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김지훈, 신현수, 손일석, 이경석.
중견 의사의 길에 들어선 이후 저마다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써전들의 눈이 번쩍였다. 냉철한 눈빛과 표정이 상당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후배 사인방이 나란히 앉았다.
김지훈이 말문을 열었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해 결정했으니까 따라 주기 바란다. 이준영 선생님과 송재덕 선생님의 판단도 충분히 반영한 이상 공정한 결과라고 확신해. 췌장 파트 서도훈 선생!”
서도훈이 바짝 긴장했다.
이경석이 평가 자료를 다시 한번 검토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결과를 통보했다.
“서도훈 선생, 축하한다.”
결과를 받아 든 서도훈이 애써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슬그머니 찢어지는 입가를 감추지는 못했다. 그동안 가장 큰 재량권을 갖고 환자를 보았기에 당연한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미소가 싹 사라졌다.
“완전 분리는 아니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처럼 과장님과 함께 췌장 파트를 운영한다는 말입니까?”
“형식은 같지만 내용이 달라. 김 과장이 누가 먼저 휘플을 라파로로 할지를 두고 서도훈 선생과 경쟁하고 싶다네.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지만 우리로서는 누가 먼저 할지 무척 기대가 되는데, 잘할 수 있겠지?”
서도훈이 눈가를 굳혔다.
선배와 후배가 아닌 써전 대 써전으로서 김지훈을 보았다. 현재로서는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수술이었지만 전문 병원에 올 때부터 세운 최종 목표였다. 몇 발 앞서 있는 김지훈과 경쟁한다면 강력한 자극이 아닐 수 없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도훈 선생, 나도 최선을 다할 거야. 한 발 앞선 사람이 술 사는 거다.”
“앞선 사람이요?”
“서도훈 선생이 살 것 같아서.”
나직한 웃음이 터졌지만 이내 신현수에게 눈길이 쏠렸다. 이준영 교수까지 관여하는 이상 공여자 수술은 더욱 엄격하게 평가됐을 수밖에 없었다.
“안호석 선생, 그동안 열심히 해 줘 고맙다. 공여자 수술은 물론 간암 수술까지 맡아도 좋아. 당분간 이준영 선생님과 내가 적절하게 분배하겠지만 곧 독자적으로 환자를 보고, 수술하게 될 거야.”
“감사합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병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
“흐음! 이제 내 차례인가? 출발이 좋네. 남은 사람은 서도진 선생과 강병옥 선생인데, 수혜자 수술이 너무 고난도라 고민 많이 했다. 혈관 수술 수준도 관건이었고 말이야.”
서도진과 강병옥이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췌장이나 공여자 수술도 어렵지만 수혜자 수술은 요구되는 사항이 너무 많아 내심 불안하던 참이었다. 게다가 일상 속 행동이나 말과 달리 수술 중에는 저승사자로 변하는 손일석이었다.
“강병옥 선생, 어떤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지?”
“예.”
“서도진 선생과 결과가 똑같아서 둘이 한 번에 떨어지거나 한 번에 붙거나, 둘 중의 하나야. 인생 참 얄궂네. 점심은 먹었나?”
“아직 못 먹었습니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밥은 먹고 다녀. 오늘 안 되면 내년에 하면 되는 일인데 뭘 그렇게 긴장해?”
연말 가요 대상 발표도 아닌데 손일석이 뜸만 들였다. 김지훈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해 후배 두 명의 똥줄이 다 탈 지경이었다.
“김 과장, 내가 알려 줄까?”
“그만하고 빨리 말해 줘.”
“원래 중요한 일은 긴장 높여 놓고 발표하는 거 몰라? 서도진, 강병옥, 들을 준비 됐지?”
“예, 말씀하십시오.”
“격주로 수술해. 해당 수술 공여자 수술은 안호석 선생이 맡고, 내과와의 준비 팀은 차후 결정해서 알려 줄 거야. 혈관 수술은 계속 들어와야 한다는 사실 잊지 마.”
“감사합니다.”
서도진과 강병옥이 뛸 듯이 기뻐했다.
결코 적은 건수가 아니었다.
이 주에 한 번씩 일 년을 수술한다면 삼십 건에 육박할 수도 있었다. 당당한 간 이식 수술 팀의 주역이 되고도 남았다.
분위기 확 달아올랐다.
각자 몸담았던 병원에 남아 있었으면 독자 파트를 갖네 마네 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 텐데 다들 까맣게 잊었다. 전문의가 돼 더욱 특별한 분야에 매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만족감이자 기쁨이었다.
김지훈이 마무리를 지었다.
“간 이식을 주당 세 건씩 하게 되면 현재 인원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 신입 펠로우 선발이 거의 다 결정된 상태지만 당분간 서로 도와야 돼.”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현재 수준을 유지할 생각이 없어.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현 펠로우들 잘 끌어서 바로 간 이식을 맡아 할 수 있는 교수로 만들어야 해. 이혁원은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나종진은 말할 것도 없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설립 전 기대했던 전문 병원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온갖 방해와 악조건 속에서도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향해 달려갈 때였다. 누군가 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말이다.
뿌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런 날 술 빠지면 섭섭하지만 유일한 휴식 시간인 주말인 데다 집도 제각각이라 축하의 밥과 술은 다음에 하기로 했다. 게다가 김지훈과 신현수는 약속이 하나 더 있었다.
민정호와의 자리였다.
연거푸 약속이 잡혀 소중한 토요일 오후를 모조리 반납한 김지훈이 뭐가 그리 좋은지 웃었다. 행정적인 일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민 부원장이 우리 병원 진짜 행정부원장이 된 후로 처음 갖는 자리네. 행정적인 문제는 가급적 멀리하고 싶지만 이번만 참는다.”
“말처럼 될까?”
“간 이식 파트를 늘렸지만 수술 부담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국제 학회에 제출할 논문도 완성하지 못했어. 좀 봐줘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과장이란 자리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
“그놈의 과장 소리는 그만하면 안 돼? 오늘은 무슨 일로 만나는 거야?”
신현수가 씨익 웃기만 했다.
뭔지 몰라도 좋은 일인 모양이었다.
민정호를 만났다.
은은한 블랙커피 향에 문득 이준영 교수가 생각난 김지훈이 힐끗 눈길을 주었다. 민정호가 서류를 뒤적거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준영 선생님도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브랜드 알려 드릴 테니 구입하시면 됩니다.”
‘야! 스승님 입맛이 변한 이유가 이거였어? 커피 하나로 민 부원장한테 밀린 건가? 은근히 서운하네.’
“보니까 많은데 조금만 나눠 주면 안 돼요?”
“비싸기도 하지만 원두 내리기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냥 알 커피 사서 블랙으로 대접하시는 게 훨씬 맛있을 겁니다.”
김지훈이 쩝쩝 입맛만 다셨다.
원두 내린다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도 몰라 반박할 수 없었다. 어쨌든 커피 가루 묻은 기구가 여러 개인 것으로 보아 만만치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일이나 합시다. 왜 만나자고 했어요?”
“서류부터 보시죠.”
“1차 확장 계획서?”
계약 당시 본 계획은 개략적이었던 반면 지금 내민 계획서는 무척 구체적이었다. 김지훈은 제법 오랜 시간을 투자해 검토했고, 민정호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놈의 블랙커피 홀짝거리며.
김지훈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렇게만 진행되면 상당 기간 공간 부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근데 왜 이런 내용이 눈에 쏙쏙 들어오지? 민 부원장이 알기 쉽게 작성한 거야? 아니면 내 눈이 변한 거야?’
“어떻습니까?”
“맞바꾼 땅을 활용해 5층 규모로 신관을 짓는다는 말이죠? 교수실, 연구실부터 간호과 공간까지 진료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시설을 모조리 옮긴다면 앞으로 수술이 늘어도 충분한 여유를 가질 수 있겠네요.”
“구내식당 같은 부대시설은 지하에 배치시켰으면 합니다. 중간 통로 설계를 잘한다면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이용하는 일도 큰 불편이 없을 겁니다.”
민정호가 조목조목 설명했다.
“소음 문제는 어떻게 하죠?”
“그게 가장 큰 문제인데, 안전 조치까지 소홀한 구석이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공사 기간은요?”
“기반 시설이 갖춰진 부지라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새로운 펠로우 선생님들 선발 시기에 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때까지 공간 활용을 잘해야겠네요.”
궁금했던 부분이 해소된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민정호를 보았다.
“언제 착공할 계획입니까?”
“승인이 나는 즉시 시행해야 합니다.”
“승인이요? 이사라곤 달랑 한 명인데 신 교수가 결정하면 되는 일이잖아요?”
“운영이사 아니신가요?”
“내가요?”
신현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정식 회의를 열어 전문 병원 이사 정원인 한 명 참석에 한 명 동의했어. 앞으로 과장 겸 전문 병원 운영이사니까 잘 부탁해.”
“농담이지?”
신현수가 서류를 흔들었다.
“이사도 아닌 사람한테 이걸 왜 보여 주겠어? 원래 금전적으로 지분을 가져야 하지만 무형의 자산도 엄연한 자산이라 이사로 추대한 거니까 따지지 마. 축하한다.”
“축하드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우격다짐이었다.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신현수는 김지훈과 함께 가기를 강력하게 원했고, 완강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주요 안건이 있을 때마다 참석하셔야 합니다. 오늘처럼 쓸데없는 고집으로 제 귀중한 시간을 빼앗지 말아 주십시오. 더구나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민정호도 한통속이 분명했다.
어안이 벙벙하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면 전문 병원의 최종 목표가 종합 병원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슬쩍 잡아챘다.
“사람 참 곤란하게 하네. 신 교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볼게.”
“모든 인사권이 내게 있다는 사실 잊었어? 진상건을 상대로 김 과장이 관철시킨 일이야. 그중에는 자리를 만들고, 없애는 일도 포함돼. 이미 결정한 일이니까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
쓸데없이 단호했다.
김지훈이 눈가만 문질렀다.
역시 거짓말은 대가를 치르는 모양이었다.
병원을 위해 한 일이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제 발등을 스스로 찍은 꼴이었다.
결국 꼼짝 없이 붙잡혀 확장 계획을 검토 수정하고, 승인까지 해야 했다. 부속 건물 건축이라 해도 만만한 일이 아니건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처럼 빠른 결정이었지만 민정호의 치밀함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재정 부담이 제일 문제네요.”
“간 이식을 주당 다섯 건까지 시행하면 다른 수술도 그만큼 늘어날 테니 부담을 한결 덜 수 있습니다. 필요한 부분은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주당 다섯 건?’
수술 파트를 늘린 이상 혼자 짊어져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절대 태평하게 대응할 사안이 아니었다. 더구나 간 이식은 전체 준비 팀을 유지해야 할 정도로 유기적인 협조가 요구돼 파트장의 역할이 무척 중요한 분야였다.
“1차 확장에 국한된 계획입니다. 2차 확장 내지는 종합 병원 승격이 가시화되면 다섯 건으로는 태부족입니다.”
민정호가 아예 바윗돌을 던졌다.
“수술을 늘려야 한다는 점은 내 생각과 일치하지만 속도가 문제죠. 너무 빠르게 늘리면 감당할 수가 없어요.”
“김 과장, 제반 문제는 민 부원장에게 맡기면 돼. 사실 최고의 써전,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면 어려울 것도 없잖아. 우리 공여자 팀도 분발할게.”
신현수는 아주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냥 날 죽여라, 죽여.’
머릿속이 복잡해 민정호 입에서 2차 확장이란 말이 나왔다는 사실을 지나쳤다. 교환한 땅은 신관을 짓는 것으로 끝날 텐데 어디서 땅을 더 확보한다는 소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 박박 인상을 쓰며 두 명의 웬수를 노려보던 김지훈이 돌연 눈가에 힘을 줬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억지로 하다간 자신만이 아니라 병원 직원 전체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었다.
“좋아. 신 교수, 운영이사 하는데 다시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인사권 휘두르지 마.”
“원칙은 지킬게.”
“민 부원장님도 주의해 주세요. 신 교수와 둘이 짬짜미 먹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전 계약에만 충실합니다.”
어째 두루뭉술한 것이 상당히 티미한 답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반드시 맡아야 할 일이었고, 하필이면 때와 상황이 맞아떨어져 김지훈에게 주어졌을 뿐이었다.
깔끔하게 한 번 외치고 털어 내야 했다.
‘카르페 디엠!’
여러 생각을 하며 퇴근했다.
고경아가 남편 속도 모르고 호들갑을 떨었다.
“김 이사님, 축하드려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에요.”
“이러다 원장님까지 쭉쭉 달리는 거 아니에요?”
아내의 눈과 바람은 달랐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고경아가 간호과 교수로서 끝나기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사실 다른 사람 눈에는 시샘과 질투의 대상일 것이다.
‘에휴! 간 이식과 췌장 라파로로 대가 소리 한번 들어 보려고 전문 병원을 주장했는데 어디까지 가려고 이러나. 하긴 축하받을 일이기도 하네. 일석이는 말도 안 된다고 방방 뛰면서도 좋아하겠지? 그래.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면 됐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이젠 진짜 전문 병원 운영이사다.
기업이나 군대로 따지면 별을 달았다.
월급은 수당 명목으로 쥐꼬리만큼 올라가는 반면 책임과 부담만 늘어나는 자리였지만 좋은 일임은 분명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열심히 하면 적어도 손가락질은 안 받을 것이다.
집에서도 한 번 더 외쳤다.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