인에게는 어떤 경제적 이득도 없는 일인데 뜸을 들여? 본론은 따로 있겠군.’

구구절절 따질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제 진짜 부탁을 말씀하시죠.”

김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말씀드린 일이 진짜 부탁입니다.”

“펠로우 아홉 명을 선발하는 일 말고 부탁할 일이 없다고요? 정말 다른 부탁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최태우 의원이 눈만 껌벅거렸다.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사적 욕심이 아닌 병원 일인 데다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 편의를 봐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청탁이 아닌 부탁에 불과한데 이렇게 어려워하다니, 김지훈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해당 부처와 소관 의원들에게 말 한마디 해 달라는 소리 맞습니까? 제가 확실하게 이해한 거죠?”

“맞습니다.”

“압력을 가하는 일도 아니고, 청탁도 아닌데 왜 이렇게 쩔쩔맬 정도로 힘들어하는 겁니까? 별일 아니잖아요?”

“이곳이 의원님 지역구도 아니고, 소관 위원도 아니신데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의원님이 신경 써야 할 분들은 따로 있고, 어쩌면 더 급한 문제를 가진 사람의 시간을 뺏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사실 동생분을 수술한 대가처럼 들릴지 몰라 걱정도 됩니다.”

최태우 의원이 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내겐 한마디 말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나를 뽑아 준 사람들의 말에 정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걸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망을 갖고 보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정치에 몰두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이 원하는 진짜 정치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김지훈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오직 환자와 병원을 위한 부탁이었고, 자기 자신의 이득은 조금도 취하지 않았건만 여전히 미안한 표정이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챙겨야 할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절로 입이 열렸다.

“김 과장님,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최태우 의원이 돌연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순진한 겁니까, 아니면 정말 머리가 좋으신 겁니까? 어쨌든 한 방 크게 먹었습니다. 이런 의사 선생님의 부탁인데 신경 바짝 쓰지 않으면 다음번에는 떨어질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아홉 명입니다.”

“아홉 명! 기억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최태우 의원이 손을 내밀었다.

김지훈이 맞잡았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입에 맞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마신 커피 중 가장 맛있었습니다.”

왠지 뜨거운 기운이 느껴져 정말 신경 쓸 것이란 확신이 다가왔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전문의 면접 때 모찬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똑! 똑! 똑!

신현수와 민정호였다.

“얘기 잘됐습니까?”

“헉! 이제 막 자리를 끝냈는데 최태우 의원을 만났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신 교수는 또 뭐야?”

“우리가 병원 내부의 일을 모르면 안 되지.”

“그러니까 어떻게 알았냐고?”

“과장님,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대답부터 듣고 싶습니다.”

“잘됐어요. 이제 민 부원장님이 어떻게…….”

“신 교수님, 최태우 의원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 몇 없습니다. 한 고비 무사히 넘긴 것 같습니다. 가시죠. 과장님, 그럼 이만!”

“김 과장, 내일 면접 때 펠로우 될 만한 후배들이 몇이나 되는지 잘 보고 와.”

휘리릭!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뒤적뒤적 소파 밑까지 더듬었다.

어째 부처님 손바닥 안 손오공이 된 것 같았다.

그 시간.

진상건이 느긋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뿌린 돈과 펠로우 여섯 더 추가해서 들여야 하는 비용이 얼마나 되나? 전문 병원이 망해서 얻는 이득과 비교하는 게 우습군.’

서울 병원 중흥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 돈이라면 환장하는 이들이 가진 힘,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단순한 인원 재배정에 불과한 부탁.

삼박자가 맞아떨어졌다.

더구나 자신에게 기어오르다 못해 치욕을 안겨 준 신현수와 민정호도 용서할 수 없었다. 비록 가랑비에 젖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알게 모르게 온몸이 흠뻑 젖어 이를 알아챘을 때는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다.

‘아홉 명 전원을 서울 병원 티오로 요구할 걸 그랬나? 너무 구석으로 몰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니 이 정도면 충분해. 한 방! 결정적인 한 방이면 된다.’

“하하하!”

득의양양 대소를 터트렸다.

최태우 의원이 관련자에게 일일이 전화해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한 후 김지훈의 부탁을 확실하게 들어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김지훈도 한결 편한 밤을 보냈다.

면접장으로 가는 내내 모찬우, 한수영의 얼굴이 유난히 또렷하게 떠올랐다. 후배의 앞길을 열어 주지는 못해도 등불 정도는 켤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면접 시작하겠습니다.”

사 년 동안의 힘든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기 직전인 수많은 후배들과의 만남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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