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24화 (1,124/1,329)

10화

신현수, 김지훈, 민정호.

간호 부장, 고경아, 중환자실 수간호사.

마치 첨예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사 협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실 의료진 대표인 김지훈의 참석이 예외일 뿐 성격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색한 눈으로 고경아를 보던 김지훈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항상 아내이자 동료로서 힘이 돼 주었던 고경아와 반대편에 앉아 근무 조건을 논의하는 날이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공적인 자리다. 주의하자.’

신현수가 말문을 열었다.

“간호과 측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듣기 전에 우리 측 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안서부터 살펴보시죠.”

간호과 대표들이 자료를 살피며 나직한 목소리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항목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검토해 제법 시간이 흘렀다.

간호 부장이 눈길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경아 선생, 시작하세요.”

모두들 다소 놀랐다.

예상을 깨고 고경아를 앞세운 까닭이었다.

“수술 방 문제가 가장 급해 제가 먼저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개별 항목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은 민 부원장님이 하실 겁니다.”

고경아가 질문을 시작했다.

수술 방, 특히 간 이식 전담 간호사 팀을 맡으며 여러 문제를 피부로 느껴 온 탓에 상당히 날카로웠다. 단지 힘들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깊은 고민이 담겨 있어 기계적인 대응을 원천봉쇄했다.

“정규 시간을 넘겨 수술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응급 수술이 발생하면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제시하신 인원이 적당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민정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떤 안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대안임을 먼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형식적인 말뿐이 아니었다.

병원 인력 현황과 업무량에 대한 평가는 물론 재정 상태까지 투명하게 공개하며 최선의 제안임을 설득력 있게 전했다. 병원 기밀일지도 모르는 사안마저 솔직하게 공개하자 간호과 대표들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전 투명함과 솔직함이 협상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상황에서는 이 방안이 최선입니다. 부족한 점이 없을 수야 없겠죠. 재정 상황이 좋아지는 대로 운영진 측에서 즉시 개선할 것이라 믿습니다.”

“믿는다니요?”

“운영진이나 교섭 상대가 항상 같은 사람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중심 주체가 바뀌지는 않으니까 전체 기조는 유지될 것입니다.”

김지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미심장한 말이 오고 갔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머릿속에만 담아 두었다.

고경아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수시로 대표들과 귓속말을 나누며 의견을 조율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 분명한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딱 부러졌고, 상당한 신중함을 유발했다.

사전 검토가 끝났다.

현실적인 면만 남았다.

신현수의 몫이었다.

“언제 충원하실 건가요?”

“합의가 되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선발 과정은 누가 담당하죠?”

“시험은 간호과에서 전적으로 주관하고, 면접은 공동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분도 동의하시는 건가요?”

김지훈과 민정호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우리도 동의합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시간을 주세요.”

간호과 대표들이 따로 모여 논의했다.

깔끔하게 동의하면 좋겠지만 이런 협상이 단번에 마무리됐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선의에 기댈 일도 아니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상당히 초조했다.

김지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고경아의 능력이 역설적인 생각을 가져왔다.

‘경아 씨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매일 밤 나보다 늦게 잘 정도로 노력하는 이상 간호과 교수가 되고도 남는데, 나 때문에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왠지 미안했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였다.

거부할 경우를 대비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는 사이 간호과 대표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힐끗 고경아와 수간호사를 보며 다시 의사를 확인한 간호 부장이 밝게 웃었다.

“정식으로 서면 작성을 해 주시면 협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본원에서도 여러 차례 경험했지만 가장 인상 깊은 자리였어요. 솔직한 태도와 투명한 공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현수가 머리를 흔들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꽤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민정호는 조용히 자료를 정리할 뿐이었다.

머리띠 두르고 싸울 수도 있는 일이 싱거울 정도로 쉽게 끝났다. 이해관계가 걸린 협상이 단 한 번의 회의로 타결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양측이 서로를 존중하고, 솔직하게 모든 정보를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 병원의 미래가 밝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민정호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간의 결과를 알리고 논의하는 한편 병원의 주역인 사인방의 생각이 필요했다.

퇴근을 서둘렀다.

“경아 씨, 오늘 일 고마워요.”

“우리의 권익만큼 병원의 안정적 운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쭉 이런 방향으로 가면 안 될까요?”

“적절한 대우와 합리적인 근무 요건을 보장한다면 싸울 일이 없겠지만, 아니라면 많이 달라지겠죠. 양보가 반드시 미덕일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김지훈이 십분 동의했다.

어느 쪽의 이해를 대변하든 다수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합리적인 자세와 행동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을 때 가장 빛날 테니 말이다.

***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일주일 중 가장 여유로운 오전 회진이 끝났다.

한 주를 정리하며 한결 가벼워 보여야 할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피곤에 절은 모찬우를 보는 눈이 심각했다. 무슨 내용인지 사인방도 합류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좋지만 무리야. 저러다 떨어지면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어. 교과서 달달 외운다고 통과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이경석 선생님, 부탁드린 일은?”

“잘 해결했어.”

“감사합니다. 찬우를 보고 있으면 적극적이긴 해도 선배를 상당히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사장을 찾아갔다니 희한하네요. 어디서 그런 깡이 나왔지?”

손일석이 웃었다.

“찬우 말대로 열정 때문이겠지. 전주에 킵을 자청해서 시켰더니, 밤새 환자 보며 시험 준비를 하더라고.”

“킵을 하면서? 환자에게 집중이 되나?”

“미진한 점이 있으면 된통 혼내려고 했는데 환자 하나는 깔끔하게 보더라. 평소 태도를 보면 이사장하고 뭔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게 미안할 정도야. 저런 놈이 펠로우를 원하는데 확신을 주지 못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네.”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이대로만 간다면 펠로우는 물론 교수 자격까지 충분하다는 말이 오갔다. 다들 불확실한 펠로우 선발에 안타까움을 표현하자 이준영 교수의 눈이 빛났다.

어느새 일주일간 고대해 온 화려한 불꽃 쇼, 주말 집담회를 시작할 시간이 됐다. 언제든 목표가 될 수 있는 서도진 이하 전 의국원이 긴장된 눈으로 지난 일주일간 참가한 수술을 검토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찬우의 참석 때문이었다.

이십 대 후반이나 삼십 대 초반이라 해도 의사 사회에서는 귀염받는 전공의에 불과했다. 더구나 간 이식과 복강경을 배우고 싶어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도 파견 근무를 자청한 써전이었다.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 휘하 모든 써전이 시험 준비를 도와줄 의무까지 있었다.

“모찬우 선생, 간암 수술 시 주의해야 할 점이 뭐지? 절제 범위를 정할 때 해부학적 구조가 무척 중요한데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돼?”

“담낭 병변에서 일반 질환이라도 라파로를 피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엇 무엇이 있지?”

개별 수술의 특수성이 아니라 시험에 나올 만한 질문이 연이어졌다. 기초적인 부분에서 점점 어려운 부분으로 이어지자,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모찬우도 버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운 놈에게도 떡 하나 준다는 말이 있는데 하물며 대견한 전공의였다. 또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과라면 응당 그 이상의 것을 주어야 한다. 바로 적절한 긴장과 자세, 치료 질환에 대한 지식이었다.

물론 형식은 다소 다르지만 말이다.

이준영 교수의 눈길이 뜨거워졌다.

“전문의 시험은 의사 국가고시가 아니야. 군대 다녀왔으면 곧바로 개업하거나 집도의로서 수술해야 하는데, 이런 수준으로 가능하겠어?”

스승들에게 이런 중차대한 일을 모두 맡길 사인방이 아니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기름을 붓고, 손일석과 이경석이 부채질을 했다.

전공의 사 년 차가 활활 타올랐다.

마침내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김 과장, 대책이 필요해. 대책이. 이러다 전문의 시험 재수할까 봐 겁난다. 겁나.”

“예. 역시 일과 시험 준비는 병행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모찬우 선생, 앞으로 시험 준비에만 집중해. 수술 참여는 시험에 관계된 경우에 한해 선생님들과 상의해 결정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선생님! 할 수 있습니다.”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야. 협의할 문제가 아니니까 지시를 따라.”

단호하다 못해 매몰차게 들리는 김지훈의 말에 모찬우가 입을 열지 못했다. 비상한 각오와 열정으로 도전한 일이 결국 개인적 욕심에 불과한 일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전문 병원에 폐만 끼친 꼴이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몸으로 해야 하는 일까지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인원이 부족한데 일할 전공의마저 없어지게 돼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가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탓이니까, 그런 생각 할 것 없어.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준비해. 인연 되면 전문의 된 후 또 볼 수 있을 거야.”

모찬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펠로우를 뽑습니까?”

“우리도 간절히 바라고 있어.”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가능성을 보았는지 모찬우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녹록지 않은 현실을 알고 있는 김지훈으로서는 입맛이 쓴 일이었다.

‘재단이 문제야. 재단이.’

진상건에게 강한 적대감마저 느껴졌다.

여느 때와는 다른 주말 집담회가 끝났다.

다들 미안한 마음에 어깨를 펴지 못하는 모찬우에게 격려의 미소를 보냈다. 결과를 떠나 열정을 가진 후배에 대한 응원이자 존중이었다.

즉시 사인방이 모였다.

그간의 논의와 간호과와의 협상 결과까지 모두 공유했다. 손일석과 이경석이 수고했다는 인사와 함께 하루 앞으로 다가온 진상건과의 담판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양측이 모두 만족할 만한 거래인 상태에서 한 가지 조건을 더 건다고? 진상건의 애초 의도를 생각하면 쉽지 않을 것 같다.”

“경석이 형, 난 거꾸로 생각해요. 우리 김 과장이 그런 일 쪽으로는 어수룩한 면이 있어 보이는 게 도리어 강점이 될 겁니다. 그냥 강단 있게 조건 안 받아들이면 계약이고 뭐고 없다고 고집을 피우면 진상건도 답답할 겁니다.”

“그런가?”

“대신 제시할 게 없잖아요. 돈을 좋아하길 해, 자리에 욕심이 있길 해. 양주 좋아하면 술이라도 거하게 사겠지만 소주가 제일인 줄 알지. 환자 말고는 관심사가 없잖아요. 얘기하고 보니까 꽤 불쌍한 인생이네.”

김지훈이 손일석을 째려보았다.

“누가 불쌍해? 나 잘 살고 있어.”

“맞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 하여튼 내가 볼 땐 누구보다 적임자야. 민정호가 남아 있기를 바라잖아? 김 과장은 그냥 원하는 것만 말하고, 주장하면 돼.”

“알았어. 너 때문인지 몰라도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되네. 기분이 좋지는 않다.”

“뒤끝 좋지 않아. 그리고 간호사 충원이 결정됐는데 펠로우도 선발해야지? 찬우를 보니까 자칫 우리 병원에 꼭 필요한 써전들을 놓칠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할 정도야. 후배 키우는 맛도 이제 막 알아 가는 것 같고. 신 교수, 진상건과 한 번 더 부딪쳐야겠어.”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안 그래도 다음 달 내로 김 과장과 함께 재단 이사들을 만나 결판을 지을 생각이야.”

“나도?”

“펠로우 뽑는 일인데 과장이 참석해야지 누가 참석해? 민 부원장이 작성한 자료를 토대로 하면 근거는 충분해. 어쩌면 진상건도 운영비 많이 든다고 순순히 동의할지도 몰라.”

이경석이 고개를 저었다.

“신 교수, 어수룩하게 생각하다 큰코다친다. 내일도, 다음에도 진상건을 만날 때는 치밀하고 또 치밀하게 준비해야 돼. 김 과장도 잘 알지?”

“그럼요. 돈만 많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요?”

“적절한 여유도 필요해. 다만 머리는 차갑게, 몸은 뜨겁게 해야 목적을 이룰 수 있단 말이잖아.”

“옳으신 말씀! 다음 과장을 경석이 형으로!”

손일석의 말에 김지훈이 좋다고 박수를 쳤다.

과도한 긴장이나 불안을 잘 깎아 주는 손일석이 아니었으면 이런 자리를 가질 때마다 매번 힘들었을 것이다. 회의, 논의, 상의, 협상까지 정말 의사인지, 일반 직원인지 모를 나날이었으니 과언이 아니었다. 열심히 참석하지만 확실히 천성은 아니었고, 환자에 대한 미안함까지 느끼는 판이었다.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회진까지 마친 김지훈이 퇴근 준비를 하다 말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방 하나뿐인 전공의 숙소로 향했다.

똑똑똑!

“누구세요?”

모찬우의 목소리에 문을 열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의사 한 명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이준영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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