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김지훈이 먼저 물었다.
“민 부원장님, 내가 보기에도 상당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몇 명이나 충원해야 할지 윤곽은 잡혔습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심각하더군요. 간호과에서 정식으로 요청할 만한 사안이었습니다. 일단 현재 수술을 유지할 경우와 함께 앞으로 늘어날 간 이식 수술과 다른 수술에 대비한 필요 인원과 예산을 뽑았습니다. 아울러 수술 팀 확보까지 계획을 세워 봤습니다.”
민정호가 몇 가지 경우를 가정하고 작성한 자료를 내밀었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무엇보다 의사 충원까지 제시해 김지훈이 살짝 놀라고 말았다.
“수술 팀까지요?”
“현재도 대략 삼 개월 후에나 간 이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준영 선생님 수술도 상당히 밀려 있고요. 그렇다고 병원 능력에 맞춰 무작정 예약 기간을 뒤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결국 환자를 빼앗기게 될 테고, 재정이 더 어려워질 공산이 큽니다. 그 전에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질적으로도 최고의 치료를 모두 제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지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민정호는 자신의 기본 업무인 재정을 우선순위에 두면서도 병원 종사자답게 환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불현듯 계약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발등의 불도 끄기 전에 미래를 제시해? 게다가 대부분 시한이 넘어간 후에나 추진할 수 있는 일이잖아. 감이 안 좋네.’
민정호는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관건은 결국 돈입니다. 신현수 선생님, 서울에서의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장은 병원 발전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돈이 꼭 재단 손에만 있는 것은 아니죠.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겁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협상을 잘 끝내는 일만 남았군요. 누가 주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런 성격의 협상을 해 본 적이 없는 김지훈과 신현수였다. 더구나 이젠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민정호였다. 당연히 두 사람의 눈길이 꽂혔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수술 팀 확보와 미래에 대한 대비는 협상이 타결되는 즉시 논의됐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민정호가 휙 사라졌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사천리로 진행된 상황에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이 자리에 없었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현수야, 이미 다 결정한 것 같은데 난 왜 불렀어?”
“너도 진행 상황을 알아야지. 민 부원장은 내일 협상 준비로 많이 바쁠 테고, 궁금한 점이 많을 텐데 지금부터 나하고 차근차근 상의하자.”
왠지 얼굴이 복잡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필요한 재원을 조달했는지 궁금한 참이었다. 민정호가 시한이 지난 후의 일까지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에 담긴 의미도 지나칠 수 없었다.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어? 설마 사비를 털어 넣는 건 아니지? 병원에 대한 투자도 좋지만 개인의 희생을 발판으로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신현수가 돌연 웃었다.
“사비라면 사비지만 진상건에게 돈을 받기로 했어.”
“네 입으로 재단 자금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무슨 소리야? 진상건이 내놨으면 그 돈이 그 돈 아니야?”
신현수가 창밖을 가리켰다.
“원래 종합 병원이 들어섰어야 할 저 땅 보이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부지의 대여섯 배는 되는 데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요지 중의 요지로 변했어. 땅값이 엄청나게 올랐더라고.”
“그래서?”
“아버님이 선견지명이 있으셨던지 저 땅 중 일부를 내게 남기셨어. 애초 병원 부지로 구입한 거라 별 신경을 안 썼는데 길가에 딱 붙은 땅이더라. 전체적으로 보면 면적은 얼마 안 되지만 진출로로 꼭 필요한 땅이라 그런지 액수가 상당해.”
“뭐? 그래서 그 땅을 판 거야?”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우리 병원하고 맞붙은 땅과 바꾸기로 했어. 면적이 더 넓어졌고, 당연히 차액도 받기로 했지. 새로 확보한 땅은 병원을 확장할 때 구입하거나 임대 형식으로 사용하기로 했으니까, 꼭 사비를 들였다고 보기는 힘들지.”
“누구 생각이야?”
“민 부원장이 땅 소유를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제안을 했어. 내가 허술한 건지 몰라도 참 치밀한 사람이야. 덕분에 진상건 얼굴을 내리 사흘이나 봤네.”
‘그래서 칼퇴근을 했구나. 하지만 이게 현수도 그렇고 병원에 득인가?’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진상건이 선뜻 동의를 했다는 말은 그만큼 이득이 크다는 거 아니야? 병원 부지 전용을 막기 위해서는 길가의 땅을 주면 안 되잖아?”
“알박기도 생각은 했는데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땅은 병원 부지로 남겨 놓을 거야. 만일 허튼 짓을 한다면 동의한 이사들 모두 배임이나 횡령으로 고소할 생각도 있어. 진상건이 분명 이권을 줬을 테니까 승산이 없지 않아.”
“그것도 민 부원장 생각이야?”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야.”
강한 긍정이었다.
땅 교환 형식의 재원 조달이 어떤 영향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지만 김지훈도 당장은 최선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러나 마냥 한숨 돌릴 일이 아니었다.
“현수야, 얼마 전 민 부원장이 계약이 파기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너도 알고 있지?”
“들었어.”
“독립채산제를 관철시키면서 양보한 것이 행정부원장 자리잖아. 진상건이 다른 사람을 병원에 꽂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돼. 아니, 민 부원장을 반드시 우리가 잡아야 돼.”
“나도 그 문제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 땅 교환이 진상건의 이해와 맞아떨어졌다고 해도 최종 목표는 우리 병원이야. 민 부원장과 계약을 연장할 리가 없겠지.”
“계약만 하면 절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사람인데 방법이 없을까? 솔직히 인간적으로도 민 부원장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
“바늘 하나 안 들어갈 정도로 냉정하고, 사무적인 사람인데 인간적으로도 마음에 들어?”
“깔끔하잖아.”
민정호의 존재를 톡톡히 인정했지만 계약서를 쥐고 있는 사람은 진상건이었다. 재정 담당자 임명 권한을 넘긴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될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이 오면 문제가 되겠지?”
“능력이나 의도만 문제가 아니야. 오늘 자료를 보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바를 상당 부분 동의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게다가 누구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라, 어떤 자리에 있든 관성으로 근무할 사람이 아니야.”
신현수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손일석 이상으로 친화력을 알아주지만 허용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사람에게는 일말의 동정조차 보이지 않는 김지훈이었다.
오히려 함께 근무했던 의사를 발 벗고 쫓아냈다. 그런 김지훈이 강한 아쉬움을 버리지 못한다면 민정호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새삼 거론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김지훈이 무심코 물었다.
“도장은 찍은 거야? 시간을 줬다간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인간이야. 하나라도 확실하게 마무리해야지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진상건? 아직 안 찍었어. 우리도 급할 것이 없다는 인상을 줘야 오히려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고, 민 부원장이 주말에 정식 계약을 하자고 그러더라.”
“그런 면이 있네.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확실히 우리하고는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개념이 달라. 민 부원장도 그 자리에 참석해?”
“얼굴만으로는 속을 알기 힘들지만 곤란해하는 눈치도 안 보였어. 진상건과 완전히 등 돌렸다는 말이지.”
점점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세상 참 희한해. 처음에는 믿을 구석이 없어 보였는데 이젠 누구보다 믿을 만하네. 진상건을 보는 시각이 어떤지 몰라도 정말 함께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나?’
이마를 문지르며 눈가를 찌푸리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가를 좁혔다.
“현수야, 길가의 땅 말이야. 그 땅 없으면 아파트를 짓든, 뭘 하든 상당한 문제가 되겠지? 대로와 연결되는 출입구가 있어야 하잖아.”
“우리야 기존 진출로가 있으니까 상관없지만, 맹지 꼴이 되면 허가도 안 날걸?”
“오케이! 조건 하나 더 달자.”
“조건?”
난데없는 소리에 갸우뚱거리던 신현수의 눈이 반짝였다. 행정적인 경험이 훨씬 많은 데다 민정호 얘기가 나온 이상 김지훈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 행정부원장 임명권까지?”
“그렇지. 아파트 단지 하나 만들면 어마어마하게 돈을 번다는데 진상건도 고민하지 않겠어? 최악의 경우 우리 병원은 포기해도 되고 말이야.”
신현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쩌면 우리 병원을 망하게 하려는 이유 중에 아버님이 남기신 땅도 들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팔 리는 없으니까 병원만 없어지면 부지도 더 커지고, 필요한 진출로를 만드는 일까지 다 해결되는 거잖아.”
“밀어붙이자. 밑져야 본전 아니야?”
“좋았어. 그런데 진상건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추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나는 넘었는데 또 난관이 나타났다.
돈에 민감하고, 재단을 장악할 정도로 힘을 갖춘 사람이 민정호의 능력까지 잘 알고 있는 이상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도 남았다. 어쩌면 처음으로 잡은 대등한 힘이 또다시 기울어질 수도 있었다. 이왕이면 완벽한 조건을 갖춰야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고민 또 고민!
오만상을 다 쓰던 신현수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묘한 시선으로 김지훈을 보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아, 네가 우리 병원 이사가 돼야겠다.”
“이사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독립채산제니까 우리 병원 자체 운영진이 있다고 해도 반박하거나 확인할 도리가 없겠지? 실제로도 별반 다를 바가 없고. 네가 함께 가서 행정부원장 임명권을 주지 않으면 계약 자체를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거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내가 무슨 있지도 않은 이사 행세를 해?”
“똥줄이 탄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진상건이야. 솔직히 우리는 대출로 운영비를 조달할 수 있지만 진상건에게 걸린 이권은 천문학적일 수도 있어. 게다가 진상건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한 적이 있으니까, 네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알고도 남지 않겠어?”
김지훈이 고민에 빠졌다.
예전이었으면 거짓이란 사실 자체로 펄쩍 뛰었을 테지만, 그간 못 볼 꼴 많이 봤다. 특히 힘이 없어 한일 뿐 진씨 일가의 전횡과 불법은 반드시 응징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병원을 위한 길이었다.
‘후우! 별의별 일이 다 생기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고, 나만 얼굴에 철판 깔면 민 부원장을 잡을 수도 있는데 마다할 일인가?’
결정을 내렸다.
“알았어. 단, 진상건이 버틸 때만 나서는 거다. 계약은 민 부원장과 함께 둘이 결정하고, 마무리해야 돼.”
“김 과장, 이왕 가진 관심이고, 발까지 흠뻑 젖었어. 다른 사람 눈에도 단순한 진료 과장으로 보이지 않을 거야. 나도 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일석이에겐 말하지 마. 약해 보이는 건 너 하나로 충분해.”
김지훈이 순간 말을 잃었다.
병원 사정이 최악일 때에도 내색하지 않으며 꿋꿋하게 헤쳐 나갈 길을 모색한 신현수였다. 자존심까지 강한 신현수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을 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야 알았다.
‘이래서야 친구라고 할 수 있나?’
미안하다는 말이 왠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힘이 되는 한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입장이 다르다는 점 또한 잊지 않았다.
“알았어. 열심히 할게. 하지만 과장일 때까지야. 다음에 누가 과장이 되든 상의할 사람은 김지훈이 아니라 과장이 돼야 돼. 진료에 충실한 것이 정말 돕는 거 아니야?”
신현수가 묘하게 웃기만 했다.
‘과장만 자리가 아니다.’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마지막 남은 일은 민정호가 전문 병원과 새로운 계약을 할 의사가 있는지였다. 마음이 아무리 굴뚝이어도 당사자가 싫다면 도로 나무아미타불이었다.
“현수야, 민 부원장에겐 언제 말하지? 싫다고 할 수도 있는데 우리도 제시해야 할 것이 있어야 되지 않아? 향후 계획까지 세운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애착이 있어 남기를 원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깔끔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수순일 수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깨끗하길 기대했건만 이 꼴 저 꼴 다 봐야 하는 병원 상황에 환멸을 느낄지도 몰랐다.
“복잡하네. 내일 협상 끝나고 얘기하자.”
“진상건이 확실히 계약을 파기하겠지?”
“사람 욕심 끝이 없는 법이야. 땅 교환으로 절대 만족할 진상건이 아니지. 어떻게든 우리 병원을 망하게 하려면 눈엣가시가 된 민 부원장을 쫓아내야 하지 않겠어?”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다소 황당한 방법이었지만 이사 자리 하나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면 형식적으로라도 소액을 출자해 진짜 이사가 되는 방안도 있었다.
여하튼 작전 짰다.
실행하는 일만 남았다.
새로운 자금 수혈이 구부 능선을 넘었고, 민정호를 붙잡을 방법도 강구한 이상 간호과와의 협상도 한결 마음 편하게 임할 수 있을 것이다.
논의를 끝낸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신현수-민정호-의료진 대표.
전문 병원을 끌어 갈 삼두마차였다.
간호과와의 중대한 협상도 하루 남았다.
행정직을 포함해 의사 이외의 직군이 이렇게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그들 모두 병원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정호의 수락이 남았지만 완성되는 순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도 남았다.
다음 날 저녁.
협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