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홉 명의 이사와 여덟 명의 원장단.
신현수를 전문 병원으로 내몬 후 갖는 첫 번째 전체 운영 회의였다. 의료 직군의 자존심이 의외로 강해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지만 이사장의 뜻을 거스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송재덕과 이준영은 당사자니 제외하고 신현수만 남는군. 투표를 하게 되면 몇이나 동조할까? 잘해야 한둘?’
압도적인 표 차이로 전문 병원의 확장을 막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은밀히 추진하는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도 개망신을 줘 재단으로 복귀하려는 신현수의 의지를 완전히 꺾을 기회였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이사 중 과반은 진상건의 의중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들의 판단에 일말이나마 영향을 줄 수 있는 원장단은 송재덕 교수나 이준영 교수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좋지 않네. 오직 병원과 환자만을 생각했던 예전 원장님들은 어디 계실까?’
원장이란 자리가 그렇게 중요할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더없이 중요할 것이다. 반면 이사장의 눈치나 보며 자리보전에 급급하다면 가치가 전혀 없는 자리기도 했다.
꼴사납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중앙 의료원 원장을 겸임한 서울 병원 원장이 회의 주재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안건은 전문 병원 펠로우 선발 여부입니다. 아시다시피 펠로우 선발 규모는 산하 모든 병원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전문 병원 의견부터 듣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자료를 펼쳤다.
“사전에 보내 드린 진료 환자 및 수술 건수에 관한 자료는 이미 확인하셨을 겁니다. 이 추세로 간다면 곧 의사, 간호사를 포함한 전 의료진이 심각한 인력 부족 상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원 확충이 절실합니다.”
“어느 병원이나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한 병원에서 외과, 내과, 방사선과까지 펠로우만 여덟 명을 선발하면 다른 병원은 더욱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점은 감안하신 겁니까?”
“제한된 인원을 나누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해당 부처에 정식으로 요청해 선발 인원 자체를 늘려 달라는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펠로우는 시간 강사입니다. 심지어 전임 강사를 포함한 교수 선발도 각 병원에 상당한 재량권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습니까?”
서울 병원 원장이 헛기침을 했다.
정부 부처와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지만 재원을 조달하는 쪽은 병원이고, 정부도 의료 확충에 동의하기 때문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 말을 해 봐야 군색할 뿐이었다.
진상건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사 중 한 명을 보았다. 역시 의사는 아무리 눈치가 빨라도 이런 일에 적절치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량권이 있다지만 펠로우도 임상 교수이기 때문에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덧붙여 병원 내의 밸런스도 생각해야죠. 교수는 적은데 펠로우만 지나치게 많아지면 진료 수준까지 떨어질 테고, 본원 전체 평판에도 금이 갈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재원을 조달할 수 있습니까?”
“우리 병원은 독립채산제입니다.”
“재정이 부실하게 되면 결국 본원이 나서야 합니다. 감당하지 못할 속도로 규모를 키우다간 자칫 총체적 난국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닙니다.”
신현수가 이준영 교수에게 허락을 받고 대신 대답했다. 결코 위축되지 않은 당당한 자세로 한 마디 한 마디에 강한 힘을 실었다.
“신임 행정부원장과 함께 면밀하게 검토했습니다. 예측보다 수술 건수가 적다고 해도 운영에 영향을 줄 정도의 재정 부실이 발생할 일은 없습니다.”
“어느 병원이나 초기에는 능력 이상의 실적을 내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환자는 정체되고, 비용은 더 늘 텐데 재정 부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료를 보시죠. 우려에 불과합니다.”
“숫자로 현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입이 아니겠습니까?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전문 병원의 수입은 결국 환자와 수술이었다.
김지훈이 나설 차례였다.
“우려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전문 병원은 예외라고 장담합니다.”
“근거가 있습니까?”
“간암 분야는 말씀드릴 이유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간 이식 부분 역시 보험 적용이 된 관계로 수년 내 전국적으로 연간 천여 건 이상이 시행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 상태입니다. 현재도 주마다 두 건을 시행하고 있지만 사 개월 이상 예약이 밀려 있습니다. 수술이 늘면 늘었지, 결코 줄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전망은 허수예요.”
“인원을 확충하지 못할 때야말로 허수가 될 겁니다. 수술을 원하는 환자는 밀려 있는데 써전이 부족해 수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조목조목 반박했다.
계속 반론이 나왔다.
최종 결론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불가능한 현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펠로우 선발은 병원의 의지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경쟁 병원의 일도 아니었다.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눈치 보기에 불과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이자 자리보존의 수단에 불과했고, 전문 병원을 억눌러 주도권 내지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어깃장일 뿐이었다.
진상건과 한통속인 김병오 이사가 가세했다.
“재정권에 인사권까지 다 주었지만 어디까지나 개원 당시의 규모를 상정했을 경우입니다. 과도한 병원 확장이나 인력 충원은 중앙 의료원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더 이상 논의할 일이 아닙니다.”
개원 초 합의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준영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참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인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문 병원이 독립채산제를 택했다 해도 재단 소속임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아무 이유 없이 우려를 표명하겠습니까? 다들 수십 년 동안 병원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입니다. 무리한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본원에 피해를 준다면 마지막 결단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폐원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목소리 높아졌다.
“인허가는 정부 부처 소관이지만 대형 병원이 흔들리면 그 여파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우리에게는 수만 명의 환자와 수천 명의 직원을 살리기 위해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협박에 가까웠다.
현 수준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안주하는 자가 흔히 갖는 발전에 대한 두려움일 리가 없었다.
같은 의료진인 원장들에게 시선이 갔다. 서울 병원 원장이 십분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문 병원 소속 누구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한 번 터지면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사람을 건드렸다. 그것도 정당한 요구를 말도 안 되는 이유까지 대며 반대를 위한 반대를 거듭했다.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슬며시 이준영 교수의 팔을 잡았다. 흥분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얼굴로 만류하며 김병오 이사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회의를 소집한 이상 투표로 결정하겠습니다. 전문 병원 측은 당사자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사 자격으로 참석한 신현수 이사의 표만 인정하겠습니다. 과반의 의견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장님도 같은 의견입니까?”
“김 이사님 말씀대로 다수의 뜻을 따라야죠.”
서울 병원 원장의 입가가 말렸다.
‘당신은 이제 서울 병원 원장이 아니야.’
하나 마나 한 투표였다.
한때 중립으로 돌아섰던 이사들마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지지 의사를 표명한 적이 없기에 찬성은 신현수의 몫인 단 한 표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펠로우 선발 무산은 기정사실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원장님도 분명히 같은 의견입니까? 펠로우 선발을 반대하는 것이 맞습니까?”
“허험! 충분히 논의했으니 투표로 결정합시다. 순리를 따라야 무리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순리? 허허허! 순리 좋죠.”
송재덕 교수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반대한 이사와 원장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마치 절대 잊지 않겠다는 것처럼 매서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부당함에 맞서지 못하면 누구도 가르칠 자격이 없다.’
막 입을 열어 항의하려는 순간 고성이 터졌다.
“야야야!”
김지훈과 신현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런 자리에서 야야야 소리를 들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떤 의미인지 빤히 알고 있을 이준영 교수는 당연하다는 표정만 보였다.
송재덕 교수가 벌떡 일어났다.
충돌만이 남았다.
“그러고도 당신이 의사예요? 환자를 봐야지, 뭘 얼마나 받아 처먹었기에 이사장 눈치를 봅니까? 환자와 병원을 위한 역할도 제대로 못할 거면 당장 옷 벗어요.”
“지금 누구보고 하는 말입니까? 처먹다니? 이건 인격 모독이에요. 여기가 어떤 자리인지 잊지 마세요. 창피당하기 전에 당장 앉아요.”
“심하다고요? 의사가 아니라 떡고물이나 바라는 양아치로 보이는 당신 꼬라지를 보고 말을 해요. 이사라는 당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대 이사장님께 뭘 배운 거예요? 죽으나 사나 병원만 생각하는 게 올바른 길이라는 사실을 잊었습니까? 옳고 그른 건 국민학교 안 나와도 다 알아요. 다.”
고개가 홱 돌았다.
“이사장님, 당신이 제일 문제예요. 무슨 수작을 벌이고 있는지 다 알지만, 내가 내 새끼들을 지키고 있는 한 절대 당신 뜻대로 안 될 겁니다. 이사장이면 이사장답게 행동해요. 이런 일에 시비나 걸고 창피하지도 않아요?”
“공식 석상입니다. 예의를 지키세요.”
“난 예의를 아는 사람에게만 예의를 지킵니다.”
속은 시원했다.
양심이 좁쌀만치라도 남아 있다면 아주 제대로 찔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최악의 불상사가 벌어졌다. 펠로우 선발은 물 건너갔다.
이준영 교수의 눈짓에 김지훈과 신현수가 아직도 코에서 시뻘건 불길을 내뿜고 있는 송재덕 교수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정적만이 흘렀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충격이라도 먹었는지 사과하라는 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진상건이 송재덕 교수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중도에 섰던 이사들과 일부 원장들을 회유했지만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해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송재덕 교수가 스스로 자기 집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투표도 할 필요가 없겠군.’
송재덕 교수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도 남았지만 느긋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강자의 아량? 혹은 승자의 여유라도 보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자! 다들 진정하세요. 사람이 흥분하다 보면 마음에 없는 말도 하기 마련 아닙니까? 우리는 객관적으로 판단해 결정하면 됩니다. 투표 진행하시죠.”
원장 한 명이 조용히 제안했다.
“무기명이 좋겠습니다.”
진상건이 웃었다.
막말을 서슴지 않으며 길길이 날뛴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의사 사회를 떠나지 않는 이상 또 보게 될 텐데 해코지라도 당할까 걱정하는 것이라 여겼다. 썩어도 준치라고, 송재덕 교수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야 의사 사회에 국한된 일일 뿐이었다.
‘소심하기는. 이렇게 누르다 보면 송재덕이고, 이준영이고 다 힘 빠지게 돼 있다는 걸 왜 몰라? 그래서 평생 의사나 하고 사는 거야.’
“입장이 곤란하시겠군요. 그렇게 하죠.”
신현수만 남고 모두 회의장에서 나왔다.
송재덕 교수가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내가 너무 심했나?”
“잘하셨습니다.”
“지훈아, 너도 그러니?”
“그럼요. 제 속이 다 시원합니다. 다들 선배고 연장자지만, 존경해야 하는 분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았습니다.”
“허허! 허허! 그래도 넌 그러면 안 된다. 총대 메는 사람, 악역을 맡아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법이야. 저질러 놓고 나니 찜찜하긴 찜찜하다.”
김지훈이 쓴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기운이 빠졌다.
투표 결과를 기다릴 생각도 없었지만 신현수를 기다려야 했다. 간만에 스승님들과 술 한잔하며 속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데 눈치가 이상했다.
‘왜 두 분 다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지? 하긴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 그래도 너무 태연해. 믿고 있는 구석이라도 있으신가?’
송재덕 교수가 중얼거렸다.
“안달복달한다고 안 되는 일이 되지는 않아. 그래도 한 세월 같이한 의사들인데 믿어 보자. 세상 참 험하다. 험해.”
삐거덕!
문이 열렸다.
신현수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결과는 빤할 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야 할 상황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것 같기도 했다.
진상건이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병오 이사는 연신 물만 들이켰다.
회의를 주재한 서울 병원 원장도 잔뜩 찌푸린 채 몇몇 이사와 원장들을 보며 인상을 썼다. 공식 발표를 채근하는 신현수에게 밀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투표 결과 전문 병원의 펠로우 증원안이 통과됐음을 선포합니다. 정부 부처와의 협의는 송재덕 원장님과 이준영 부원장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이상 회의를 마칩니다.”
김지훈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마음을 바꾼 것일까?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단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