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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25화 (1,125/1,329)

11화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모찬우가 벌떡 일어났다. 엉거주춤한 것이 여간 어색한 자세가 아니었다.

“과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별건 아닌데……. 선생님,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에게 부담 갖지 말고 준비 열심히 하라는 말은 충분히 했다.”

스승이나 제자나 전하고 싶은 말은 똑같았다. 다만 부원장이자 대가인 의사가 이제 전문의 시험을 보는 써전을 찾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스승님이 찬우를 어마어마하게 생각하시네. 경철이가 갈 때도 그렇고, 앞으로도 제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스승님이시지. 이런 자세는 반드시 배워야 돼.’

“먼저 말씀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찬우야, 네 각오 우리도 잘 알아. 최선을 다할 테니까 선생님 말씀 잊으면 안 된다.”

“감사합니다.”

“간 이식이야 다 들어왔으니까 어떤 수술인지 감 정도는 잡았을 테고, 혹시 라파로는 받았나? 내가 요새 잡다한 일이 많아 신경을 못 썼다.”

모찬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경석이 첫 복강경 수술을 주며 한 말이 떠올랐다.

‘모찬우 선생, 김 과장 부탁이 있어 라파로를 주지만, 수준이 못 미칠 경우 바로 손 바꿀 거니까 정신 바짝 차려.’

전공의 사 년 차라지만 메스를 넘기는 일이었다. 전문 병원 개원 이후 손은커녕 얼굴도 못 보았는데, 단지 부탁 하나 때문에 다른 수술도 아닌 복강경 수술을 줄 리 없었다. 이경석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인 동시에 김지훈 역시 자신에게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말이었다.

‘알게 모르게 많은 관심을 주셨는데 도리어 제가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계속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할 뿐이었다.

모찬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몇 케이스 받았습니다. 귀중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 이경석 선생님이 라파로를 주다니 손이 제법 매운 모양이다. 전문의 된 후에 또 보자.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엉덩이 붙여 봐야 이미 한 말 또 할 뿐이었다. 김지훈이 모찬우의 등 한 번 툭 때리고, 이준영 교수와 함께 숙소를 나왔다.

이준영 교수가 물었다.

“김 과장, 모찬우 어떻게 생각해?”

“아까운 써전입니다. 집담회 끝난 후 펠로우 선발 문제로 상의를 했는데 모찬우 선생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간호과와의 협상을 원만하게 마쳐 다행이야. 이참에 고경아 선생에게 회의에 임하는 자세까지 배워.”

“안 그래도 그동안 감정을 너무 개입시킨 건 아닌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일은 아니야. 잘하고 있어. 협상 준비하며 이미 펠로우 선발 계획까지 세웠다며?”

역시 민정호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알고 계셨네요. 재단에서 동의해야 하는 일이라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방해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이준영 교수가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한길로만 쭉 매진하길 바랐는데 상황이 허락하질 않는구나. 병원을 안정시키는 것이 곧 동료들과 함께하는 길이자 네 꿈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이니까, 힘들어도 이 고비를 잘 넘겼으면 한다.’

과장으로서 환자와 병원에 모두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제자가 보다 크고 넓은 시각으로 병원을 이끌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도 싶었다. 하기에 한 발 뒤로 물러나 있지만 언제나 관심은 김지훈이었다. 그것이 항상 미안하기만 한 이혁원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펠로우 선발은 상황이 달랐다.

교수 선발과 직결되는 문제기에 보다 강력한 입김과 영향력이 필요했다. 이런 때를 대비해 부원장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모찬우를 보며 전문 병원에 적합한 써전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나서야 할 때는 나서는 것이 정답이었다.

“김 과장, 펠로우 문제는 원장님과 내게 맡겨.”

“예? 재단과 직접 접촉하시겠다고요?”

“교수 자원에 관한 일이고, 충원할 수 있는 시기가 몇 달 남지 않았어. 재단만이 아니라 원장단의 승인까지 필요한 만큼 우리가 맡아야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을 거야. 모찬우 같은 써전을 놓치기도 싫고.”

웅크리고 있던 두 명의 거인이 일어섰다.

이준영 교수의 결정이라면 송재덕 교수는 당연히 두 팔 걷고 지원 사격을 할 것이다. 앞을 가로막는 난관 정도는 단숨에 넘어설 공력까지 가졌다. 전문 병원과 제자, 그리고 후배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었다.

김지훈이 훅훅! 숨을 몰아쉬었다.

“감사합니다.”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스승은 제자에게, 선배는 후배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자 힘임을 보여 준 날이었다. 하기에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는 주말 집담회의 살벌한 분위기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찬우가 복덩이인 게 맞네.’

신현수와 민정호에게 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명은 깜짝 놀라고, 남은 한 명은 무덤덤했지만 전해지는 감정은 다르지 않았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였다.

***

결전의 날이 밝았다.

서울로 출발한 김지훈이 가는 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펠로우 선발 문제를 이준영 교수가 맡기로 한 이상 당분간 행정적인 일로 골치 썩을 일이 없었다.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지금 행정부원장이 바뀐다면 진상건의 수족이든 아니든, 병원 운영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민 부원장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될 사람이다. 어떻게든 잡아야 해. 그나저나 얼굴에 철판 까는 일이 쉬울까?’

민정호를 붙잡을 방안과 진상건을 상대할 방법을 강구하는 사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신현수, 민정호와 합류한 후 한동안 대책을 숙의하고, 어깨 펴고 당당한 자세로 진상건을 만났다.

‘환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수월할 거라고? 민 부원장에게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진상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기분이 꽤 좋은 모양이었다.

신현수를 보는 눈길이 의기양양했다.

‘땅값이 더 오를 것을 알고 계약 자체를 무산시킬까 봐 걱정했는데, 제시간에 오다니 의외야.’

미련한 것인지, 그간 자투리땅이라고 가치를 무시했던 것인지 몰라도 이제야 원하는 땅을 손에 넣었다. 그만큼 전문 병원 운영이 절박하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민정호의 속은 오히려 알기 힘들었다.

분명 돌아선 것으로 보였지만 계약에 목을 매는 인간이기에 은근슬쩍 땅 얘기를 꺼내며 의도를 전했다. 내심 후회했건만 뜻밖에도 정확하게 자신의 지시를 이행했다.

화장실 갈 때 올 때가 다르다고, 교환할 토지도 아깝고 당장 지불해야 할 돈도 만만치 않았지만 몇 배가 돼 돌아올 테니 상관없었다.

‘이제 넌 쓸모가 없어. 계약서 글씨만 보는 놈에게 미련을 가져야 나만 바보가 된다.’

여기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신 이사님, 어서 오세요. 도장만 찍으면 되는 일인데 민 부원장은 왜 왔어?”

“계약서를 확인하기 위해 왔습니다.”

“김 과장님은요?”

“저도 계약 때문에 왔습니다.”

진상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김지훈을 보는 순간 뭔가 불길한 느낌에 뒷덜미가 근질근질해졌다. 신현수에게 전적으로 협조하는 데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회유가 불가능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계약 때문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진료에만 집중하는 저놈이 원하는 일은 전문 병원이 잘되는 것밖에 없을 텐데 무슨 소리야?’

초조해 보이는 쪽이 불리하기 마련이었다.

진상건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빨리 끝냅시다. 땅 교환과 동시에 지불할 차액만 정확하게 기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에는 전문가인 민정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계약서 두 장을 내밀었다.

“확인해 보시죠.”

역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꼼수를 부리지도 않았다.

신현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금싸라기 땅을 넘기려니 천불이 나겠지. 신동철 이사장도 김병오 이사 때문에 나름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 같은데 지하에서 통곡을 하겠어.’

“좋습니다. 계약합시다.”

진상건이 도장을 꺼냈다.

이로써 전문 병원 부지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남은 땅만으로도 주택 단지를 개발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직전이었다. 재단 이사들에게도 꾸준히 작업을 하고 있고, 눈에 보이지 않게 병원 사정을 악화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특단의 대책, 혹은 구조 조정이란 명목하에 신규 병원 부지를 팔게 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할 겸 겸사겸사 민정호 널 고용했는데 이렇게 끝나는구나. 한 번 배신한 놈은 또 배신하기 마련이지. 다신 상종하면 안 되는 놈이다. 새로 고용한 행정부원장은 네놈과 달라. 전문 병원은 결코 유지될 수 없어.’

진상건이 표정을 숨겼다.

계약 직전이 되니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서둘러 도장을 찍고 자리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신현수에 이어 조용히 계약서를 읽던 김지훈이 입을 열었다.

“신 교수님, 민 부원장님, 전 이 계약을 반대합니다. 우리 병원의 인사권을 온전히 인정한다는 문구가 보이질 않네요? 일부러 빼신 겁니까?”

민정호가 고개를 저었다.

“김 과장님, 말씀드린 것처럼 애초 계약하기로 했던 내용이 아닙니다. 구두에 불과하지만 이제 와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구두로 한 약속에 법적 효력이 있습니까? 더군다나 난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신 교수님, 제게도 분명 결정권이 있을 텐데요.”

신현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과 민정호는 계약 의사가 있는데 김지훈이 결사반대한다는 얼굴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신현수를 보던 진상건이 목소리를 높였다.

“재단 이사도 아닌데 결정권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일개 진료 과장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이사장님,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 병원은 재단 산하지만 형식에 불과하고, 심지어 독립채산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진료 과를 대표한 제가 운영 이사를 맡게 됐습니다. 병원 운영에 관한 일은 당연히 심사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신 교수,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신현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민정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김 과장님, 이사장님 앞에서 하기 힘든 말이지만 재정이 불안한 상태입니다. 서둘러 계약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 교수님도 큰 손해를 감수하고 병원을 위해 추진하는 일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누차 얘기했지만 행정을 책임질 부원장 임명권이 없는 상황에선 돈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우리가 직접 뽑지 않으면 어렵게 확보한 돈이 줄줄 새고도 남습니다.”

“급한 불은 꺼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 교수에게도 손해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은행을 이용할 생각은 왜 안 합니까? 대신 받는 땅의 사용료를 지급하니까 공짜도 아니고, 당장 증설할 형편도 아닌데 계약을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공적인 업무로 만나야 하는 이사장님과 사적으로 거래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정호가 눈가를 문질렀다.

“이사장님, 신 교수님과 김 과장님도 행정부원장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진상건이 눈가를 좁혔다.

상황이 묘하다 못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신현수와 민정호는 자금 수혈로 급해 보이는데 김지훈이 발목을 잡는 거야? 게다가 운영 이사라니, 전문 병원 내부 판도가 달라진 건가? 무슨 수작인지 두고 봐야겠군.’

“그렇게 해.”

“김 과장님, 아시다시피 제 후임 인선에 착수한 상태입니다. 그동안 믿음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재단 이사님들이 신중하게 면접을 진행하는 이상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민 부원장님도 같은 방식으로 선임되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재단에서 지속적인 지원을 하지 않는 한 인사 문제는 독립채산제를 택한 전문 병원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양보하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김 과장!”

“신 교수, 내가 일이 없어 따라온 게 아니야. 교환할 땅을 병원에서 사용하기로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계약과 무관한 일도 아니고, 이사장님을 만날 기회마저 없는 상황이야. 오늘 결판을 내야겠어.”

김지훈은 완강했다.

막무가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도장 찍기 직전에 벌어진 돌발적인 상황에 다소 당황했던 진상건이 눈가를 좁혔다.

“신 교수님, 김 과장님의 동의가 없으면 계약이 불가능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병원 속사정까지 말씀드릴 이유는 없겠죠?”

진상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어. 김지훈의 발언권이 너무 세. 신현수를 정점으로 한 지배 구조에 이상이 생긴 건가? 제길! 정보가 너무 부족해. 민정호 이 자식이 어디까지 숨긴 거지?’

다 된 밥에 재 뿌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김 과장님, 인사권을 달라 이 말입니까? 다른 요구 사항은 없는 겁니까?”

“예. 온전한 인사권만 주시면 됩니다. 이사장님도 빨리 동의를 하셔야 이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내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이런 문제로 땅을 포기하실 겁니까? 시간이 갈수록 신 교수도 현재 입장을 유지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말문이 막힌 진상건이 매서운 눈으로 신현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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