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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26화 (1,126/1,329)

12화

계약 당사자는 분명 김지훈이 아니건만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지만 전문 병원과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점은 내게 이득인지, 아닌지 뿐이다.’

인사권이래야 고작 행정부원장 한 명에 국한된 일이었다. 원대한 목적만 아니었다면 계약 성사를 위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없애 버려야 할 병원이기에 전문 병원이 얻을 이득까지 생각해야 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막판에야 기대했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완전히 기울었을 가능성이 거의 100퍼센트에 수렴하는 민정호의 배제였다. 자신의 의도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전문 병원에 근무하는 것만큼 께름칙한 일도 없었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좋습니다. 인사권을 모두 넘기겠습니다. 단, 민 부원장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본원에서도 원하는 인재기 때문에 경쟁을 줄이고 싶군요.”

진상건으로서는 최대한 양보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진상건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온전한 인사권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누굴 뽑든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설마 민 부원장을 유임시키겠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이사장인 날 상대로 기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대답할 이유가 없습니다만, 굳이 말씀드리면 후자입니다. 비록 한 재단 소속이지만 형식에 불과합니다. 현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재단과 이사장님의 간섭은 원치 않습니다. 제 생각을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약을 하실 겁니까?”

“일종의 추가 조항인데 일방적인 주장만 하면 합의하기 어렵습니다.”

김지훈의 입가가 말렸다.

“그럼 계약을 포기하시죠. 신 교수, 내 생각은 확고해. 질질 끌려 다니기 싫다. 돈이 필요하면 대출받으면 되고, 은행 이자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진상건이 지그시 이를 물었다.

김지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완강했다. 거의 막무가내로 타협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다. 반면 신현수는 답답해하는 눈치였고, 민정호는 자신과 관련된 일임에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결국 눈가까지 찌푸렸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민정호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더 빠르겠어.’

“민 부원장, 전문 병원과 계약할 생각이 있어?”

“조건에 달린 일입니다. 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계약은 없습니다.”

돌연 진상건이 웃었다.

‘역시 민정호야.’

김지훈과 신현수가 정말 민정호를 원하는지 모르지만 몸값이 한껏 치솟았다.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정호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조건을 내밀 것이다.

사정이 나아지고 있다지만 결국 재정 문제에 발목이 잡혀 아비가 남긴 땅까지 포기한 신현수였다. 더욱이 돈을 벌어 주는 직책도 아닌 데다 다른 직원들과의 형평성까지 걸릴 테니 민정호가 내민 계산서를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 뭔가 기대하는 모양인데 민정호를 잘못 봐도 너무 잘못 봤어. 인연이나 정으로 돈을 대신하는 인간이 아니야.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일단 땅부터 확보하자.’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온전한 인사권을 인정하죠.”

김지훈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민 부원장님, 계약서에 추가 조항을 포함해 주시죠.”

두 개의 도장이 인주를 머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진상건은 보지 못했지만 도장을 찍는 순간 신현수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민정호는 여전히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땅을 교환하는 동시에 차액을 지불하며, 온전한 인사권을 보장한다는 계약이 성사됐다. 누가 진짜 이득을 취한 것인지 모를 일이나, 김지훈과 신현수 역시 원하는 것을 얻었다.

작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끗 눈길을 준 진상건이 민정호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민정호, 병원 일이 싫다고 해서 좋은 자리 하나 알아보고 있어. 보수가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을 테니 생각 있으면 바로 연락해.”

“감사합니다.”

홀로 남은 진상건이 휴대폰을 꺼냈다.

“진출로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인허가권을 쥔 관계자들과 자리를 마련할 테니 작업 들어가세요.”

(자금은 어떻게?)

“이런 일 한두 번 합니까? 걱정 마세요. 하하하!”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웃음소리가 무척 경쾌했다.

김지훈이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머리 복잡한 일은 거의 다 마무리됐네. 이제 국제 학회에 신경만 써도 되겠지?”

“오늘 아주 잘했어. 탤런트 해도 되겠다.”

“얼굴 화끈거리는 거 간신히 참았어. 아! 민 부원장 나오네. 아까 말할 때 보니까 이미 마음이 있었던 것 같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아예 오늘 제안을 하자. 민 부원장님, 인사권 확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죠?”

“조건에 달렸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민정호의 얼굴이 무척 냉정했다.

헉! 소리 터졌다.

“새로운 조건이 필요합니까?”

“계약을 다시 하는데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일단 행정부원장직을 수행할지부터 결정한 후, 갈 길이라는 생각이 들면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일주일만 주십시오.”

모든 장애물을 다 제거했건만 가장 우려했던 국면이 벌어졌다. 계약을 종료해도 문제였고, 감당하지 못할 조건을 제시해도 문제였다.

선의에 기댈 일도 아니었다.

“신 교수님, 오늘 계약 이행은 진행되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민정호가 휙 사라졌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입을 열지 못했다.

환자만 봐도 하루하루가 바쁜데 무슨 놈의 일이 한 번에 해결되는 경우가 없었다. 얼굴에 철판 깔고 없는 연기력까지 동원했는데 말이다.

단칼에 떠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일까?

***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간 이식 수술 전 잠깐 주어진 시간 동안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딱딱 손뼉을 쳤다. 생각해 보니 진료 외적으로 해야 할 일은 간단명료했다.

재정 문제는 숨통이 트였다.

하나. 본원에서 계약을 해지하는 동시에 민정호와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 물론 개인 의사가 가장 중요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하나. 펠로우 선발과 모찬우 전문의 시험 준비를 동일하게 보조하고, 지원한다. 선발 인원 규모는 각 과의 사정과 향후 계획에 따라 결정한다.

하나. 국제 학회 논문 게재 건은 병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어차피 서울 병원에서 근무했어도 달라질 상황이 아니었다.

어느 하나 우선순위를 둘 수 없었지만 아등바등 서두른다고 원하는 대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모두 적당한 때가 필요한 일이었다.

세 가지 일을 빼면 진료만 남았다.

마음 편히 먹었다.

정규 수술 시작 시간에 딱 맞춰 간 이식 수술이 준비됐다. 바쁜 와중에도 이식 준비 팀은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움직였다. 머릿속이 가벼워진 덕인지 새롭게 만들어야 할 수술 팀의 면면과 나아갈 방향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뜻밖의 얼굴까지 보였다.

“모찬우, 허락하는 수술만 들어오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왜 여기서 얼굴이 보여?”

“간 이식 수술은 마지막까지 허락해 주십시오.”

“서도진 선생이 허락했어?”

모찬우는 간절히 원했고, 서도진은 사나운 눈길을 피하며 마치 모르는 일이라는 듯 딴청을 부렸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런 문제로 수술 직전에 실랑이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으로 반드시 펠로우를 선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너무 마음에 들어 어쩌면 모찬우의 적극적인 행동을 원했는지도 몰랐다.

‘스승님과 함께 움직여야 하나?’

윤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작하셔도 됩니다.”

힐끗 눈길을 준 김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무언의 허락에 모찬우의 입이 찢어졌다.

웬만한 전공의라면 기필코 피하고 싶은 수술이었다. 열 시간 전후로 끝나는 수술을 들어가면서 무엇이 그리 좋은지 모를 일이었다.

대단한 열의임은 분명했다.

‘후배가 이런 열정을 보이는데 제대로 수술하자.’

김지훈은 신중하면서도 거침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나는 서도진도 이제 집도할 날이 머지않았다. 김지훈을 믿고, 급한 마음에 채근하지 않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모스키토! 수처! 타이! 컷!”

간이 절제됐다.

기능을 잃고 마침내 형체까지 엉망으로 변한 간은 항상 섬뜩했다. 모두 제거하든 일부를 남길 수 있든, 이식을 요하는 환자에겐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명제였다.

공여자 간이 옮겨졌다.

혈관과 혈관을 잇는 과정은 무수히 반복해도 자신할 수 없었다. 가장 많이 합병증이 발생하는 조직이기에 수술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맥과 정맥을 연결했다.

문맥과 문맥, 동맥과 동맥을 이었다.

담도만 남았다.

간에서 생성된 담즙을 소장으로 보내는 통로기에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짝 붙어 주행하는 혈관과 인접한 췌장에 손상을 주지 않아야 하는 탓에 조금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기나긴 수술이 끝났다.

이제야 수술 팀이 허리를 폈다.

김지훈이 힐끗 모찬우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자식! 실력도 실력이지만 수술 내내 한 번도 안 졸아? 정말 아까운 놈이야. 삼 년 잘 가르쳐 우리 병원 핵심 멤버로 삼고 싶다.’

피로와 통증으로 아우성치는 몸을 추스를 때, 환자 이송 준비를 하던 윤서연이 웃었다.

“김 과장, 최근 들어 조금씩 빨라지더니 이번 수술은 꽤 빨리 끝났네. 덕분에 우리도 한결 덜 힘들었어.”

이제야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간 걸렸다.

처음이었다.

열 시간이나 여덟 시간이나 매한가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환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물론 김지훈은 점점 더 노련해지고, 수술 팀은 빠른 손을 뒷받침할 정도로 숙달됐다는 말이었다.

또 하나의 수술 팀 구성이 머지않았다.

왠지 어색해진 김지훈이 한마디 툭 뱉었다.

“찬우가 들어와서 그런가?”

얼떨결에 속마음까지 드러냈다.

수술 시간을 단축한 때문일까?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살피고 보호자를 만나는 내내 김지훈이 전에 보지 못한 여유를 가졌다. 제반 조건만 충족되면 수술을 늘려도 하등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마음의 짐을 던 김지훈은 무서웠다.

이틀 후, 서도훈과 함께 췌장공장 문합술을 복강경으로 시행했다. 간 이식 못지않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수술을 상당 시간 앞당겨 끝냈다.

이제는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호시탐탐 복강경 수술까지 노리던 서도훈이 당황할 정도였다. 하지만 김지훈이 어떤 써전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반드시 뛰어넘는다.’

이내 눈에 힘을 주며 각오를 다졌다.

덕분에 논문을 검토할 시간까지 얻은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간호사들의 활력을 분명하게 느꼈다.

수술 팀 역시 발걸음이 가벼웠다.

단지 육체적인 변화만은 아니었다.

‘왠지 병원 분위기가 더 좋아진 것 같다.’

이유가 뭐든 반가운 일이었다.

때문인지 쉽사리 진도를 내지 못했던 논문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까지 마쳤다. 앞으로 추가될 수술 건수에 맞춰 통계 등의 수치만 바꾸면 기본 틀은 다 잡은 셈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무시무시한 검수를 통과해야 하지만 말이다.

일주일이 빠르게 지났다.

약속한 대로 간호사 모집 공고가 붙었다.

고경아가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김지훈 역시 같은 입장과 시각을 가졌고, 병원의 핵심인 만큼 우수한 인재들이 지원하기를 바랐다.

“지훈 씨, 면접하실 선생님들은 정해졌어요?”

“현수가 알아서 하겠죠. 간호과에서는 부장님과 경아 씨가 주축이겠네요. 부디 잘 선발해 주세요.”

“잘못 뽑으면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건데 정말 꼼꼼하게 봐야죠. 걱정하지 마세요. 난 지훈 씨도 면접 위원이 됐으면 좋겠어요.”

순간 솔깃했다. 하지만 병원 일이란 일 모두 관여하다간 또 헐떡이게 될 것이다. 신현수의 결정을 따르는 정도로 마무리하는 것이 순리였다.

‘현수라! 느낌이 싸하네.’

어쨌든 곧 새로운 얼굴을 볼 테고,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손발을 맞춰야 할 것이다. 신입이란 존재가 거의 다 그런 법이니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고경아는 걱정이 없어 보였다.

누구보다 후배들을 잘 대해 줄 것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 문득 간호사들 사이에도 태움 문화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실제 보통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심각한 병원도 있었다.

외부 사람 눈에는 똑같이 보일 주말 집담회의 살벌함에 찬성하는 입장이라 함부로 말하기 어려웠지만, 고경아가 있는 한 불협화음은 없을 것이라 믿었다.

‘우리 마님이 어떤 사람인데 그런 문제를 일으키겠어? 어림도 없지. 어느 병원보다 분위기 좋은 병원을 만들고도 남을 사람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왜 웃어요?”

“그냥 웃음이 나네요.”

하나둘 가슴을 답답하게 했거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했던 일이 해결되고 있었다. 이제 이번 주 내에 반드시 결판을 보아야 하는 일이 남았다.

민정호와의 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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