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45세 남자 환자, 최태용.
이 년 전부터 발생한 간헐적이지만 하루 열 차례 이상 계속되는 설사로 궤양성 대장염을 진단받고 내과 치료 중인 환자였다. 최근 혈변을 동반한 설사가 빈발해 체중 감소, 피로, 허약, 빈혈 등 각종 합병증에 시달렸다. 예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소양증으로 고생했고, 마지막 검사에서 황달까지 의심됐다.
기존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시행한 결과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이란 생소한 질병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의사조차 책에서나 봤을 희귀 질환에 걸렸다는 것은 충격도 아니었다.
진단이 맞을 경우 간 이식을 요할 수도 있다는 소리에 여러 병원을 찾았지만 한결같이 비관적인 말뿐이었다. 그때 간 이식 전문 병원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간 질환에도 전문적일 것이란 기대를 품고 한달음에 달려와 입원했다.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이라!’
김지훈이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질환을 끄집어냈다. 다른 파트를 맡은 써전이었다면 책부터 뒤졌겠지만 간 이식 대상 질환을 충분히 숙지한 덕에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자가 면역 이상이 원인으로 의심되는 질환이다. 한마디로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고, 환자 수가 대단히 적어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 질환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환자나 보호자가 받은 충격은 둘째 치고, 병명과 치료 방법 자체를 믿지 못할 상황이다. 무엇보다 정확한 진단이 필수다.’
“나종진 선생, 검사부터 보자.”
내시경을 이용해 역행성 담도 조영술을 시행했다. 십이지장에 위치한 총수담관 연결부에 조영제를 주입해 간 내 담도까지 순차적으로 촬영하는 검사다.
뷰 박스 앞에 선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다행히 총수담관은 살아 있었다.
반면 간 내 담도는 염증으로 인한 경화가 발생해 수축과 확장이 반복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로 인해 담즙 정체가 유발됐을 테고, 결국 만성적인 담관염을 앓았을 것이다.
염증 반복의 결과는 치명적이다.
B형 등의 감염성 간염처럼 말기에 이르면 간경화가 발생해 간 이식만이 유일한 치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경화성 담관염은 간 경화와 상관없이 간 이식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시간이 관건일 뿐 100퍼센트 간 경화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예후 결정의 중요한 요소였다.
만일 간 경화까지 동반됐다면 예후가 상당히 불량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담관 내에 암까지 발생할 확률이 높아져 적절한 치료 시기가 무척 중요했다.
“MRI 보자.”
김지훈이 세세히 살폈다.
담관염으로 인해 담도 조직 손상이 상당했다. 주변 간 조직에도 영향을 미쳐 이미 간 경화에 진입하고 있었지만 경증으로 판단돼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이경석이 먼저 환자를 본 이유를 알아야 했다.
“궤양성 대장염은 어때요?”
“직장과 S 결장에 국한된 상태야. 내원 당시 증상이 갑자기 심해져서 수술까지 고려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내과 치료에 잘 반응해 보존 치료만 해도 될 것 같아.”
“공정식 선생, 대장염 증상이 선행이야, 아니면 담관염 증상이 먼저야?”
선후 관계가 무척 중요했다.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 환자의 상당수에서 궤양성 대장염이 동반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5퍼센트에 불과했다. 확률을 떠나 담관염이 선행 요인이라면 예후나 치료 효과에 큰 차이가 있었다.
간 이식 후 난치에 가까운 궤양성 대장염이 호전되는 경향이 확실하게 증명된 상태였다. 즉, 담관염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말이었다.
“소양증이 훨씬 전에 발생한 것으로 보아 담관염이 먼저인 것 같은데, 정기적으로 받은 간 초음파에서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네. 애매모호해.”
“어느 쪽이든 치료는 간 이식이지만 예후에 영향을 주니까 정확하게 파악해야 돼. 지금 환자 상태는 어때?”
“조금 더 호전되면 수술은 가능해.”
“진단을 믿기도 힘들 테고, 대장염 증세를 보이는데 간 이식이 치료라는 사실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환자와 보호자가 납득하는 게 관건이네.”
어려운 문제였다.
증상이 있어도 간 이식은 여러 이유로 결정하기 힘든 수술이었다. 하물며 간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가려움이 가장 불편한 증상일 정도로 관련 증상이 없었다. 때문에 병원을 전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치료 원칙은 확고했다.
‘시기를 놓치면 상황이 더욱 나빠질 텐데 어떻게 설명하지? 근데 집안 문제까지 겹쳤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
“이경석 선생님, 집안 문제는 또 뭐예요?”
“그게… 환자 형이 국회의원이야. 당 내에서 상당한 입지를 가진 사람이래.”
“그래서요?”
“사람 위치에 따라 치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지, 뭐. 게다가 환자가 젊어서부터 형 뒷바라지를 했다네. 동생 덕에 유력한 정치인이 됐다고 생각할 텐데, 만일 환자가 잘못되면 영향이 만만치 않을 거야.”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의료 문제는 직업, 나이,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 반면 오진이나 사고가 의심된다면 권세를 가진 사람일수록 병원에 가해지는 압력이 커지기 마련이었다.
전문 병원은 이제 자리 잡아 가는 병원이었다.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까지 산적한 상황에서 시비가 발생한다면 진실을 떠나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국회의원이 갖는 특권이 백 가지가 넘을 정도로 힘을 가진 사람들인데, 기우일지 몰라도 펠로우 선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네.’
중견에 들어선 탓인지 의료 외적인 문제에 신경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원칙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효했고,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 가장 분란이 없는 길이었다.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았다.
김지훈이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진단이 틀리면 환자와 우리에게 최악이 될 수밖에 없어. 다른 병원의 소견은 참조하되 우리가 보고 있는 검사 결과만으로 판단해야 돼. 공정식 선생?”
“궤양성 대장염은 동반 질환에 불과하고, 일차 질환은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이 확실해.”
“이경석 선생님과 나종진 선생은?”
“동의해.”
“동의합니다.”
신중하게 검사 결과를 다시 한번 확인한 김지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타 병원을 포함한 모든 의료진의 의견이 일치했다.
통보만 남았다.
“국회의원 동생이라는 사실은 잊읍시다. 우리 판단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간 이식이 유일한 치료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답이에요. 어차피 마지막 결정은 환자와 보호자 몫이잖아요. 공정식 선생, 국회의원이라는 보호자까지 언제 만날 수 있어?”
“마침 오늘 와 있어. 최종 진단이 나온다고 했거든.”
미적거릴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곧바로 일어났다.
“만나자.”
일국의 대사 부인, 사단을 지휘하는 사단장 등등 유력 인사들을 환자나 보호자로서 만났던 김지훈이었다. 예의는 지켜야겠지만 여느 환자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절대 변할 수 없었다.
환자를 만났다.
국회의원이라는 형도 함께 있었다.
유력한 정치인이라는데 얼굴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긴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군지 간신히 아는 김지훈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다면 모를까, 일하고 잠자기 바쁜 이상 대통령 얼굴만 알면 충분했다.
“안녕하십니까? 일반외과 과장 김지훈입니다.”
“국회의원 최태우입니다.”
굳이 이름 앞에 신분을 붙였지만 거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한 동생을 보는 눈이 애틋하고, 슬프기만 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빨리 결정할수록 환자에게 유리하다.’
“관련 분야 선생들과 모여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환자분과 함께 진단과 치료에 대해 들으시겠습니까?”
“그래야겠죠.”
말로만 설명할 상황이 아니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로 자리를 옮겨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미 여러 병원에서 들었을 텐데 마지막 기대를 걸었었는지 최태우의 눈가가 붉어졌다.
환자는 한숨만 쉴 뿐이었다.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이 확실하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치료는 간 이식뿐이고, 간 이식을 하면 예후가 좋다는 말씀이죠?”
“맞습니다.”
“아우가 호소하는 증상은 대장염인데 다른 치료가 필요하지는 않습니까?”
“그간의 환자분 경과와 증상을 보다 자세히 알아야겠지만 담관염이 선행 요인으로 보입니다. 긴 이식 후 호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은 어느 선생님이 하십니까?”
“제가 합니다.”
“김지훈 과장님이라고 하셨죠? 아무런 문제 없이 무사히 끝낼 자신이 있습니까?”
이보다 난감한 말은 없었다.
반면 모든 환자와 보호자가 하는 말이었고,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기를 바라는 희망이었다. 바람을 잘 알지만 진단 어려움과 치료의 위험성은 별개의 문제였다.
“현재 우리 병원 전체적으로 한 주에 세 건씩 간 이식을 시행하고 있지만 어느 환자에게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수술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더 들으셔야 합니다.”
“지금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합니다만, 수술에 필요한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부분까지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점 감안해 주십시오. 먼저 생체 간 이식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족 중에서 공여자가 필요하다는 말부터 최태우와 최태용의 안색이 변했다. 수술 방법, 시간에 이어 회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까지 듣고 난 후에는 심한 불안감을 내비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간경화가 진행돼 간 이식만 기다리고 있던 환자도 막상 설명을 들으면 두려움을 가졌다. 듣도 보도 못한 병으로 간 이식을 해야 하는 환자에겐 날벼락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자칫 환자가 치료를 회피할 수도 있었다.
희망적인 말이 필요했다.
김지훈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다.
“사람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급성 거부반응은 누구도 완벽히 막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문제는 최선을 다해 방지할 겁니다. 다행히 그동안 우리 병원에서 시행한 간 이식 환자 모두 무사히 퇴원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최태우가 김지훈을 보았다.
사전에 이미 전문 병원에 대해 조사했다.
규모는 작지만 간 이식을 포함해 몇몇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의료진을 보유한 병원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아울러 이준영 교수와 과장인 김지훈이 핵심이라는 말도 들었다.
틀리지 않았다.
김지훈은 오히려 불신을 초래할 수 있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대의 신분을 의식해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처음 보았지만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에 신생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간 이식 수술을 시행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수술을 한다면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일단 궤양성 대장염으로 인한 증세가 사라지고, 염증 반응이 없다는 사실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일정은 그 후에 잡을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시일은 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빠르면 빠를수록 유리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김지훈이 다소 답답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현재 예약만 사 개월 정도 밀려 있는 데다 무엇보다 간 이식은 많은 의료진이 필요합니다. 현재 인력으로는 한 주에 세 건 정도가 적정한 상태입니다. 무턱대고 일정을 잡으면 환자분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예외도 없습니까?”
국회의원의 힘을 빌리려는 걸까?
의도가 무엇이든 솔직함만이 답이었다.
“응급으로 간 이식을 시행해야 하는 질환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환자를 치료했고요. 하지만 최태용 환자분은 응급 사유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급하지 않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의료에서 응급은 짧게는 한두 시간, 길어도 하루 이틀 내에 반드시 수술을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 경우는 아니지 않습니까?”
최태우가 입을 열지 못했다.
전문 병원에서도 같은 진단이 나온다면 치료받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수술 날짜도 못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굳이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회의원에게는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 하는 세상이었다. 서로 신세를 지면 자신에게 큰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김지훈 역시 이득은 바라지 않아도 상당한 부담을 느낄 텐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음으로 양으로 압력을 가한다고 통할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하나? 이만한 경험을 가진 병원이 또 있을까?’
갈등하는 순간 김지훈이 뜻밖의 말을 했다.
“단, 환자분은 다소 경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동안 궤양성 대장염이 악화되면 수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환자보다 적절한 시점이 중요합니다.”
“빨리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환자분 상태를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은 알지만 의료진의 판단에 맡겨 주십시오. 일단 궤양성 대장염 치료에 전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치료 방침은 정해졌지만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은 채 환자와의 면담이 끝났다. 이경석과 공정식이 내심 편의를 봐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김지훈은 아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경석 선생님, 지훈이가 꽤 고지식하죠?”
“원칙대로 하는 것이 맞긴 하지. 그래도 못 이기는 척하고 빨리 해 주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는데 아쉽다.”
결정은 집도의에게 달렸다.
말 그대로 아쉬울 뿐이었다.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퇴근을 서둘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왜 툭하면 퇴근 시간에 찾아오지?’
“누구세요?”
“민정호입니다.”
이 시간에 특별히 찾아올 일이 없었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