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자리를 권한 김지훈이 곧바로 물었다.
“최태용 환자 때문에 왔습니까?”
“그렇습니다.”
“안 됩니다.”
민정호가 살짝 당황했다.
‘용건을 듣지도 않고 알아채다니 내 패가 너무 노출됐나? 주의해야겠어.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환자 가족이 유력한 정치인입니다. 형제간의 우애도 유난히 돈독하다고 들었습니다. 최근 진상건 이사장과 관련된 일은 물론 펠로우 선발까지 무난하게 진행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럴 때 친분을 쌓는다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원하는 날짜에 수술을 하면 최태우 국회의원이 펠로우 선발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양측에서 똑같이 압력을 가한다면 적어도 일방적으로 기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적 이득을 취하는 일이 아닌 이상 특혜랄 것도 없습니다. 아주 좋은 기회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솔깃하게 들릴 말이었다.
특히 의료진 확충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김지훈에겐 더욱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펠로우 선발 문제는 솔직히 특혜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다른 병원의 몫을 뺏어 오는 일도 아니기에 특혜가 될 수도 없었다.
민정호가 내심 긍정적인 답을 기대했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민 부원장님, 급하지 않은 환자가 없다는 사실 잘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간 이식을 위해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환자들에게는 특혜라고 보일 겁니다. 왜 내 가족에는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냐고 원망하면서요.”
“어떤 일이든 관련된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딱 한 주만 한 건을 더 하면 되는 일입니다. 과장님께 상당히 무리가 간다 해도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편해지는 길입니다.”
“간 이식 환자만 내 환자가 아닙니다. 다른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누군가는 예정보다 한 주를 더 기다려야 합니다.”
“크게 보셔야 합니다. 약간의 무리수는 용인해야 합니다. 고작 한 주입니다. 솔직히 다른 환자 수술을 완전히 뺏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 이상 대단한 특혜를 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김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특혜라는 단어는 같아도 의미가 달랐다.
민정호 앞에서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눈초리가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민 부원장님, 의료와 행정을 같은 기준으로 보지 마세요. 모두에게 하나뿐인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목소리마저 낮게 깔렸다.
“환자는 우리를 믿고 몸을 맡깁니다. 그중에는 모든 환자에게 공평하게 대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신뢰를 저버리는 것은 원칙을 깨는 일이고, 원칙을 깨는 병원은 어떤 미래도 꿈꿀 수 없습니다.”
“과장님!”
“민 부원장님께 실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근무하는 동안만이라도 의료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길 바랍니다.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세상을 넓게 봐야 합니다.”
“이런 시각이 넓게 보는 것이라면 난 기꺼이 좁게 살겠습니다. 지금은 얘기할 기분이 아닙니다. 할 말이 더 있으면 나중에 하죠. 이만 나가 주세요.”
김지훈이 입을 꾹 닫았다.
‘정말 행정만 아는 사람이었나? 누구보다 냉철하고, 옳고 그름이 확실한 사람 아니었나?’
정말 실망스러운지 호흡마저 거칠었다.
잠자코 김지훈을 응시하던 민정호가 들고 들어왔던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잠깐 허리를 숙인 사이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이게 뭡니까?”
“이준영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커피입니다. 원두가 아니니까 쉽게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갑자기 왜 이래요?”
“과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 병원에 몸담아야 할 이유를 다시 한번 확실하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과장님이 제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막상 승낙하셨으면 제가 먼저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심이었다.
말 그대로 의료와 행정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김지훈이 원칙을 지키길 기대했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일에 보다 확고한 기준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오히려 당황했다.
“이렇게 나오면 내가 더 미안하잖아요.”
“아닙니다. 공정식 선생님께 들은 대로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결정해 주십시오. 단, 반드시 건강하게 퇴원시켜야 합니다.”
“인맥을 만들 기회인가요?”
“정당한 방식으로 만든 인맥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부당한 일을 위해 인맥을 이용하지도 않고요.”
시나브로 김지훈의 화가 풀렸다.
농담이 절로 나왔다.
“그 인맥에 나도 끼워 주시겠죠?”
민정호가 힐끗 시선을 주긴 했지만 특유의 무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왠지 강한 신뢰를 전하는 것 같았고, 착각만은 아니었다.
커피가 든 가방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커피 잘 마시겠습니다. 내가 민 부원장님 말에 바로 동의했으면 안 줄 생각이었습니까?”
“한 통 더 드렸겠죠. 그럼 이만!”
문이 닫혔다.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우리 병원 행정부원장이야. 민 부원장님, 함께하는 내내 원칙으로 환자를 지키면서 병원을 발전시키면 좋겠네요.’
민정호도 웃고 있었다.
‘과장님은 이미 제 인맥입니다. 그것도 평생 유지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인맥이지요.’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퇴근을 서두르던 김지훈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정호가 어떻게 자신과 거의 동시에 환자는 물론 가족 관계까지 알았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병원 곳곳에 도청 장치라도 설치했나?’
자신도 모르게 뒤적뒤적 책상 밑을 더듬었다.
***
김지훈이 고민에 빠졌다.
최태우라는 사람이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을 잊으려 애썼고, 최태용 환자가 거론될 때마다 은연중 느껴지는 시선 때문이 아니었다.
‘이 환자에게 가장 적절한 수술 시점이 언제일까? 단독으로 발생해도 치명적일 수 있는 궤양성 대장염을 간 이식 후 좋아진다는 이유 때문에 부차적인 질환으로 봐도 되는 걸까? 의사로서 확신해도 되는 문제일까?’
미묘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사이, 최태용 환자의 간 이식을 위한 검사가 빠르게 진행됐다. 공여자 선정에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어차피 궤양성 대장염 치료 중이라 차질을 빚을 상황은 아니었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공여자까지 결정됐다.
환자 상태도 많이 좋아졌다.
형제간의 우애가 보통이 아닌지 최태우 의원의 몸이 달았다. 국정 운영에도 바쁠 텐데 시간 날 때마다 달려와 김지훈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배지의 힘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김지훈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도대체 언제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월, 수, 금은 수술하시는 날이라 저녁에나 수술실에서 나오세요. 화요일하고 목요일이 진료 날이니까 그때 오면 보실 수 있어요. 죄송하지만 오실 때도 가급적 점심시간에 맞춰 주시거나, 진료 끝난 후에 오시면 좋겠습니다.”
“점심시간이요?”
“과장님께 의원님이 몇 번이나 찾아오셨다고 말씀드렸는데, 진료 중에는 환자가 밀려서 어렵다고…….”
애꿎은 간호사만 어쩔 줄 몰라 발만 굴렀다.
최태우 의원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고지식한 사람이 또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간 들렀던 병원과는 전혀 다른 대우에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까지 들긴 했지만 원칙에 맞는 행동이라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소리 잘못 질렀다간 표만 떨어져 나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대학 병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의사 수가 적다고 해도 과장이라는 의사까지 격무에 시달릴 줄은 몰랐다.
때문에 믿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밤낮없이 일하네. 내 동생을 맡겨도 좋을 만큼 실력이 있다는 소리겠지만, 이러고도 몸이 버텨 나나? 하긴 수술이 몇 개월씩 밀려 있는 의사가 한가할 수는 없겠지.’
결국 얼굴을 보긴 했다.
간 이식 팀이 모두 모여 공여자와 수혜자 및 가족들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이해하는 자리였다. 모처럼 얻은 기회였지만 제법 늦은 시간에 단독이 아닌 가족 중 한 명으로 김지훈과 대화를 나눈 것이 다였다.
최태우 의원이 한 줄기 희망을 가졌다.
“이런 자리까지 가졌는데 수술 날짜가 결정된 거겠죠? 언제로 잡혔습니까?”
“아직 일정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보호자분들까지 모두 간 이식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날짜와 관계없이 갖는 자리입니다.”
“그럼 기약이 없다는 말입니까?”
“현재로서는 사 개월 후에 가능합니다. 보다 빠른 수술을 원하면 다른 병원을 택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의사가 모자라면 충원을 하든 뭘 하든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환자들을 가급적 빨리 수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절대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만, 현재 우리 병원 환경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일주일에 세 건 시행이 최대치입니다.”
최태우 의원이 혀를 찼다.
“저희도 답답합니다. 다른 환자와 상황이 다르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여러 사안을 고려해서 일정을 잡을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허어! 잘 부탁드립니다.”
사실 김지훈으로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의료진의 부족뿐만이 아니라 최태용 환자에게서 비롯된 갑갑함이었다. 그동안 내내 신경이 쓰였고, 지금도 궤양성 대장염이 다시 악화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불안했다.
대장염이 전신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자칫 사 개월 후에도 수술이 미뤄질 수 있었다.
‘예약에 맞춰 수술을 해도 되는 상황일까?’
최선의 선택인지 스스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보호자가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이 도리어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었다. 수술을 앞당길 경우 원칙을 깨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송재덕 교수와 함께 있었다.
“무슨 일로 왔니? 무슨 일로?”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날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만 고민이 많은 얼굴이다. 고민이 많아 보여. 뭐니? 뭐야?”
“최태용이란 환자가 있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바로 입을 열었다.
“수술 날짜 때문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는 얘기 들었다. 고민할 일이 아니야. 의사로서 판단하고, 결정한다면 설령 앞당겨 수술한다고 해도 비난받을 일이 없어.”
“다른 환자가 마음에 걸립니다. 선생님이 집도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사로서 결정한다고 말했다. 굳이 내 의견이 필요하다면 궤양성 대장염이 경화성 담관염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 그래. 이 교수 말도 맞고, 우리 과장 마음도 맞다. 열 명도 중요하지만 단 한 명의 목숨 역시 중요한 법이다. 국회의원은 법에 따라 국민을 위해 일하고, 우린 원칙을 따라 환자를 위해 일하면 되는 거다. 아암! 그렇고말고. 지훈아, 내 말이 맞지? 그치?”
김지훈이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스승의 말이 백 번 천 번 옳았다.
송재덕 교수는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애타게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을 볼 면목이 없어 원칙을 지나칠 정도로 좁게 해석했는지도 몰랐다. 단일 질환과 복합 질환의 차이도 간과했다.
시야를 넓혀야 했다.
‘내 판단과 결정을 믿자.’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내 의견이 정답은 아니다. 네 판단을 따라.”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알수록, 권한을 가질수록 더욱 쉽게 타협하기 마련인데 원칙을 지켜 줘 고맙다. 잠시 힘들지 모르지만, 결국 네게 가장 큰 힘이 될 거야.’
이준영 교수가 가슴을 활짝 폈다.
제자 하나는 잘 길렀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허허허! 허허허!”
송재덕 교수의 뜻 모를 웃음소리가 왠지 푸근했다.
김지훈이 수시로 환자를 찾았다.
세심하게 대장염 증세 유무와 전신 상태를 확인하며 적절한 수술 시기 판단에 집중했다. 주치의인 공정식과도 충분한 논의를 거쳤다.
“갑자기 악화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누가 알겠어. 과거력상 호전된 상태가 오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악화될 위험이 높긴 해. 하루 이틀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담관암 발생에도 신경을 써야 하잖아.”
담관암 발생은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 환자의 예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 암 발생 이후에는 간 이식을 해도 일 년 생존률이 10퍼센트 전후에 불과할 정도였다.
‘동반 질환부터 시간까지 모든 요인이 위험을 가중시키는 환자다. 응급은 아니지만 만성 간 부전에 빠진 환자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내심 결정을 내렸다.
진료실로 돌아온 김지훈이 수술 스케줄을 확인했다. 월, 수, 금 일정표를 빼곡히 채운 수술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여자 수술도 문제였지만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수혜자 수술을 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
무리를 감수하고 억지로 수술하다간 자정을 넘겨야 끝날 테고, 이는 의료진에게 상상하기 힘든 부담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환자에게 도움이 될 일은 티끌만치도 없다는 말이었다.
“후우! 어쩐다.”
난감하기만 하던 그때 외래 간호사가 커피 한 잔을 타 오며 뜻밖의 말을 했다.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채 온몸에 힘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