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20화 (1,120/1,329)

6화

치열한 시간이 흘렀다.

모찬우에 대한 일말의 우려가 급격히 해소됐다.

“펠로우 한 명 더 있는 거랑 똑같네.”

“일 년 차 두세 몫은 하니까, 당직 때 말고는 제시간에 퇴근시켜도 될 것 같아.”

“의욕도 보통이 아니야. 경석이 형 얼굴 보니까 곧 라파로까지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칭찬 일색이었고, 이준영 교수마저 흡족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정규 일과만 소화하게 하고 남은 시간은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김지훈에게 도리어 아쉬운 대목이었다.

‘간 이식을 더욱 활성화시키려면 찬우 같은 써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재정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해도 재단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인데 독자적으로 펠로우를 선발할 방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알아보았지만 교수 요원에 관한 일이기에 독립채산제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진상건이 절대 동의할 리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찬우야, 펠로우 뽑으면 지원할 의사가 있어?”

“예? 정말 펠로우를 선발할 생각이십니까? 힘들긴 해도 제가 정말 근무하고 싶은 병원입니다.”

반색하는 모찬우를 보니 더욱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의사로서의 능력과 열정, 써전이 갖춰야 할 실력을 모두 겸비한 후배에게 미래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시급하지만 잠시 접어 두어야 할 문제였다.

학회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간 이식 수술을 두 건으로 늘린 것은 단순한 양적 변화가 아니었다. 써전은 수술과 손으로 말한다고 해도, 실전을 뒷받침할 이론이 따르지 않으면 인정받기 힘든 것이 의사 사회였다. 또한 전문 병원의 위상을 확고하게 정립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논문이야말로 의사의 이론적 토대였고, 이는 곧 환자에게도 큰 득이 되는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학회 발표는 이미 중차대한 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지훈이 논문 작성에 박차를 가했다.

부족한 잠에 눈 밑이 까매지기 시작했다.

홀로 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다들 늘어난 수술에 힘들어했지만 논문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공감한 만큼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덩달아 공여자 수술의 신현수, 혈관 수술의 손일석, 복강경을 전담한 이경석도 골머리를 싸맸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결과물이 나왔다.

무려 여섯 건이었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가 정식으로 학회에 심사를 요청했다.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도 남았지만 같은 병원 소속이라는 이해 충돌의 소지를 우려해 아예 심사에 참가하지 않았다.

“선생님, 여섯 건 모두 통과될까요?”

“이제 활성화됐다는 사실과 생체 이식이란 점을 감안할 때 간 이식 케이스 수가 적지 않아. 라파로도 이경석 선생이 최신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만큼 낙관적으로 본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모두 통과된다면 선생님 말씀대로 발표는 서도진 선생, 서도훈 선생, 강병옥 선생, 안호석 선생이 하기로 했습니다.”

송재덕 교수가 힐끗 눈길을 주었다.

“김 과장, 열심히 썼는데 발표는 후배들이 하면 서운하지 않아? 괜찮니?”

“다 함께 작업한 결과인데 서운할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병원 선생들 실력이 알려져야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번에는 서도진 선생 등을 일 저자로 등재하고, 발표는 펠로우 선생들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신 교수, 손 교수도 같은 생각이니? 그러니?”

“예. 당연한 일입니다.”

“허허허! 경석이는 물어보지 않아도 빤하지. 그래. 그래. 좋은 자세다. 대가 한 사람보다 최고의 수술 팀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좋다. 좋아. 물론 우리 스승님, 허경발 선생님은 예외다. 예외. 대가가 아니라 거장이잖아. 거장.”

사인방이 웃으면서도 눈가를 굳혔다.

대가를 향한 야망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을 활활 태우고 있었다. 더욱이 김지훈이 여섯 건 중 두 건을 작성한 데다 유일하게 세계 학회를 노리고 있어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건전하면서도 강력한 경쟁 관계가 여전히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준영 교수의 입이 살짝 말렸다.

‘여전하구나. 보기 좋다.’

사인방은 대가를 받고도 남았다.

“신 교수, 내 논문 발표하고, 공여자 발표 때 좌장을 맡아. 김 과장과 이 교수도 해당 논문 채택되면 좌장 맡아서 진행해.”

“저희가 좌장을요?”

사인방 모두 깜짝 놀랐다.

좌장은 일종의 사회자이자 진행자지만 해당 분야의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 발표자와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져 학회 기간 중에는 물론 이후에도 상당한 발언권이 보장될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교수는 그런 자리를 젊은 제자들에게 모두 양보한 것이다. 물론 논문 통과가 전제돼야 했지만 파격적인 일임은 분명했다.

“자격은 충분해.”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한 사람은 예외였다. 혼자 이름이 쏙 빠진 손일석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송재덕 교수가 크게 웃었다.

“손 교수, 얼굴이 왜 그러니?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빨리해라. 빨리.”

“별건 아닌데요. 그게 그러니까…….”

“좌장 하고 싶다고 왜 말을 못하니? 왜?”

“하! 하! 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왜 이럴까요?”

“혈관은 우리 소관이 아니잖아. 신기동 교수한테 전화해 봐라. 논문 채택부터 발표까지 신경 쓰고 있을지 누가 알겠니? 누가?”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보던 손일석이 조용히 사라졌다. 간 이식을 함께하고 있지만 김지훈에게 선수를 빼앗긴 상태에서 혈관마저 놓친다면 애가 타긴 할 것이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손일석이 돌아왔다. 평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는지라 살짝 상기된 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종잡기 어려웠다.

“신기동 교수가 뭐래?”

“일단 논문 통과나 걱정하라고 하십니다.”

“그게 다야? 정말?”

“되면 저도 좌장을……. 하하하!”

좋아 죽었다.

이로써 학회 발표에 대한 사안은 모두 결정됐다. 논문 심사 결과만 나오면 되는 상황이었다. 며칠 후면 알게 될 텐데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길게만 느껴졌다.

드디어 통보가 왔다.

이준영 교수를 중심으로 모두 둘러앉아 침만 삼켰다. 대가의 논문이 거절될 리 만무해 남은 다섯 편에 모든 관심이 집중됐다.

이준영 교수가 쓰윽 사인방을 보았다.

두근두근! 안절부절!

“모두 전에 얘기한 대로 진행해.”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문 병원의 일천한 역사를 생각하면 가히 경이적인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번 학회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우리 병원이 확고한 위상을 점할 수 있는 첫 기회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 실수하면 원장 체면까지 깎인다는 사실 잊지 마. 알았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지훈이 모처럼 외쳤다.

‘카르페 디엠!’

없는 시간을 쪼개 학회 준비에 매진했다.

슬라이드는 물론 시대에 맞춰 수술 동영상까지 준비하느라 의국원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기서도 모찬우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만져 온 세대답게 모든 작업을 척척 해냈다.

“모찬우 선생, 학회 때 슬라이드하고 동영상 구현을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될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험 준비는 하고 있는 거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둘 착착 준비하는 사이 어느새 학회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김지훈이 두 건의 논문을 앞에 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차분한 정리.

내일은 최종 점검.

모레는 학회 당일.

머릿속으로 계획을 그리며 하루를 마감하기 직전이었다. 나직한 노크 소리와 함께 민정호가 들어왔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결코 들르지 않는 사람이기에 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웬일이세요? 논문 발표 때문에 어수선해서 죄송합니다. 일단 여기 앉으시죠.”

서둘러 자료를 치우며 자리를 권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민정호 뒤로 결코 함께 올 일이 없는 정말 의외의 얼굴이 보였다.

‘경아 씨가 왜?’

“간호 부장님과 고경아 선생은 무슨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김지훈이 멍하니 고경아만 보았다.

일단 커피 한 잔 냈다.

“무슨 일로 세 분이 함께 오셨습니까?”

간호 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논문 발표 때문에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병원 운영진이라 할 수 있는 분들과 상의할 일이 있어 왔어요. 김진호 과장님과 신 교수님도 곧 오실 거예요. 고경아 선생이 수술 방 대표로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더군다나 외과와 마취과 책임자를 포함해 신현수까지 여섯 명이나 모인다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민정호가 눈에 걸렸다.

“혹시 행정적인 문제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어요.”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행정 쪽은 내 소관이 아닌데, 경아 씨까지 병원 일로 날 찾은 걸 보면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나? 하긴 진료 외적인 일로 바쁘긴 했네.’

잠시 후 모든 사람이 모였다.

“고경아 선생.”

간호 부장의 눈길에 고경아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얼굴이 약간 붉어지긴 했지만 허리를 꼿꼿이 하고 또박또박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먼저 과장님께 한 가지 질문이 있어요. 간 이식 수술을 일주일에 세 건 이상 시행할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요?”

“당장은 아니지만 수술 팀이 완비되는 대로 곧 주당 수술 건수가 늘어나게 될 겁니다.”

김지훈도 당연히 아내가 아닌 수술 방 대표로 대우했다. 그동안 수술실에서만 부딪쳐 잊고 있었지만, 사실상 간호 과장을 대하고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되는 자리였다.

“현재도 수술 방은 인력 여유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간 이식 수술에만 최소 여섯 명 이상 필요한 데다 수술 시간이 길어 응급 수술이라도 발생하면 배정할 인원조차 없는 실정이에요. 이런 상황을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 간호 인력 충원에 대한 방안은 있으신가요?”

우려했던 일이었다.

내내 고민해 온 문제기는 했지만 논문 작성과 학회 준비로 어쩔 수 없이 미뤄 왔다. 당연히 충분한 검토가 되지 않아 군색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 의아하기도 했다.

사실 운영에 관한 문제는 이사인 신현수와 민정호의 몫이었다. 실제로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마저 운영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김지훈 스스로도 독립채산제의 특수성과 설립 취지에 맞춰 일시적으로 관여하고 있을 뿐이라 여겼다.

“제가 대답할 사안이 아닙니다. 신현수 교수님이나 민 부원장님과 상의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간 이식을 주관하는 외과 과장님이 먼저 증원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해결하기 힘들다는 내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정하시나요?”

“인정합니다.”

“그럼 대처 방안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우리 마님 정말 똑 부러지시네.’

답이야 빤했지만 함부로 내뱉을 상황이 아니기에 고심하는 찰나, 무언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마취과는 왜 왔을까?’

“김진호 선생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이유가 우리 과와 마찬가지 입장이기 때문입니까?”

“우리도 간호사가 더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마취과 의사 혼자서 마취를 끌어 나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습니까? 나도 고경아 선생 의견에 동의합니다.”

김지훈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미 상의하고 함께 왔다.

결국 간호과의 협상 상대는 신현수와 민정호였다. 필요성과 당위성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김지훈과 김진호 교수를 훌륭한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결코 비난할 일이 아니었다.

이해관계가 동일한 이상 서로가 협력해 공동으로 주장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사전에 언질을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간 진지하게 상의할 틈이 없었던 데다 아마도 김지훈과 신현수, 민정호를 분리해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와 발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경아 선생님,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재정 소요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민 부원장님, 어떻습니까?”

“현재로서는 여력이 없습니다.”

그다음은?

평소 흑자를 부르짖는 이상 무엇인가 대안을 내거나 상황 설명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민정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의료진 충원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니 알아서 하라는 눈치였다.

‘이 분위기는 뭐야?’

“신현수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이 자리를 주관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로 보입니다. 최종 결정권자로서 의견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신현수도 막막한 모양이었다.

“고민은 하고 있었지만 미리 상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실 다소 갑작스러워서 김 과장님, 민 부원장님과 상의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주일이면 될까요?”

“그 안에 답을 드리겠습니다. 만에 하나 원하는 시일 내에 증원할 수 없거나, 충분한 충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까요?”

“문제가 되고도 남습니다. 모든 간호사들이 힘들어도 사명감을 갖고 일합니다. 우리도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에 합당한 처우까지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수술 방은 일일 삼교대를 하기 때문에 버티고 있는데, 그마저 무너진다면 많은 선생들이 이탈하게 될 겁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신규 간호사 선발 자체가 힘들 거예요.”

살벌한 말이었다.

고경아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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