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민정호의 요구와 김지훈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바빠지던 병원이 치열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단지 간 이식이 주당 한 건이 늘어났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십여 명에 가까운 의료진의 하루를 고스란히 잡아먹었다.
두 건의 간 이식이 시행된 첫 주에 손일석이 손가락을 꼽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김 과장, 우리 과는 아직 여력이 있지만 마취과와 간호과는 문제가 되겠어. 중간에 교대를 해야 하는데 교대 인원이 너무 빠듯해. 다른 수술도 거의 다 메이저라 피로도가 만만치 않을 테고, 무엇보다 응급 수술이 문제야.”
이미 예측했던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상의하고 있어. 김진호 선생님도 당장 인력을 충원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긴 하는데, 간 이식 수술 건수를 늘리려면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셔. 간호과야 말할 것도 없지.”
“결국 인원 충원이 불가피하다는 말이잖아.”
“재정이 문제야.”
“후우! 양날의 검이네. 이식 수술을 한 주에 두 건으로 제한하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늘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까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 빤한 일이야. 신 교수, 민 부원장하고 잘 상의해서 해결해.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발목 단단히 잡힐 것 같아.”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생 병원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두 가지, 세 가지 문제가 따라왔다. 더구나 재정이 튼튼하면 한결 짐을 덜지 몰라도, 의료진 확충은 돈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여력이 있다고 하지만 교대하지 못하는 수술 팀도 곧 피로가 누적될 테고, 인원 부족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처하겠지. 그렇다고 무작정 필요한 인력을 뽑으면 재정이 더 불안해질 텐데 첩첩산중이네.’
가장 인력이 풍부한 대형 병원조차 수련의와 전공의 선발에 목을 매는 이유 중 하나였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상대적으로 싸고, 지옥 같은 근무 일정을 감수하는 유일한 인력이기 때문이었다. 씁쓸한 상황이었지만 전문 병원과는 상관이 없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어쨌든 해야 할 일, 챙겨야 할 일도 많았다.
고경철의 파견 기간이 끝났다.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전공의는 절대 빠질 수 없는 행사가 주말 집담회다. 더구나 이제 이 년 차를 바라보는데 아뻬를 복강경으로 했다. 치프도 받지 못하는 수술을 말이다.
“고경철 선생, 라파로의 핵심이 뭐지? 아뻬라도 주의할 점이 많은데 라파로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돼?”
이경석이 먼저 칼을 빼 들었다.
단 한 명의 전공의가 마지막 날까지 활활 타올랐다. 제자 사랑이 남다른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삐질삐질 땀만 흘리는 고경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허허허! 대답이 부실하다. 부실해. 일 년 차 말에 그러면 안 된다. 안 돼. 확실하게 공부하고 레포트 써서 제출하자. 그렇게 할 거지? 그치?”
“오늘 서울 병원으로 갑니다.”
“이메일은 폼이니? 폼? 내 주소 알려 줄 테니까 다음 주 내로 보내. 곧 이 년 차 된다고 아뻬를 날로 먹으려고 하면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김 과장, 내 말이 맞지? 그치?”
“예. 고경철 선생, 원장님 말씀대로 작성해서 보내. 나도 확인할 거야.”
고경철이 푹 고개를 숙이는 순간 전공의는 감히 범접도 못할 카리스마를 가진 이준영 교수가 한마디 보탰다.
“그동안 받은 수술 모두 정리해서 보내.”
“예? 모두 다요?”
이준영 교수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전문의 시험 때 제출해야 하는데 정리하지 않았어? 고경철 선생, 이런 일 또한 써전의 기본이다.”
한껏 태운 후 적당한 짐까지 하나 턱 얹어 주었다. 모든 화살이 고경철에게 집중된 덕분에 펠로우들이 유난히 편한 시간을 보냈다.
고경철이 인수인계서에 글귀 하나를 추가했다.
빨갛게.
<찬우 형, 이번 주부터 간 이식 수술 늘었고, 혼자 일한다고 절대 봐주지 않아요. 킵이 일상이니까 일단 죽었다고 복창하고 시작하세요. 대신 라파로까지?>
하나뿐인 귀한 전공의가 떠나는 날이기에 회식 정도는 해야 했지만 갑작스러운 수술 변동에 시간이 없었다. 대신 식구들 모두 모여 점심을 먹었다.
개원 초 어수선한 상황 탓에 보다 많이 가르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서울 병원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도 남았고, 파견이 거듭될수록 전문 병원도 더욱 알찬 교육을 시행하게 될 것이다.
“경철아,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손일석이 툭 어깨를 쳤다.
“일 년에 한 번은 올 텐데 다음번에는 칼바람 날려 보자. 원주에 들렀다 갈 시간은 안 되지?”
“인수인계하려면 시간이 안 됩니다.”
“너는 전공의라 그렇다 쳐도, 우리까지 바쁘다고 얼굴 한번 못 비쳐서 아버님과 어머님이 꽤 서운해하시겠다. 전화라도 자주 드리자.”
부모님이 건강할 때 찾아봬야 하지만 한창 일하며 자식 키우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시기와 겹쳐 도리어 뜸하기 마련이었다.
품 떠난 자식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장인어른을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에 눈가를 문지르던 김지훈이 이마를 톡톡 쳤다.
“참! 이번에 오는 전공의는 어때?”
“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그래? 좋은 쪽이지?”
“저희하고 시각이 다르실 수밖에 없어서 말씀드리기 곤란한 부분이네요.”
궁금증이 폭발하려는 순간 고경아의 말 한마디와 충격적인 행동에 관심을 빼앗겼다.
“지훈 씨, 일 얘기는 그만하세요. 죽도록 일하고 가는 애한테 그러고 싶어요?”
누나들의 눈에는 동생이 대견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언제 샀는지 와이셔츠에 속옷은 물론, 돈 버는 직장인에게 봉투까지 찔러 주었다.
“시간 될 때 필요한 거 사.”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소 동등한 대우는 받아야 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동시에 발끈했다.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한마디 말로 두 놈이 간단하게 제압됐다.
“카드는 뒀다 뭐 하게요?”
일목요연하게 사용 내역이 밝혀지는 카드와 사용처가 밝혀지지 않는 현금은 그야말로 비자금인데 어찌 비교 대상이란 말인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란 말인가?
그러나 이렇듯 사소한 불평등과 가벼운 억압 또한 가정의 평화에 일조한다. 아내 입장 생각하지 않고 목소리 높여 봐야 분위기만 냉랭해진다.
사랑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지는 것이 좋다.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러운 눈으로 고경철을 보냈다.
‘카드로 만족하자. 반항하다 뺏긴다.’
주말은 주말대로 바빴다.
마치 평소 밀린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처럼 희연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맞벌이 부부답게 청소도 해야 했고, 설거지 역시 김지훈의 몫이었다.
뒹굴뒹굴 구르며 바닥이나 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더 힘들었을 고경아와 아빠 얼굴 보기 힘든 희연이를 생각하면 마땅히 움직여야 했다.
주말도 거의 다 지났다.
이제야 시간이 났다.
김지훈이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논문은 언제 다 쓰나!’
혼자 바쁜 것이 아니었다.
청소와 설거지만 집안일일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무언가를 정리하던 고경아 역시 두툼한 책과 씨름하며 기약할 수조차 없는 간호과 교수의 꿈을 지금도 이어 가고 있었다.
이래저래 바쁜 가족이었다.
***
다음 날, 새로운 전공의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삼 개월 동안 파견 나온 모찬우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넙죽 인사하는 모습이 꽤나 털털했다.
상당히 낯이 익다 싶어 찬찬히 전공의를 보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모찬우? 너 사 년 차잖아? 여기를 왜 와? 전문의 시험 준비 들어가 있을 때 아니야?”
“사 년 차 내내 차근차근 준비했습니다. 시험과 면접 때 오프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전문의 시험이 아니더라도 전공의로 삼 년 반 동안 일하고 나면 무조건 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하물며 시험 준비 기간인데 일을 자청하다니, 이상하다 못해 희한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마침 일과 전에 커피 한잔하자며 사인방이 찾아왔다. 다들 일 년 차 때부터 모찬우를 보았기에 금방 알아보았고, 여지없이 놀랐다.
손일석이 눈만 멀뚱거렸다.
“모찬우, 설마 네가 이번에 파견 온 전공의야?”
“예, 맞습니다. 더 배우고 싶어 왔습니다.”
“깜짝 놀랄 거란 말이 이거였어? 이 자식이 미쳤나? 시험 준비해야 할 놈이 무슨 일이야? 김 과장, 괜찮은 놈 하나 전문의 시험 떨어트리겠다. 당장 서울에 연락해야겠어.”
‘놈’까지 찾고 꽤 친했던 모양이었다.
모찬우가 급히 손을 저었다.
“선생님, 정말 제가 자청했고, 어렵게 허락받았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왜? 일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씌었어?”
“간 이식과 라파로에 최고의 실력을 가진 선생님들이 다 모이신 병원 아닙니까? 펠로우 뽑는다는 말만 있었어도 기다렸겠지만, 넋 놓고 있다 아예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떨어지면?”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올해 초부터 새비스톤(외과 교과서)을 달달 외울 정도로 정말 충실히 준비했습니다.”
아무리 준비를 잘했어도 무리한 일이었다.
결국 김지훈이 서울 병원에 연락을 했다.
(김 과장, 나도 반대했는데 모찬우 그노마가 이사장을 어떻게 아는지 직접 요청해 위에서 결정을 내렸다. 일은 잘하는데 시간이 있겠나? 최대한 편의를 봐줘라. 그리고 너희들도 연락 좀 해라.)
“죄송합니다.”
(논문 잘 쓰고 있제. 기대가 크다. 학회 때 보자.)
취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찬우를 위한 방법이 있다면 아예 일에서 배제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인원이 부족해 무리겠지만 후배 앞길을 막는 것은 선배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다.
“모찬우, 이사장을 잘 알아?”
“모릅니다.”
“그런데 요청을 했어?”
“선생님들 모두 안 된다고 만류하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무작정 찾아갔을 뿐입니다.”
“알았어. 인수인계는 제대로 받았지?”
“예. 환자 파악 모두 끝냈습니다.”
“일단 일 봐.”
모찬우를 내보낸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사인방 모두 동의하는 결정이 필요했다.
이혁민 교수와의 통화 내용을 설명했다.
손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닥치고 돌격도 아니고, 이 자식이 아주 앞뒤를 안 가렸네.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봐. 정말 의외긴 하지만 짬이 안 되잖아. 진상건이 아무리 쩨쩨해도 전공의까지 이용하겠어? 그랬으면 이혁민 선생님이 바로 말씀하셨겠지.”
“그래서 수련을 시키자는 거야?”
“당장은 그래야 하지 않겠어?”
이경석도 동의했다.
“정 힘들다 싶으면 얘기하겠지. 최악이라고 해야 전공의 한 명 빠지는 거잖아.”
신현수 역시 모찬우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다소 애매모호한 모양이었다. 특히 전문 병원에 절대 도움을 주지 않을 진상건의 의도에 신경을 썼다.
“인력이 부족한 걸 알고 이때다 싶어 일할 상황이 아닌 전공의를 보냈을지도 모르지만, 찬우를 이용하고도 남을 사람이야. 내부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어?”
“그게 정보가 될까?”
“사람 속을 누가 알겠어?”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후배를 의심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진상건은 사소해 보이는 문제를 증폭시키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손일석과 이경석도 이 점은 동의했다.
“하긴 순진한 놈 꼬셔서 뒤통수치는 인간이 어디 한둘인가? 어찌 됐든 찬우까지 다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진상건과 손바닥 맞출 짬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난 무엇보다 펠로우 선발 계획을 듣지 못해 자청했다는 말이 마음에 든다. 어떤 식으로든 이용해 먹기 좋겠지만 말이야.”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터트렸다.
‘후우!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후배 말조차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다니 한심하네.’
두고 볼 일이었다.
다만 선배라는 사실, 모찬우는 무모해 보일 정도로 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전공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했다.
일과가 시작됐다.
모찬우에게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김지훈의 수술이 있었다.
이혁원을 내보내고 모찬우를 퍼스트로 세웠다.
애초 전공의 일 년 차와 사 년 차의 차이는 비교 불가능한 부분이었다. 빤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모찬우의 공력은 김지훈도 놀랄 정도로 대단했다.
‘기본기 탄탄하고, 손이 좋네.’
몇몇 질문을 던졌다.
교과서를 달달 외운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한때 전공의 중 이론에 관해서는 최고라는 말을 들었던 홍재순이 생각날 정도였다.
오더는?
손을 볼 필요조차 없을 만큼 완벽했다.
당분간 지켜봐야 알겠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짐작할 수 있는 대상이 전공의였다. 그야말로 전문의 면허만 없을 뿐 또 한 명의 펠로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모찬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는 말까지 의젓하고 사려 깊었다.
“과장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병원 재정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 년 차보다 많은 제 월급값 다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복덩이가 스스로 굴러 들어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