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35화 (1,135/1,329)

1화

김지훈이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관 공사가 시작됐다.

가림막 때문에 내부 전체를 볼 수 없었지만, 임시로 낸 통로를 드나드는 차량과 사람들을 보며 본격적인 병원 확장을 실감했다.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를 수없이 보았다. 그때마다 느낀 것은 산업재해에 대한 시각, 대처하는 방식이 여전히 후진적이라는 점이었다. 때문에 철저한 안전 조치를 요구했고, 민정호는 이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소음이 문제였다.

최대한 조치를 취해도 중장비에서 발생하는 소리까지 막아 낼 재간이 없었다. 일정 부분 발생하는 피해와 불편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직접적인 피해만이 아니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활성화되는 바람에 신관을 짓는 시기 자체가 늦은 꼴이 돼 버렸다.

‘8개월 정도 걸린다고 했지? 펠로우와 간호사 인원 충원이 끝나고 난 후니까, 그때까지 인력 배치는 물론 공간 활용을 잘해야겠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도진과 강병옥의 독자 집도로 간 이식 수술이 늘어났다. 췌장과 담도 부분 역시 서도훈에게 완전히 분리하다시피 맡긴 후 예약을 최소화해 한 주에 시행해야 하는 수술이 오히려 증가했다.

그뿐인가?

다른 파트는 물론 내과 환자도 크게 늘어 인력과 공간 모두 그나마 남아 있던 여유마저 잃어 가기 시작했다. 질적 팽창이 양적 팽창을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다. 바쁠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사실 김지훈만큼 정신없는 사람도 없었다.

치열하지 않은 하루가 없었다.

수술과 진료, 국제 학회에 제출할 논문 보강에 병원 및 과 자체 문제 해결까지 신경 쓰다 보면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항상 분담하려 애쓰지만 힘든 일과를 마치고 육아와 가사에 매달려야 하는 고경아, 초등학교를 배정받고 벌써부터 들떠 있는 희연이, 여유 시간이 있다는 죄로 언니와 형부의 일까지 떠안은 처제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아직도 아이 소식이 없는 탓인지 손일석에게도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다른 수술은 정규 일과 내에 끝낼 수 있지만, 평균 열 시간 가까이 걸리는 간 이식이 최대 관건이야. 주당 세 건으로도 이 정도 부담을 느끼는데 다섯 건이면 머리가 터지겠네. 펠로우 충원으로 해결될까?’

수준급에 도달해야 하는 혈관 수술까지 적어도 펠로우 삼 년 동안 제대로 배우고 경험해야 집도를 맡길 수 있었다. 환자나 수술의 경중도 없어 결국 다섯 명의 교수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서도진과 강병옥을 포함해도 네 명이었다.

‘교수가 더 필요해. 하지만 서울 병원은 더 이상 여력이 없고, 간 질환 파트를 맡고 있는 다른 병원 교수들이 기존 자리에서 옮기려고 할까?’

성급한 고민이 아니었다.

불과 육 개월도 되지 않아 주당 한 건의 간 이식이 세 건으로 늘어났고, 전문 병원이 보다 널리 알려지면서 예약까지 증가하고 있었다. 다섯 건을 시행해야 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말이었다.

‘방법이! 방법이!’

생각할수록 난감한 일이었다.

한동안 공사 현장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머리를 흔들었다. 당장은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 가장 빨리 끝내야 하는 일부터 집중하는 것이 순서였다.

논문이었다.

이틀마다 시행되는 간 이식에 논문의 기초가 되는 수술 건수가 날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 탓에 각종 지표의 통계 보정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비효율적이었다.

국제 학회 게재라는 부담과 케이스가 많을수록 유리하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했다. 뒤적뒤적 여러 논문을 확인한 후 최종 칠십 건으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달 내에 최종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외과 특성상 수술의 양과 논문의 질이 비례한다지만 충분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좋았어. 어차피 다른 병원도 꾸준히 간 이식을 시행할 텐데 이렇게 끌다 보면 몇 년이 지나도 끝내지 못한다.’

기준을 정한 덕인지 한결 머리가 가벼워졌다. 빠르게 중요 부분을 다시 확인한 김지훈이 퇴근을 서둘렀다. 회의가 없는 날에는 여덟 시 전에 일과를 정리하는 것이 가족에 대한 예의였다.

막 옷을 갈아입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모찬우입니다.”

“들어와. 무슨 일이야?”

“다음 주에 시험이 있어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결과 나올 때까지 병원을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시험에만 집중해. 선생님들께는 인사드렸어?”

“예. 그동안 제대로 일도 못했는데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다른 사람이 지니지 못한 의지와 열정을 갖고 최선을 다한 써전이었다. 근무 시간이 적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 년 차와 일 년 차의 공력 차이는 부족한 시간을 메우고도 남았다.

왠지 듬직하고 멋있었다.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내년에 펠로우 뽑는다는 소식은 들었지? 한수영 선생하고 같이 와. 너희 둘과 함께 일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바쁠 텐데 빨리 가.”

“예. 발표 나오는 대로 복귀하겠습니다.”

“복귀? 일석이 말대로 너 미쳤구나? 인턴까지 오 년이나 고생했는데 뭘 와? 펠로우 되면 오프 가라고 해도 갈 수 없으니까, 실컷 놀다가 뽑을 때나 와. 아! 선발이 확정된 건 아니다. 더 잘난 써전 있으면 미역국 먹는 거야. 나도 퇴근해야 돼. 빨리 가.”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모찬우가 불끈 두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겉보기인지 몰라도 결코 다정다감하다고 할 수 없는 김지훈의 말속에 담긴 기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일에 미친 놈이네. 하긴 나도 한때 그런 소리를 듣긴 했었지. 그래서 더 듬직해 보이나?’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응급실 슬쩍 둘러본 후 현관을 나섰다.

오늘은 붙잡히지 않았다며 좋다고 웃던 김지훈이 움찔거렸다. 퇴근길이 분명해 보이는 신현수와 민정호가 천천히 걸으며 진지한 눈으로 뭔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십중팔구 신관 공사 때문이라 여긴 김지훈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잡히면 한 시간이다. 튀자.’

기척이 없어도 아는 사람이 뒤에서 서성거리면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인간이 있는 법이었다.

민정호가 고개를 돌렸다.

딱 걸렸다.

“과장님, 퇴근하십니까?”

“예? 예. 그럼 말씀 나누세요.”

최대한 태연하게 지나치려는 순간 신현수의 한마디에 발을 멈춰야 했다. 다리를 아무리 내밀려 해도 너무 솔깃해 어쩔 수 없었다.

“펠로우 여덟 명을 신청했다고?”

“마감 시한이 갑자기 당겨져서 간신히 시간 맞췄어. 하마터면 신청도 못할 뻔했다. 어쨌든 우리 과 다섯, 내과 둘, 방사선과 한 명이니까 최종적으로 확정만 되면 당분간 걱정 없을 거야.”

“잘됐네. 그런데 민 부원장님도 그렇고 얼굴이 왜 그래? 또 무슨 일 있어?”

신현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우연히 들은 말인데 진상건이 방해를 하는 것 같아. 우리 병원에 가해지는 재정 부담이 과한 데다 펠로우를 뽑아야 하는 본원까지 선발 인원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탄원 아닌 탄원을 하는 모양이야. 신청 일자가 갑자기 변경된 것도 수상쩍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지만 끝까지 더럽게 구네. 독립채산제는 장식인가? 재정은 개뿔, 한 푼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무슨 상관이야?”

“다른 사람 눈에는 똑같은 병원이지, 별개의 병원으로 보이겠어? 사실 나는 같은 재단이라고 주장하는 게 오히려 고마워.”

“뭐가 고마워?”

“원래대로 돌려놔야지. 최소한 진상건 같은 인간이 병원과 재단을 좌지우지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 이 상태로 가면 승자는 없어.”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신현수 역시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힘든데 재단 산하 모든 병원의 미래까지 고민하며 걱정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업을 지키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인지, 오로지 병원과 의료에 대한 애정과 신념인지 확언할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과정과 결과의 차이는 없었다.

신현수는 분명 모두가 원하는 병원을 만들 것이다. 하기에 개인적 친분이 아닌 의사 대 의사로서 협력하고, 병원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동기가 무엇이든 난 현수 너를 전적으로 믿어. 몸과 마음이 다 힘들 텐데 한 번도 신경 쓰지 못했네. 미안하다. 대신 열심히 할게.’

김지훈이 신현수를 툭 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 민 부원장님도 있잖아.”

민정호가 곧바로 반응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더구나 펠로우 선발 건은 관련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제게도 상당히 벅찬 일입니다.”

“불법이거나 나쁜 일도 아니고, 호성이 사건 때 보니까 발이 상당히 넓던데 항상 강조하는 인맥을 이용하면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그 정도 인맥을 가졌으면 일개 병원 행정부원장을 맡지 않았겠죠. 있다 해도 인맥은 만능이 아닙니다.”

그걸 누가 모를까?

기대를 섞어 살짝 떠본 말에 너무 진지했다. 하긴 매사 맺고 끊음이 확실한 것이 민정호의 성격이었고, 매력인지도 몰랐다.

“결국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말이네요. 신관 공사까지 시작된 이상 어떻게든 관철시켜야 합니다. 이미 뽑고 싶은 사람도 있고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뾰족한 대안이 있을 리 없었다.

진상건의 방해가 수포로 돌아가기만을 바라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정부 부처, 그것도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의 공동 소관이기에 정치인과 연줄이 있다면 모를까, 신현수와 민정호라고 해서 딱히 해결 방안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지켜보자. 진상건이라고 해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는 없잖아.”

신현수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선발 인원이 준다면 가장 많이 신청한 외과에서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병원 확장을 동반한 발전 계획에 상당한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 당장 눈에 보이는 일도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사실 개별 병원에서 자기 돈 내고 펠로우를 많이 뽑으면 말만 번지르르한 정부도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인데, 그런 일이 생기겠어? 피곤할 텐데 빨리 가서 잠이나 푹 자자.”

김지훈이 애써 큰소리를 쳤다.

막연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김 과장, 아직 퇴근 못했네. 잘됐다.”

이경석, 나종진, 공정식이었다.

다들 피곤에 절어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수술 하나에 막대한 시간을 빼앗기는 김지훈이나, 짧은 시간이지만 대신 건수가 많은 이경석이나 다른 처지가 아니었다. 수술 전후 준비와 치료까지 담당해야 하는 나종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근데 정식이는 왜 이 시간에 퇴근하지?’

의문도 잠시, 마침 잘됐다며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눈치에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은 상황이었다.

‘일과 끝난 지가 언젠데.’

“선생님은 또 왜요?”

“지금 상의할 일은 아니고, 내일 진료 끝나고 시간 좀 내. 환자 한 명이 있는데 꽤 골치 아파.”

다행이었지만 환자라는 소리에 지나칠 김지훈이 아니었다. 이경석도 김지훈이 방앗간을 본 참새라는 점을 노렸는지도 몰랐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병명도 그렇고, 집안까지 여러 문제가 얽혔어. 머리 맞대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일이니까 시간 꼭 내.”

궁금함만 남기고 휙 사라졌다.

공정식과 나종진이 재빨리 따라붙으며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김지훈의 목이 쑥 빠졌다.

‘뭘까? 도대체 뭘까? 사람 답답하게 만들어 놓고 그냥 가? 에휴! 병명이라도 알려 주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민정호와 신현수도 다른 일이 또 있는지 시계를 보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오늘도 꽤 늦게 퇴근했다.

잠들 때까지 진상건의 얼굴과 이경석의 말이 어지럽게 오갔다. 그래도 천생 의사라고, 진상건이 관심 밖으로 멀리 사라졌다.

‘경석이 형 환자면 라파로 아니면 대장 질환일 텐데 뭘까? 정식이는 우연히 마주친 건가?’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지만 피곤 앞에 장사 없었다.

물론 할 일은 했다.

오늘도 간호과 교수의 꿈을 불태우고 있는 고경아가 널브러진 남편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써전의 솜씨로 깎은 과일.

달달한 과자와 주스.

옆구리를 삐져나오는 뱃살의 원흉이었지만 소소한 행복이었다. 자신은 질색팔색이건만, 마른 사람 싫다며 오히려 좋아하는 남편이 왠지 얄미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웃음이 한 번 더 나왔다.

다음 날.

진료를 마친 김지훈이 서둘러 이경석을 찾았다. 차트와 각종 검사 결과를 앞에 놓고 공정식, 나종진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환자예요?”

“차트부터 봐.”

진단명을 본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궤양성 대장염 환자를 왜?’

이경석이 다음 페이지를 보라는 듯 턱을 까딱거렸다.

김지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