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31화 (1,131/1,329)

17화

그날 오후.

국제 학회 논문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기 나름인지 오전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젊은 병사가 장하기만 했다.

‘부정적인 생각은 말자. 잘 버티고 있어.’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수영을 포함한 몇몇 장교였고, 정자세를 취한 채 눈에 보일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환자 부모를 대동한 단 한 사람의 군인이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고 있었다.

“과장님, 사단장님이십니다.”

별과 무궁화는 차원이 다르다지만 김지훈에겐 의미 없는 소리였다. 오전에 만난 영관급 장교의 언행이 마음에 남아 오히려 떨떠름했다.

“앉으시죠. 어머님, 아버님은 이쪽에 앉으세요.”

사단장이 소파에 앉았다.

몸을 묻으며 편안한 자세를 취할 줄 알았는데 등을 꼿꼿이 펴고 있었다.

‘전형적인 군인인가?’

“아침 일찍 왔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죄송하지만 김 일병 상태를 다시 한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돈에 팔촌이 와도 설명을 요구하는데 못할 것이 없었다. 경황이 없을 부모도 다소 진정됐기를 바라며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환자의 수술과 상태를 설명했다.

사단장이 콧등을 찡그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김 일병을 반드시 살려 주십시오. 어머님, 아버님, 군을 믿고 아드님을 보내 주셨는데 이런 일이 발생해 죄송합니다. 모든 책임은 제게 있으니 절 꾸짖어 주시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사단장은 자신의 책임을 단 한 번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이자 자식을 둔 아버지라며, 환자 부모의 손을 잡고 눈시울까지 붉혔다.

의외였다.

오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별은 극구 사죄하는데 휘하 장교일 무궁화는 책임 모면에 급급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최고 지휘관의 말과 태도에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리를 끝냈다.

김지훈이 한수영에게 눈짓을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참군인이라 소문난 분입니다. 정말 안타까워하시고요. 진급 심사를 한 달 앞두셨는데 이런 일이 터져서 우리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오전에 본 대령은 뭐야?”

“별 달아야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진급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군인도 있기 마련이고요. 해당 지휘관들은 작살이 날 겁니다.”

그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환자 부모와 함께 걸으며 모든 책임을 등에 지고자 하는 군인과, 휘하 장병의 목숨보다 자신의 영달을 우선하는 군인의 얼굴이 교차했다.

군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역시 사람이 문제였다. 휘하 장병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의 차이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어떤 군인이 필요한지는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분탕질을 친다고, 한 사람이 군대 전체를 욕 먹이고 있구나.’

김지훈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젊은 병사는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의식 상태가 조금씩 호전돼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다는 희망까지 보였다. 가끔 모찬우가 난데없이 킵을 자청해 된소리를 해야 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와중에 웃긴 일이 벌어졌다.

대령이란 사람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

진급에 목을 매긴 맨 모양이었다.

물론 공문은 보지도 못했고, 볼 때마다 통하지도 않을 압력을 가했다. 김지훈과 선후배 사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는지 애꿎은 한수영만 중간에 끼어 항상 미안해했다.

“죄송합니다.”

“한수영 선생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어.”

“사단장님을 비롯해 대부분의 장교들은 이송을 반대하고 있다는 점 알아주십시오. 통합 병원 군의관들도 수술 내용을 듣고는 현 병원에서 치료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일부만 면피에 급급하다니 다행이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한 선생도 환자와 보호자에게만 집중해. 우리에게도 힘이 된다. 근데 사단장도 반대하는데 대령이 저래도 되나?”

“절대 끈 떨어진 연을 붙잡고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기저기 손을 쓰고 있을 겁니다.”

한수영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신현수와 민정호까지 찾아왔다.

“김 과장, 환자는 어때?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와.”

“통증 반응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지켜봐야 돼. 그나마 수술 부위가 새지 않아 다행이야. 혹시 민 부원장님도 전화를 받았습니까?”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빼면 군대 내에서 가장 큰 사건일 텐데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과장님은 신경 쓰지 말고 진료에만 전념하시면 됩니다.”

“대령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이거나 장군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일 텐데 해결 방안이 있어요?”

“진료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해결하는 일도 제 업무니 찾아야죠. 지속적으로 부당한 압력을 가한다면 정훈철 PD님에게 연락해 사건을 공론화시키는 것도 방법 중 하나입니다.”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계속 이런 식으로 나와 연락해야 하면 내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직접 연락하겠습니다.”

“내가 연락하는 게 더 확실…….”

“압력의 부당함도 판단해야 하고, 환자가 이송되지 않는 한 역풍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단단한 인맥을 만들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지만 병원과 관련된 문제니 먼저 전화하는 일은 삼가해 주십시오.”

김지훈이 감탄 아닌 감탄을 터트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회를 포착하는 민정호의 감각은 그야말로 동물적이었다. 인상 나쁠 때는 한없이 나빠 보였는데 감탄이 터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희한하긴 했다.

“대단하네요.”

“비꼬시는 건 아니죠?”

“예전에는 그랬을 것 같은데 진상건, 정한득 이런 인간들 때문인지 지금은 오히려 배우고 싶네요. 참! 신 교수, 말 나온 김에 펠로우 선발 문제에 나도 참여해야겠어.”

신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행정적인 일은 더 이상 하기 싫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웬일이야? 이번 일 때문에 더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한수영 선생 때문이야. 손은 못 봤지만 환자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너무 마음에 들어. 함께 일하고 싶어. 실력이 부족하면 채워 주면 되는 일이고.”

“오케이! 나야 반대할 이유가 없지. 그럼 이준영 선생님께 말씀드릴게. 손 교수하고 이경석 선생님에게도 필요 인원 추산해 달라고 했으니까 시간은 절약될 거야.”

“아니야. 내가 직접…….”

“이준영 선생님과 내가 같은 파트인 거 잊었어? 내 인맥이다. 침범할 생각 하지 마.”

민정호가 여럿 물들였다.

김지훈이 벅벅 얼굴을 문지르며 끄덕였다.

“인맥이라 좋겠다. 마음대로 하셔.”

신현수가 씨익 웃었다.

예전보다 확실히 표정이 밝아졌다.

이혁원이 병사의 곁을 지켰다.

김지훈은 물론 의료진 다수가 힘을 보탰고, 한수영은 군의관이 또 한 명 있다며 단 하루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참군인이라는 사단장 역시 수시로 병원을 찾았다.

때문일까?

쓸데없는 전화가 사라졌다.

환자에게만 집중해도 모자랄 상황이 이어져 무엇보다 환영할 일이었다. 은연중 사단장이 철저한 진상 규명을 명령하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건을 수습하려는 대령을 짓뭉갰다는 소리가 들리긴 했다.

“장교들 모두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인데, 조기 예편이 결정됐다는 말도 들립니다.”

김지훈의 시각도 다소 변했다.

군대 내 처분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부모에게 사죄하던 사단장의 얼굴이 가끔은 떠올랐다. 하기에 환자를 살려야 했다.

강인한 병사였다.

여전히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쉬고 있었지만 통증에 대한 반응이 강해졌다. 신장을 떼어 내고, 대장 일부를 절제하고, 휘플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운 생명력이었다.

부모는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선생님, 우리 아들 어떻습니까?”

“수술 부위는 잘 아물고 있습니다만, 의식 회복이 느리네요. 뇌 CT나 MRI에서 특별한 소견이 보이지 않으니까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아들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잠자리는 가시방석일 테고, 따뜻한 밥도 소태처럼 쓰기만 할 것이다.

어느새 펠로우 선발 문제를 두고 담판을 지을 때가 됐다. 기존 수술에 논문까지 작성해야 하는 김지훈이 피곤을 무릅쓰고 서울 병원으로 갈 채비를 했다.

“이혁원 선생, 주말이다. 주의하자.”

“오늘 간호사 면접도 있다고 들었는데 서울 병원으로 가신다고요?”

“이경석 선생님과 손일석 선생이 대신 보기로 했어. 간호 부장님과 고 선생이 있으니까 잘 끝날 거야. 요새 같으면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것 같다.”

이혁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갑자기 뭔 인사까지 하고 난리야?”

“과장님도 찬우하고 한수영 선생을 놓치기 싫어 펠로우 선발에 신경 쓰시는 거 아닙니까?”

“눈치는 빠르네.”

이혁원이 웃고 말았다.

눈치가 빠른 것이 아니라 모찬우와 한수영을 볼 때마다 티가 날 정도로 눈을 빛낸 김지훈이었다. 다들 원하는 대로 펠로우 선발이 가능해지면 엄청난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함께 일하게 될 것이라 여길 정도였다.

김지훈이 중환자실을 나갔다.

물끄러미 환자를 지켜보던 이혁원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눈앞의 환자를 수술했던 당시가 사진처럼 떠올랐다. 누구도 그렇게 빠른 결정과 손을 보일 수 없었다. 모찬우는 다른 병원에서 펠로우를 할 생각조차 없다며, 오직 김지훈에게 배우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환자가 버티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김지훈 선생님 같은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테이블 데스를 피할 길이 없다.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더구나 펠로우 선발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일 년 후에 전임 강사가 되지 못하면 전문 병원 근무는 불가능해진다. 아버지도, 형 같은 김지훈도 실력이 따라 주지 못하는 써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설 사람이 아니었다.

결과는 오직 이혁원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복강경 파트에 온몸을 던지고 있는 나종진과 함께 전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모찬우, 넌 공부 안 하고 또 왜 왔어?”

“쉬는 시간입니다.”

“그럼 쉬어.”

“이게 쉬는 겁니다.”

‘미친놈!’

모찬우가 당연하다는 듯 인공호흡기를 떼고 기관지 분비물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환자의 숨을 감지하지 못한 인공호흡기가 삐익! 삐익! 요란한 경고음을 울렸다.

힐끗 고개를 돌리던 이혁원이 깜짝 놀랐다.

젊은 군인의 팔다리가 꿈틀거렸다. 기관지를 자극하는 석션의 강한 자극에 흉벽이 크게 출렁거렸다. 단지 안정제의 효과가 떨어져 보이는 양상이 아니었다.

이혁원이 환자의 엄지발톱에 강한 압력을 가하며 소리쳤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모찬우 역시 석션을 중단한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환자분, 눈 떠 보세요.”

꽈악!

멀쩡한 사람은 단 일 초도 참지 못할 정도의 지독한 통증이 엄지발가락을 거쳐 전신을 자극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혁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환자분, 눈 떠 보세요. 눈 떠 봐요.”

팔다리 움직임이 강해졌다.

환자의 눈꺼풀이 떨렸다.

마침내 그렇게도 굳건히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흰자위 한가운데 놓은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자발 호흡까지 강해졌다.

후욱! 후욱! 커억!

고통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기관지를 채운 관이 주는 고통이었다.

툭툭 빠져나오는 가래 덩어리를 제거해 주자 정상적인 호흡임을 판단할 수 있는 산소포화도 역시 떨어지지 않았다. 바이탈도 안전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호사, 지금 즉시 비지에이 준비하고 흉부 촬영 합시다. 샘플링까지 합시다.”

모든 검사 결과가 나왔다.

눈을 뜬 젊은 병사는 놀라울 정도로 강한 호흡을 유지하며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모든 상태를 점검한 이혁원이 결단을 내렸다.

“모찬우 선생, 인투베이션 뽑자.”

기관지를 막고 있던 관이 제거됐다.

“환자분, 내가 보여요?”

아직은 멍해 보이는 눈동자가 이혁원을 향해 움직였다. 한참 동안 눈동자를 고정시켰던 환자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돌아왔다.

‘됐다. 됐어. 이제 살았어.’

이혁원과 모찬우가 털썩 주저앉았다.

터닝 포인트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급격하게 돌아왔다. 기적인지, 함께 밤을 새며 환자 곁을 지킨 동료들의 힘인지 몰라도 다리가 풀릴 정도로 놀라운 경과였다.

가슴 졸인 날이 훨씬 많았지만 지금 같은 순간이야말로 의사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간 쌓인 피로와 불안이 한꺼번에 사라지고도 남았다.

그 시간.

김지훈, 신현수, 이준영 교수, 송재덕 교수가 재단 이사들 및 산하 병원 원장단과 자리를 가졌다.

진상건이 느긋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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