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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21화 (1,121/1,329)

7화

고경아는 전문 병원의 간호사, 특히 수술 방 간호사들의 의사를 확고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아내나 엄마가 아닌 당당한 직장인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한때 의사 중심으로 병원이 돌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면이 강하지만 의료진에는 다양한 직종이 있고, 저마다 필수불가결한 영역을 담당하고 있는 이상 올바른 방향이라 할 수 없었다.

모두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그 선봉에 고경아가 섰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동의할 수 없겠지만 왠지 뿌듯했다. 본의 아니게 운영에 참가하고 있는 입장에서 봐도 멋지고 당당한 의료인이자 직장인이 분명했다.

남몰래 웃던 김지훈이 돌연 눈을 치켜떴다.

‘그런데 난 왜?’

신현수가 함께 논의할 사람으로 자신을 호명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넓게 보면 의료 행위와 관련이 있지만 결국 운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스승처럼 진료에만 매진하고 싶은 김지훈이었다. 당분간 피치 못한다 해도 안정적인 경영 환경이 조성되면 즉각 발을 뺄 생각이었다. 민정호가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몰랐다.

슬며시 운을 뗐다.

“신현수 선생님, 인력에 관한 문제는…….”

“김 과장님, 함께 상의할 문제입니다. 제가 사전 조사를 하고, 다음 주 내로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현수도 모자라 민정호까지?

“민 부원장님, 난 진료 과장입니다.”

“고경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과장님도 이해 당사자입니다. 수술 팀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확한 답이 나오겠습니까?”

신현수가 고개를 수없이 끄덕였다.

무척 긍정적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완전히 목줄 잡혔다.

왜 일이 끊이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좋은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간호부장과 고경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중한 인사가 오가는 가운데 김지훈이 힐끗 곁눈질을 했다. 고경아가 침착한 표정으로 잘 부탁한다는 듯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퇴근하는 내내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며 웃다 찡그리기를 반복했다. 한 과의 책임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은 배워 마땅했지만, 그 탓에 행정적인 일을 또 맡게 된 것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경아가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어요?”

“남편 사정 좀 봐주면 안 돼요? 미리 상의했으면 난 적당히 지원하는 것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현수하고 민 부원장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일만 늘었네.”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민 부원장님과 상의하면서 마음이 바뀌었어요. 전문 병원은 확실히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누구보다 가장 합리적인 대처 방안을 낼 거잖아요.”

‘미리 상의했을 줄 알았어. 민 부원장은 환자 많이 봐야 한다고 성화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요? 민 부원장이 뭐라고 했는지 몰라도, 내 파트 끌어 나가는 일만도 벅찬 거 몰라요?”

“간 이식 수술 제대로 끌어 나가려면 우리 간호과 협조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 잘 알죠? 나는 수술 방을 대표해 최선을 다하고, 지훈 씨는 외과 입장을 최대한 관철시키면 결국 모두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겠어요?”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반박할 수 없는 논리였다.

“그건 그런데 인력을 충원하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재정 형편을 빤히 알고 있는 내가 현수를 어떻게 밀어붙여요? 빚을 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난 지훈 씨를 믿어요. 꼭 돈이 아니더라도 신현수 선생님의 능력을 믿고요. 재단 이사 아무나 하는 건가?”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행정적인 문제에 눈을 뜨고 있듯, 오랜 기간 재단 이사를 역임한 신현수 역시 김지훈이 보지 못한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일단 머리를 맞대는 수밖에 없었다.

“에휴! 학회도 걱정이네.”

“국제 학회지에 게재하는 일 때문에 더 힘들죠? 나도 다음 달에 열리는 간호 학회에 발표가 잡혀서 떨리지만 다 잘될 거예요.”

“어어? 발표를 하신다고요?”

“네.”

“마님, 감축드립니다. 그동안 잠을 잊고 고생하신 보람이 있군요. 와아! 대단해. 간호과 교수 문제만 풀리면 바랄 게 없네요.”

“그렇게 좋아요?”

“내 발표보다 훨씬 기분 좋네요.”

우습게도 고경아의 발표 하나로 모든 걱정과 갑갑함이 사라졌다. 각자 자신의 일과 가정에 최선을 다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손을 꼭 잡았다.

간만에 엄마, 아빠가 동시에 퇴근하자 고경희와 기다리고 있던 희연이가 난리 났다. 마침 손일석도 동시에 도착해 함께 식사를 했다.

“미리 충원이 되면 제일 좋지만, 어려운 상황이면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해를 구해. 그게 가장 좋은 방법 아니야?”

손일석의 말이 가슴에 꽂혔다.

“처형, 일인 삼역 하느라 고생일 텐데 축하합니다.”

“언니, 축하해.”

고경아가 수줍게 웃었다.

“경희야, 너도 축하해.”

전공을 살려 영어 강사로 학원에 취직한 고경희도 슬슬 자신의 생활을 찾기 시작했다. 아직도 소식이 없는 아이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 순간만은 행복해했다.

카르페 디엠!

***

학회 날이다.

아침 일찍 학회장에 도착한 김지훈이 의국원들과 바삐 움직였다. A, B, C 세 개의 발표장 중 A룸(Room)에서 오전 첫 번째, 두 번째 세션(Session) 내내 논문과 케이스를 발표하게 됐다.

상당한 비중이었다.

다수의 논문 채택에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중요 내용과 저자들이 수록된 요약집이 배포되며 태도가 다소 달라지기 시작했다. 요약만 봐도 한눈에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쟁쟁한 대학 병원 의사들이 진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의외일 정도로 케이스 수가 만만치 않아.’

특히 이미 대가로 인정받고 있는 이준영 교수보다 김지훈을 비롯해 간 이식과 복강경 수술의 주역이 된 사인방에게 눈길이 쏠렸다.

“김지훈 선생은 몰라도, 신현수 선생이나 이경석 선생은 원래 다른 파트를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놀랍네요. 손일석 선생도 신기동 교수에게 혈관을 배웠잖아요?”

“이번에 혈관 논문을 내긴 했는데, 김지훈 선생과 함께 간 이식을 맡고 있답니다. 보험 적용 후 거의 사십 건 가까이 시행했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더 놀랍죠.”

“성과를 보면 S 병원 외과의 최고 인재들이 분명한데 본원에서 안 키우고 왜 분원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속사정이 어떻든 재단의 의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대형 병원도 의료진이 흔들리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진상건의 등장 이후 상황이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대충 알고 있었다. 강력한 진용을 자랑했던 S 병원 외과기에 구성원에 대한 칭찬과 격려 속에 재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오고 갔다.

“송재덕 선생님 오시네요. 마음만 더 심란해지실까 봐 걱정입니다. 그만합시다.”

비록 경쟁 관계지만 같은 의사로서 동료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재단 방침에 따라 좌우되긴 마찬가지인지라 다른 병원의 일이라고 마냥 치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이쿠! 송 원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맨날 똑같습니다. 똑같아요. 병원이 잘 굴러가야 두 발 뻗고 잘 텐데 요샌 잠이 안 와요. 잠이.”

“발표 보니까 수술 많이 하고 있던데 엄살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열심히 하고는 있습니다만 신생 병원이라 쉽지 않네요. 쉽지 않아요.”

간만에 얼굴을 보는 탓에 안부를 주고받느라 한동안 대기장이 꽤나 시끄러웠다. 발표 시간이 임박해서야 모두들 발표장으로 들어갔다.

첫 순서를 배정받은 김지훈이 좌장 자리에 앉아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직전 학회까지 스승이 맡았던 자리이기에 상당한 긴장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혁민 교수를 비롯해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까지 모두 참석했다.

더욱 떨릴 수밖에 없었다.

사회자가 간단한 소개를 했다.

“첫 발표는 간담췌 전문 병원의 김지훈 과장님이 좌장을 맡고, 서도진 선생님이 생체 간 이식을 주제로 발표하겠습니다. 김지훈 선생님!”

“감사합니다. 간담췌 전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지훈입니다. 개원 후 시행한 삼십칠 건의 생체 간 이식 수술의 성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도진 선생님, 모찬우 선생님, 시작하시죠.”

발표가 시작됐다.

슬라이드가 넘어가고, 수술 과정은 생생한 동영상을 이용했다. 발생한 모든 부작용, 성인과 소아의 차이점, 평균 입원 기간, 치료 성적 등을 가감 없이 발표했다.

서도진은 열정적이었다.

모찬우와 호흡이 척척 맞았다.

발표가 끝나고 질문이 이어졌다.

좌장으로서 질문과 대답을 조율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당 있어야 할 H 병원의 진충기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논문 발표에도 이름이 없던데, 수술 수가 너무 적어서 다음으로 미뤘나? 그래도 안 올 선생님이 아닌데.’

의아한 마음이 적지 않았지만 이내 두 번째 발표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췌장 및 담도의 복강경 수술을 주제로 서도훈이 발표했다.

여전히 타 병원에서는 시도 자체가 거의 없어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김지훈이 연속으로 좌장을 맡아 더욱 주목을 끌었다.

췌장과 담도라는 장기 특성상 개복보다 우위에 있는 수술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실제 수술 결과를 확인한 이상 첨예한 대립까지 발생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았다.

김지훈이 좌장으로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현재까지 시행한 수술 건수가 적어 객관적인 데이터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 라파로 본연의 이점이 췌장과 담도 수술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본원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라파로를 시행해 또 하나의 표준 수술 방법을 확립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이들이 찬반을 넘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의사의 자세에 갈채를 보냈다. 실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 기술이 의료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야 할 길이 분명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서도진과 서도훈도 많은 의사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자리였다. 수술의 주역이 아니면 논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물론 발표할 자격조차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들 수고했어.”

이경석, 강병옥의 발표가 이어졌다.

다양한 질환에 원 포트 수술을 적용한 성과가 실로 대단했다. 먼저 시작했고, 그동안 상당한 공헌을 한 김지훈도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병옥이도 참 열심히 살았네.’

간 이식 파트임에도 복강경 수술까지 상당수 참가한 열의 덕분에 기회를 얻은 강병옥이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실수 없이 잘 마무리했다.

신현수, 안호석이 뒤를 이었다.

생체 간 이식의 공여자 수술에 대한 고찰이었다. 당연히 이준영 교수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많은 이들이 상당히 놀라고 말았다.

“전문 병원을 표방해도 여러 수술이 섞이기 마련인데 감담췌와 라파로에 전적으로 매진하는 모양입니다. 이준영 선생님은 도대체 몇 명이나 키우고 계신 건지.”

“저런 욕심 정말 부럽네요. 전문 병원 위상이 확고해지는 날이 머지않아 보입니다.”

대미는 이준영 교수의 논문이었다.

실로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간암 수술을 시행했다. 한편으로 공여자 간 절제의 기본이 되는 수술임을 강조했다. 상당히 매끄럽게 진행됐지만 뜻밖의 논란이 불거졌다.

김지훈이 아닌 신현수가 발표했다.

의사 중에도 호사가가 있기 마련이었고, 그들의 입을 통해 이준영 교수의 제자가 누구인지를 두고 설왕설래 수많은 말이 오고 갔다.

“전문 병원 주력이 간 이식이라더니, 김지훈 선생이 이젠 독립하는 건가요?”

“김지훈 선생 능력이야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준영 선생님 진료 쪽 욕심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한 명이 아니라 두세 명이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말이 쉽지, 그게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한쪽 보고 웃으면 반대쪽에서 난리가 날 텐데 조용하겠어요? 예전부터 둘이 굉장한 라이벌이라는 소문도 있었잖아요. 분위기 볼만하겠습니다. 인상 안 쓰면 다행이죠.”

별별 말이 다 들렸다.

엉뚱한 오해였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 다를 리 없었다. 어쩌면 부러움이자 시샘일 수도 있었다. 그놈의 파벌로 인한 문제는 나이와 지위를 가리지 않는 고질적인 병폐니 말이다.

어느새 오전 발표가 모두 끝났다.

B룸에서 좌장을 맡은 손일석이 상당히 밝은 표정으로 신기동 교수와 함께 합류했다. 모처럼 모인 관계로 점심 식사까지 함께하고 싶었지만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가 양해를 구하고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학회 임원들이 모여 있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저녁에는 상의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지금 논의해서 결정할 것이 있어.”

“점심 식사 중에요?”

“임원들과는 미리 상의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도통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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