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22화 (1,122/1,329)

8화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김지훈 선생, 오래간만이야. 아무리 바빠도 얼굴은 보고 살자. 사람 참 무심해.”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형식이라도 학회 임원 중 한 명이었다.

예상과 달리 직접적으로 업무를 볼 일이 없는 학술 이사이긴 했지만, 얼굴 한번 비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만 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참 일할 때 시간 내기 쉬운가? 우리도 다 그랬어. 하여튼 지금 보자고 한 이유는 앞으로 논문 심사 위원을 겸했으면 해서야. 상당히 빠르긴 하지만 논문 실적도 충분하고, 평판도 좋아 결격 사유를 찾을 수가 없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동의합니다. 김지훈 선생만 동의하면 돼.”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논문 심사 위원은 학술 이사와는 완전히 다른 직함이었다. 일정 수당을 받는 것은 둘째 치고, 다른 의사의 논문 통과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기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각 병원의 수많은 의사들의 최신 연구와 동향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만큼 많이 배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문제는 자격이었다.

“제가 그런 자리를 맡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누구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네. 이준영 선생님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결정한 거니까 걱정하지 마. 자네 같은 사람이 본격적으로 학회 업무를 맡아야 발전할 수 있지 않겠어?”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나도 인정한다. 실력과 노력을 모두 갖춘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만 잊지 마.”

훅! 가쁜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내세울 경력이라고는 과장이라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일개 병원의 과장은 내부 구성원의 인정에 불과했다. 일 열심히 하고, 두루두루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 언젠가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일부 특출 난 의사들이 빠르게 과장이 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경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과장이 된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면에서 전문 병원과 김지훈은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도 있었다.

반면 논문 심사와 통과는 의사들의 명성과 명예가 달려 있어 첨예한 이해관계가 달린 일이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학회 임원들은 물론 그들과 관련된 많은 의사들도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학회 논문 심사 위원이 된다는 것은 의료계 전체가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었다.

결정타 하나가 더 날아들었다.

“전문의 시험에 논문 심사와 면접이 있는 거 알지? 당연히 따라붙는 일이니까 미리 알아 둬.”

의사가 의사를 평가해야 한다.

젊은 나이에 얻기 힘든 엄청난 명예였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에 김지훈이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자리가 주는 막중한 의미와 책임을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영 교수는 말이 없었다.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눈빛만 보였다.

절대 사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사전에 충분히 논의한 후 가타부타 말이 없도록 짧은 점심시간을 택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단순한 학회 업무가 아니라 논문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자리다. 어쩌면 모든 분들이 날 인정해 대가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지도 모른다. 거절은 예의가 아니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도 잘 부탁해.”

과장이 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나의 병원이 아니라 전체 의료계 내에서의 활동 범위가 크게 확장됐다. 김지훈이란 이름을 보다 많은 사람이 알게 될 테고, 뒤따를 영향력은 비교조차 힘들 것이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훅훅 달아올랐다.

‘권한과 발언권이 강해졌다는 생각은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 이 또한 배움의 길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한 기회라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머릿속까지 복잡해져 남은 학회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저녁 식사 시간이 돼서야 안정을 찾았다.

S 병원 외과가 정말 오래간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궁금한 것이 참 많을 텐데 이혁민 교수가 대뜸 점심때 있었던 일을 물었다.

“김 과장, 얘기는 잘됐나?”

“예? 예. 하기로 했습니다.”

“잘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동의했으니까 열심히 해라. 일이 많아서 그렇지 논문 심사가 의외로 큰 도움이 된다. 다른 교수들도 곧 기회가 올 테니까 노력하자.”

너털웃음이 터졌다.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야. 아직도 병원이 어려워서 그런지 더 기쁘다. 기뻐. 이 교수, 지훈이가 한 단계 또 올라섰는데 웃자. 웃어. 웃으면 어디 덧나니? 경석아, 다음엔 네 차례다. 내가 팍팍 밀어주마. 팍팍. 현수하고 일석이도 머지않았다. 좋다. 좋아.”

이름을 부르다니 정말 기쁜 모양이었다.

사인방은 물론 후배들 모두 축하하면서도 복잡한 눈빛을 보였다. 라이벌 혹은 롤 모델인 김지훈이 한 발 훌쩍 나갔다는 사실에 강력한 자극을 받고 있었다.

모찬우만 예외였다.

“과장님, 그러면 제 논문도 심사하시겠네요?”

“같은 병원 소속은 다른 병원 선생님이 심사하겠지. 만일 내가 한다면 더 빡빡하게 볼 거야.”

“어후! 이미 제출했는데 어떻게 하죠?”

손일석이 기분 좋게 웃었다.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김 과장 스타일 몰라? 대충 썼으면 재수해야지. 이러다 전문의 시험 떨어지는 놈을 보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모찬우가 자라목을 했다.

“살려 주십시오.”

논문과 면접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100퍼센트 합격을 보장하는 시험이 아니었다. 엄살이겠지만 김지훈이 개인적 인연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풀렸다.

가벼운 술 몇 잔이 돌았다.

화기애애하게 근황을 주고받는 시간도 잠시, 슬슬 병원 이야기, 특히 진상건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전문 병원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서울 병원 역시 은연중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박 과장, 서울 병원은 어때? 괜찮지?”

“병원 전체 환자 수와 수술 건수는 큰 변동이 없습니다만,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직원 복지나 근무 환경 개선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사장만 바뀐 꼴인데 왜 그래? 왜?”

“재단 내부 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저보다 신현수 선생이 더 잘 알겠죠.”

“저도 잘 모릅니다.”

현재 서울 병원 외과 교수 중 가장 발이 넓은 이혁민 교수는 말이 없었다. 신중한 사람이 있는 반면 주머니 속 송곳은 상황이 변해도 뾰족하기 마련이었다.

“송재덕 선생님, 원장단부터 이사장 비위 맞추기 급급한데 일할 맛이 나겠습니까? 그간 의료직 중 간호사 퇴직이 가장 많긴 했지만 이젠 눈에 보일 지경입니다. 처우 개선도 안 되는데 간호 부장은 뭐에 홀렸는지 내부 문제에 아예 관심이 없어요. 이러다 의사들까지 나갈 판입니다.”

“각 과 과장들이 힘을 합치면 좋아지지 않을까?”

“가랑비에 옷 젖고 있습니다. 의욕이 있어야 뭘 하든 하죠. 건의 사항을 수용하지 못하면 이유라도 알려 줘야 하는데 묵살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박 과장이 보기에도 그래?”

한숨만 쉬었다.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병원이 한두 사람의 전횡 때문에 무너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깨듯 문제가 누적되면 결국 큰 사달이 날 것이다.

독립채산제 덕에 소나기를 피할 수 있다 해도 결국은 한 식구이자 서울 병원은 산하 병원의 핵심이었다. 다들 침울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괴로울 신현수는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오늘 같은 날까지 이럴 수는 없지.’

김지훈이 화제를 돌렸다.

“이혁민 선생님, 한 잔 따르겠습니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여긴 신현수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전공의 시절부터 특별한 관계를 쌓은 이혁민 교수는 영원한 스승이기도 했다.

“제 잔부터 받으시죠.”

“그럴까? 신현수 선생 술부터 받자.”

“선생님들이 계시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신기동 선생님, 일석이 발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간 이식을 홀라당 뺏길까 봐 김 과장이 불안해 죽겠답니다.”

“긴장해야 할 거다.”

손일석이 휘리릭 달려와 옆에 앉았다.

“선생님, 김 과장 술보다 제 술이 백배 맛있습니다. 제 술 받으시죠. 고기는 미디엄을 좋아하시니까 이걸로 드시죠. 역시 핑크빛이 돌아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돼지갈비 아니야?”

“아! 돼지였군요. 소처럼 맛있어서 착각했습니다. 바짝 구운 걸로 대령하겠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 울적했을 스승들이었다. 나이를 잊고 마치 전공의 때처럼 옆에 붙어 술을 따르며 아부를 떨자 큰 웃음을 터트렸다.

송재덕 교수와 이경석도 이야기꽃을 피웠다.

매일 얼굴 보는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너털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후배 사인방과 펠로우들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불콰해진 얼굴로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모찬우, 니는 할 만하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전문의 시험 떨어지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각오 단단히 해라. 이준영 선생님, 모찬우 저노마 놓치기 참 아까운데 펠로우 뽑을 방도가 없을까요?”

어느 틈엔가 구석으로 몰린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이 모처럼 말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확정된 일을 두고도 말을 아끼는 이준영 교수였다.

“한잔하자.”

쨍!

건배 한 번으로 끝났다.

김지훈도 조용히 스승의 속도에 맞췄다.

묵묵히 의국원들의 말을 듣는 모습에 스승은 듬직해했고, 제자는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때론 열 마디 말보다 침묵이 즐거운 때도 있는 모양이었다.

“국제 학회만 남았네.”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말에 김지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생각해 보니 간호과와의 합의까지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았다.

‘아! 환자에게만 집중하고 살고 싶은데 세상이 날 가만히 두질 않네.’

어느 일요일 저녁.

전문 병원의 위상을 알린 날이 그렇게 저물었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예정된 간 이식 수술을 마치고 나온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환자가 깨어나지도 못했는데 벌써 오후 여덟 시였다.

수술 팀의 피로가 눈에 보였다.

수술 방과 마취과 간호사들 역시 교대를 했다고는 하지만 이제야 수술실 정리를 마쳤을 것이다. 한숨 돌리기도 전에 응급 수술이 떠 정말 힘들다는 말만 나올 상황이었다.

‘오로지 간 이식 수술만 해도 힘들 판인데, 다른 수술까지 해야 하는 이상 수술 팀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간 이식은 한 주에 하나뿐이다.’

결국 김지훈과 손일석의 팀만 있는 경우, 한 주에 두 개가 한계라는 말이었다. 예정대로 수술 팀이 늘게 된다면 일일 삼교대를 보장해야 하는 간호과 상황은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도 인력 충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절대적이었다.

한밤에 퇴근했다.

“경아 씨, 현재 수술 건수가 유지된다는 가정하에 추가로 필요한 간호사가 몇 명이나 되죠?”

“메이저 수술이 워낙 많아서 수술마다 주어지는 업무량이 상당히 과중해요. 안정적으로 돌아가려면 한 자릿수 충원으로는 안 돼요.”

“간 이식 수술까지 늘면 정말 많이 필요하겠네요. 그렇게 되면 중환자실도 충원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신현수 선생님과 민 부원장님이 잘 상의해 결정하시겠죠. 지훈 씨 입장이 곤란할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진료 부분의 책임자잖아요. 국제 학회 준비에만 집중해요.”

“그동안 발을 담근 일이 많아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네요. 무척 신경이 쓰여요. 학회 일하고 전문의 논문 심사까지 겹치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어요.”

고경아가 어깨를 감쌌다.

“미안해요.”

“미안한 일이 아니죠. 큰 스승님이나 스승님께서 존경을 받는 이유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행정적인 일도 모자라 내 수술에만 신경 쓰느라 간호사 선생들 처우나 근무 환경을 지나친 내 잘못이죠.”

“지금까지 잘해 왔으면서 무슨 소리예요? 지훈 씨에게 결정해 달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우리도 무작정 편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고요. 합리적인 결과만 얻을 수 있으면 돼요.”

“그 말이 맞는데 병원 재정도 그렇고, 현수에게 최종 권한이 있다고 하지만 모든 일을 떠맡기려 하는 것 같아서 개운치가 않네요.”

전문 병원 설립을 주장하고, 이뤄 낸 사람이 원죄였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고비는 없는 법이었다. 하나의 산을 넘고 넘다 보면 결국 평지가 나올 것이다.

돌연 고경아가 활짝 웃었다.

“복잡한 얘기는 그만해요. 난 우리 남편이 잘나서 참 좋아요. 학회 논문 심사 위원이 될 정도로 많은 의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요. 지훈 씨, 힘내요. 나도 힘낼게요.”

김지훈도 웃었다.

“나도 우리 마님이 자랑스럽습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 미묘한 견해 차이를 드러냈지만 부부로서 상의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큰 힘이 되고도 남았다. 사실 서로 언성을 높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기만을 바랐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오늘도 바쁜 시간이 흘렀다.

일과가 끝날 무렵 간호과와의 협의가 금요일 저녁으로 잡혔다는 연락을 받았다. 촉박한 시한에 가장 마음이 급할 신현수는 무슨 일인지 퇴근하기 바빴고, 민정호 역시 얼굴 보기 힘들었다. 간간이 수술 방에서 간호 부장과 상의하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목요일이 돼서야 한자리에 모였다.

‘야! 둘이 알아서 하니까 좋긴 한데 미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니까 생각보다 훨씬 갑갑하네.’

상반된 감정에 입맛을 다신 김지훈이 활짝 귀를 열었다.

잘 해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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