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신현수와 함께 만났다.
그동안 평상시와 똑같이 업무에 열중한 민정호였기에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솔솔 코끝을 간질이는 커피 향도 여전했다.
“민 부원장님, 결정하셨습니까?”
“제가 제시한 계약 조건에 동의하신다면 애초 계약했던 기간까지 근무하고 싶습니다.”
민정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너무 반가운 소리에 하마터면 어린아이처럼 과한 반응을 보일 뻔했다. 엉덩이를 들썩였던 신현수도 민망한지 어색한 기침을 터트렸다.
최소 일 년 반 연장이었다.
성에 차지 않지만 전문 병원이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었다. 모든 일이 술술 풀려 간다는 생각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김지훈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민정호를 보았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계약서였다.
음흉하고 치밀하기 짝이 없는 진상건도 결과적으로 글귀 하나 때문에 낭패를 면치 못했다. 하물며 글자 하나, 아니 토씨 하나까지 확실하게 이행하는 민정호가 직접 작성한 계약서였다.
어떤 조건을 내걸까?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계약서를 확인했다.
‘뭐가 이렇게 두꺼워?’
자잘한 부분까지 온갖 내용을 담아도 절대 나올 두께가 아니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과 신현수가 마지막 장까지 세세하게 확인했다.
서로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민정호는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신현수가 먼저 물었다.
“급여는 현재와 동일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재정 부분 권한을 십분 인정하며, 행정직 직원의 일차 인사권을 달라고요?”
“어디든 시간이 지나면 쓸데없이 비대해지거나 관성에 젖어 효율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면을 방지하고 싶습니다. 인사권을 갖는다 해도 충분한 상의를 통해 무리한 일은 진행하지 않을 겁니다. 최종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신 교수님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일차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애초 인사 권한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약간의 권한을 더 요구할 뿐 현행 근무 조건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본인 처우와 권한이 담긴 단 두 장의 근로 계약서가 아니라 추가로 내민 일종의 자료였다.
다시 한번 자료를 확인한 김지훈이 한동안 민정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항상 고민해 왔던 일을 조건으로 내밀다니 정말 예상외였다.
“단기 발전 방안을 제시하셨는데, 이 계획을 수용하지 않으면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병원 운영은 제게 생소한 분야지만 눈앞에 닥친 문제만 해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애초 계획했던 병원을 건립하기 위한 기반까지 닦는 것이 목표입니다. 따라서 의료진의 적극적인 협조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간 이식을 중심으로 수술 건수를 더 늘려야 한다는 점과 그에 따라 펠로우 충원을 비롯해 간호사 추가 충원이 또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도 추진 중에 있고요. 다만 병원 확장까지 거론했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불행히도 병원 규모와 내원 환자 수가 비례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확장은 불가피한 선택이고,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이번에 확보한 땅을 유휴부지로 놀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 재정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런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 계약을 원하시는 것 아닙니까? 무리한 일은 인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자신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입을 다물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고, 전문 병원의 설립 이유와도 완벽하게 부합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병원에 애정을 보이는 이유가 있습니까? 민 부원장님의 평소 말대로라면 계약에 발목을 잡힐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모두가 원하는 성과가 나길 바랄 뿐입니다. 고액 연봉자인데 먹튀라는 말을 들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말 그것뿐입니까?”
“제가 개인적 감정 같은 문제들을 일과 섞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실 텐데요.”
민정호는 단호했다.
의료진 모두 진료에만 몰두해도 모자란 현실을 감안할 때 실로 완벽한 행정부원장을 얻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어쩌면 민정호로 말미암아 애초 설립 목표였던 종합 병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떠올랐다.
김지훈이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독립채산제이긴 하지만 진상건 이사장의 애초 목적은 우리 병원의 폐업이었습니다. 확장을 시도하는 순간 방해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런 문제는 계산하신 겁니까?”
“병상을 늘리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증설을 할 수 없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관공서조차도 하나의 벽이 될 테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입니다. 법규 하나하나로 지연시킨다면 인맥이라도 동원해야죠.”
“불법적인 일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스스로 무덤을 파진 않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진상건도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할 텐데 막을 방법이 있습니까?”
민정호가 묘한 눈빛을 보였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권한을 넘어서는 일을 무리하게 시도하면 피할 수 없는 일이죠.”
신현수가 눈을 부릅떴다.
“뭔가 알고 있군요? 정한득과 관련된 일입니까? 아니면 이사들?”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사실이 치명적인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자잘한 문제로 거물을 옭아맬 수는 없습니다. 설혹 심각한 비리를 알아도 묻어 버릴 힘이 있는 사람을 상대할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막겠다는 말입니까?”
“때를 기다려야죠.”
“그게 언제입니까?”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목표를 잃지 않는 한 때가 오면 교수님도 금방 알아차리실 겁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평생 승승장구할 것처럼 기세등등했던 사람, 심지어 최고 권자에 올랐던 인간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니 말이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진상건 이사장과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겁니까? 존폐 여부를 떠나 애초 맺은 계약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네요.”
“계약 상대가 달라졌는데 똑같이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상황에 맞춰야 확실하게 이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적인 질문은 삼가해 달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있다는 말인지, 없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 그대로 사적 영역이었고, 계약이 성사되면 최선을 다할 민정호였다. 설혹 발전 방안의 시행이 늦어진다고 해도 전문 병원에 해가 될 일은 없었다.
민정호가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약하시겠습니까?”
전문 병원 소속 행정부원장을 선발하는 일이었다. 계약과 하등 상관이 없는 진상건 문제로 잠시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도장이 인주로 물들었다.
콱! 콱!
이 시간부로 계약이 성립됐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훅 숨을 내쉬었다.
진상건과 도장을 찍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부족한 부분을 모두 맡길 수 있는 확실한 사람을 얻었다는 사실이 꽤나 가슴 벅찼다.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하면 이런 반전이 없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불현듯 인연이란 말이 떠올랐다.
성급한 판단이 갖가지 문제를 만드는 것처럼 마음을 열고 신중하게 상대를 보지 않으면 보석 같은 사람을 놓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사람 보는 안목일지도 몰랐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의 이해하기 힘들었던 행동과 태도의 의미가 확실하게 다가왔다.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도 새삼 깨달았다.
민정호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맞잡은 손의 따스함에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이제는 섣부른 판단이 아니겠지? 보석이 맞네.’
신현수도 따라 웃었다.
하루 뒤 펠로우 선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준영 교수, 송재덕 교수와 자리를 갖기로 했다. 전문 병원 내부 결정만으로 가능한 간호사 충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해마다 신규 선발 인원이 제한되는 교수 자원과 관련된 일이기에 산하 병원과 충돌할 수도 있는 데다 정부 부처의 승인까지 필요한 부분이었다.
더욱이 진상건이 순순히 동의할 리가 없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방해할 것이 빤한데도 이상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짝짝 박수를 쳤다.
“정말 개인적인 자리를 갖기 힘들지만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지나갈 수 없죠. 민 부원장님, 저녁 먹을 때도 지났는데 함께 식사합니다. 술은 힘들더라도 식사 정도는 해야 할 날 아닙니까?”
“그래요. 언제 또 이런 날이 오겠습니까?”
신현수도 찬성했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 때문인지,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날인지 평소라면 매몰차게 ‘그럼 이만!’을 외쳤어야 할 민정호가 입을 열지 않았다.
같이 밥 먹자는 소리가 분명했다.
정말 마음을 여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좋다고 소리쳤다.
“하하하! 갑시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운 벗고 옷 갈아입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며 첫 식사 자리인데 무엇을 먹을지, 당직인 이경석은 어쩔 수 없어도 손일석은 꼭 불러야 한다는 말을 열심히 주고받았다.
당연히 신현수와 김지훈만의 대화였다.
김지훈이 퇴근길 마지막으로 보이는 장소인 응급실을 들렀다. 아침저녁으로 확인하는 일이 습관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아이 한 명이 엉엉 울고 있었다.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고, 간호사는 난처한 기색으로 곤란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과장님! 아직도 퇴근 안 하셨어요? 턱 밑이 찢어져서 왔는데, 당직 선생님 모두 수술 들어가셔서 치료할 선생님이 안 계시네요.”
간호사는 물론 과장이라는 소리에 아이 엄마까지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다. 성형외과를 원했다면 벌써 갔을 테고, 사실 이 시간에 성형외과 전문의나 전공의가 근무하는 병원은 대형 병원뿐이었다.
“무슨 수술인데요?”
“헤모뻬리(혈복강)인데, 여러 부위 손상이 의심돼 꽤 오래 걸릴 것이라고 하셨어요.”
밤이 깊어 가는데 30분이면 끝나는 치료 때문에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할 수도 없고, 온 병원을 헤매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원이 부족하니까, 메이저 수술이 있으면 응급실을 책임질 사람이 없네. 에휴! 어쩔 수 없구나. 아이만 잘 구슬리면 금방 끝나겠지.’
“신현수 선생님, 민 부원장님, 수처하고 갈 테니까 먼저 자리 잡고 연락 주세요.”
이런 상황에 익숙한 신현수는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반면 그렇게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민정호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당직도 아닌 데다 누구든 쉬고 싶을 시간인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구나. 간단한 치료기 때문만은 아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에 계약을 하게 됐지만 눈앞에서 보니까 느낌이 확실히 다르네.’
불현듯 이경석까지 떠올랐다.
토할 것 같은 피비린내부터 코를 찡그리게 하는 약품 냄새까지 어떻게 견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 숨 가쁘게 달리는 의료진의 모습에 가슴이 뛰곤 했다.
만에 하나 응급실을 찾아야 할 일이 생긴다면 전문 병원을 택할 것이다. 김지훈과 이젠 익숙해진 의사들에게 치료받고 싶다는 생각까지 스쳤다. 어쩌면 계약 조건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병원 공기가 이미 자신의 발길을 잡았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아이를 살살 구슬렸다.
“모기한테 물려 봤지? 한 번 따끔하고 나면 하나도 안 아파. 그냥 뭐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만 있을 거야. 일곱 살이 울면 창피한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무서울 아이의 관심을 돌리며 마취를 하고, 수처를 시작했다. 다행히 훌쩍거리면서도 눈을 꼭 감은 채 잘 견뎠다.
문득 인턴, 레지던트 시절, 특히 음성과 구미가 생각났다. 수처 한 바늘을 받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은 아무 느낌도 없는 수처가 그때는 어마어마한 긴장과 만족감을 주었다.
‘이런 게 초심일까?’
정성을 다해 꼼꼼하게 꿰맸다.
막상 봉합을 시작하자 설렁설렁 꿰맬까 불안해하던 아이 엄마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사가 아닌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너무 깔끔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상처가 깨끗해서 개인 병원에서 치료받으시고, 오 일 후에 실밥 뽑으면 됩니다.”
“흉은 안 남을까요?”
“제일 가느다란 실을 사용했고, 아이가 어린 데다 턱 밑이라 눈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간 이식 수술 때마다 정교함과 정확함이 생명인 혈관 연결을 하는데 피부 봉합이 대수일까? 사실 가는 실로 정성을 다하면 충분한 술기였다.
“예쁘게 잘 꿰매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 엄마와 인사를 나누고, 식사 자리를 알기 위해 휴대폰을 살피는 순간 응급실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은 간호사가 달려왔다.
“과장님! 전화받아 보시겠어요?”
“제 전화예요?”
신현수일 것이라 여겼다.
‘문자로 남기지, 응급실에 전화는 왜 해?’
“여보세요?”
(당직 선생님이십니까?)
낯선 목소리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훈의 얼굴이 변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전화가 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