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33화 (1,133/1,329)

19화

진상건의 눈살이 거칠게 떨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갔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절반을 넘었다. 철저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전문 병원의 인사권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에 분을 참지 못했다.

‘자격도 안 되는 것들을 원장, 부원장을 시켜 줬더니 감히 내 뒤통수를 쳐? 후회하게 해 주지.’

무엇보다 자신의 권위가 크게 훼손된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신현수를 비롯해 전문 병원 의료진을 철저히 짓밟고 말겠다는 분노만 남았다.

김지훈은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한 결과였다.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 이사와 원장을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보니 회의 내내 발언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이사님, 감사합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이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원장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송 원장님 야야야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원장 자리에 연연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고요. 전문 병원이 하루빨리 종합 병원으로 발전하길 바랍니다.”

송재덕 교수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문득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원장단과 이사들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도박을 했는지도 몰랐다.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실패했으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려 아홉 명이 지지를 보냈다.

그들 개개인의 양심과 의지가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번 투표로 진상건에게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니 말이다.

김지훈이 벅찬 가슴을 가누지 못했다.

희망이란 말이 너무도 소중했다.

참군인과 정치에 물든 군인.

본연의 역할과 책임을 잊지 않은 의사와 부귀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명예만을 추구하는 의사.

병원을 위해 일하는 이사와 진상건을 위해 일하는 딸랑이 같은 이사.

세상을 보는 눈이 또 한 번 달라지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도 탐욕과 욕망에 눈이 먼 극소수 사람의 분탕질일 뿐이었다.

아직도 살 만한 세상이 분명했다.

‘싫든 좋든 지금까지 병원 발전에 공헌을 한 분들이 분명한데 너무 성급했어. 과감함과 성급함을 잘 구분해야겠어.’

마음이 약간 진정됐다.

때문인지 중환자실 환자가 생각났다.

전화기를 꺼내 든 김지훈이 문자부터 확인했다.

「과장님, 환자 의식 회복됐습니다. 인투베이션 제거했고, 현재 바이탈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바라 마지않던 소식이었다.

“혁원아, 환자 깨어났다고?”

(예. 너무 갑자기 좋아져서 저도 당황했습니다. 환자 상태 관찰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의 결과는 나왔습니까?)

“나왔지.”

(목소리가 좋으신데 잘됐습니까?)

“그럼. 형이 참석했는데 안 될 리가 있어? 교육부 허가가 필요하지만 형식에 불과하니까, 찬우하고 한수영 선생한테도 전해 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혁원의 목소리도 붕붕 떴다.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좋은 일에 좋은 일이 쌍으로 겹쳤네. 좋다. 좋아. 이래서 내가 병원을 못 떠나요. 병원을. 다들 고생했다. 고생했어.”

이런 날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현수가 앞장섰다.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병원에 다 쏟아붓는 것 같은데 돈은 있니?”

“저 맞벌이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위기 좋은 소고기집이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술 몇 잔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등심 한 점에 한 잔씩 잘도 넘어갔다. 소주 즐기지 않는 신현수마저 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김지훈이 대범하게 물었다.

“원장님, 야야야 소리 터질 때 내 심장도 같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다들 나이 드신 분들인데 역효과는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허허허! 인생 뭐 있니? 아니다. 있다. 있어. 지훈아, 현수야, 오늘은 조용히 지켜보는 원장과 이사들을 보며 도박을 걸어 성공했지만 절대 날 따라 하면 안 된다. 십중팔구 망한다. 망해. 준영아, 너는 왜 안 말렸니? 왜? 날 믿은 거야? 그런 거야?”

“잘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유가 뭐야? 이왕 이렇게 된 거 판 깨려고 한 거야? 속만 시원하면 다가 아니잖니. 안 그래? 내 말이 틀렸어?”

“제가 먼저 나섰으면 바로 판 깨졌을 겁니다. 김진호 선생에게 부원장 자리 주기로 한 결정 잘한 것 같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송재덕 교수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먼저 폭발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협상에 익숙한 사람도 아니고, 평소 행정 문제에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김지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스승님이 먼저? 생각만 해도 살벌하네.’

왠지 분위기 가라앉았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공손히 술을 따랐다.

“선생님, 기분 좋은 날입니다.”

“마시자.”

“아직 정부 부처와의 협의가 남았다. 오늘은 긴장 풀되 내일은 고삐를 단단히 잡아야 한다. 진상건이 이대로 물러날 인간이 아니잖아. 그치? 내 말이 맞지?”

“원장님만 믿겠습니다.”

“야야! 힘든 일은 왜 다 내 차지야? 나도 쉬고 싶어. 그때도 같이 가자. 같이.”

흠칫 놀랐던 김지훈과 신현수가 크게 웃었다.

“왜 웃어? 왜?”

“아닙니다.”

전혀 다른 의미인지 빤히 알면서도 야야 소리에 겁먹었다는 소리를 차마 할 수 없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이 그렇게 현실적일 수 없었다.

김지훈이 밤늦게 집에 도착했다.

“경아 씨, 해결됐어요. 송재덕 선생님 야야야 소리를 같이 들었어야 했는데 아깝네. 면접은 잘 끝났죠?”

“취했어요. 오늘은 빨리 자고 내일 얘기해요. 지훈 씨, 희연이 뺨에 얼굴 좀 문지르지 말아요. 수염 때문에 빨갛게 변하는 거 알면서 술만 먹으면 왜 그래요?”

“내 딸 너무 예뻐서 그러는데…….”

드르렁! 드르렁!

김지훈이 희연이를 안은 채 쭉 뻗었다.

혀를 차던 고경아가 담요를 덮어 주었다.

***

모든 일이 술술 풀려 나갔다.

의식을 회복한 젊은 병사도 빠르게 호전돼 통합 병원으로 이송됐다. 정중하게 인사한 후 병사의 부모와 함께 병원을 나서는 사단장의 뒷모습에서 이유 모를 신뢰가 느껴졌다.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구나. 저런 분만 있으면 마음 놓고 군대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김지훈이 마음의 짐을 덜었다.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날개를 달아 준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행정적인 일이 주는 압박감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는 순간 써전의 본능이 강렬한 불길로 터져 나왔다.

“서도진 선생, 강병옥 선생, 서도훈 선생, 얼마 안 남았다. 결과는 내 몫이 아니야. 안호석 선생, 공여자 수술도 마찬가지야.”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무섭게 밀어붙였다.

간 이식과 복강경을 이용한 휘플은 모든 수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었다. 메이저 수술이 요구하는 실력은 물론 응용과 융통성까지 필요했다.

손일석의 눈빛도 변했다.

“혈관 처리는 모든 수술의 기본이자 꽃이야.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아. 내가 알려 주는 모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수술 팀을 가질 수 없어.”

신현수와 이경석도 질세라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전하고자 애썼다. 간암 수술과 일반 복강경 수술이 기초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후배 사인방은 결코 선배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수술과 환자에게 몰두했다. 펠로우들에게는 강력한 자극이었고,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김지훈은 여전히 자신에게 엄격해지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논문 수정을 거듭하며 최신 경향을 파악하는 한편 주어진 일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간호사 선발 최종 면접 위원으로 선정됐다.

‘추리고 추린 사람들이다. 이 중에 우리 병원의 핵심이 될 사람이 있다.’

경력자부터 이제 막 간호사가 된 사람까지 다양한 후보자 중 전문 병원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찾기 위해 눈과 귀를 활짝 열었다. 민정호에게 가졌던 선입견이 준 실수를 면접 내내 상기했다.

‘첫인상도 중요하지만 어떤 생각으로 지원을 했는지,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가 더 중요하다.’

또한 지원자들에게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현실에 만족해 안주하는 병원은 그 어떤 조건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 병원이나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병원은 간 이식을 포함해 메이저 수술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더 힘들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종합 병원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후보자 여러분에게 무수한 기회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도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단순히 일자리만 찾는 사람은 합격이 된다 해도 곧 떨어져 나갈 것이다. 실제로 가장 이직이 많은 직종이 간호사이기도 했다.

반면 목표를 갖고 스스로 노력해 발전하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결국 높은 확률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면접을 마친 김지훈이 평가서를 제출하며 눈가를 굳혔다. 직원들에게 요구만 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인 일이 아니었다. 병원 역시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 마땅했다.

‘어느새 나도 기성세대가 됐다. 아프니까 청년이란 말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노력하는 사람에게 좌절과 아픔이 아닌 희망과 밝은 결과를 줄 책임이 있다.’

문득 든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신현수의 아버지, 신동철 이사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자신의 가능성과 노력 하나만 보고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미래를 열어 주었다.

그뿐일까?

큰 스승님과 스승인 이준영 교수를 비롯한 교수들, 평생의 반려자인 고경아, 함께 고생한 동료들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덕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제는 김지훈이 그 역할을 해야 할 때였다. 서로의 등을 밀고 끌어가며 함께 발전할 수 있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이었다.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혼자가 아닌 사인방, 후배들과 함께 최고의 써전이 돼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드는 것이었다. 질투에 사로잡히거나 자만에 빠지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시작이다.’

주먹을 불끈 쥔 김지훈이 돌연 히죽 웃었다.

‘혹시 나도 제자 하나 키울 때가 된 건가?’

내심 온 정열을 불태워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갈 후배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왕이면 나이 얼마 차이 나지 않는 후배들보다 파릇파릇한 청춘으로 말이다.

간호사 선발이 끝났다.

이제 간 이식 수술을 확대하기 위한 기본적 여건 하나를 갖췄다. 한동안 교육이 필요하겠지만 어느 직종이나 마찬가지였고, 경력자도 다수 있어 문제가 될 소지는 없었다.

막판 고비는 역시 써전의 능력이었다.

김지훈이 사인방과 함께 깊은 논의를 거쳐 결정을 내렸다. 적절한 케이스를 선정해 수술을 준 후 최종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서도진이 첫 번째 간 이식 수술을 했다.

강병옥이 뒤를 이었다.

안호석 또한 공여자 수술을 집도했다.

바쁜 와중에도 김지훈, 손일석, 신현수가 자신의 환자에게는 퍼스트로 참가하는 한편 상대 환자 수술을 참관해 교차 검증을 시행했다.

서도훈 역시 메이저에 준하는 복강경 수술을 두 차례 집도했다. 김지훈과 이경석이 매의 눈으로 모든 과정을 일일이 점검했다.

주말 집담회가 끝난 후 최종 회의에 들어갔다.

후배 사인방 모두 퇴근도 못한 채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누구 한 명이라도 독자 파트를 만들지 못하면 그보다 고약한 일은 없을 상황이었다.

“국가고시 때보다 더 떨리네.”

“선생님은 걱정 없죠. 제가 문젭니다.”

“천하의 강병옥이 겸손을 떨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호석이하고 도훈이도 무사통과일 텐데 나만 제외되면 어떻게 하지? 병원 나가야 하나?”

가장 대범한 성격을 가진 서도진도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보다 의욕이 넘치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강했지만 김지훈과 손일석의 수술을 보면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도 신현수 선생님 수술을 보면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어.”

“너도 그래? 난 김지훈 선생님하고 이경석 선생님 사이에 껴서 샌드위치가 된 기분이야. 경력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는데 왜 이렇게 뒤처졌는지 몰라.”

앓는 소리만은 아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선배들의 실력과 지식을 배워 알아 가는 사이 그만큼 자신의 부족함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산이 아니었다.

노력해 왔다.

의지를 놓치지도 않았다.

이번이 끝이 아니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았다. 일 년이란 기간이 필요하지만 목표를 위해 자존심 따위는 언제든 버릴 수 있을 후배 사인방이었다.

딸깍!

문이 열렸다.

손일석이 손짓을 했다.

“들어와.”

후배 사인방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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