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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18화 (1,118/1,329)

4화

당직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전문의가 상주한다는 소문에 강호성 일까지 퍼질 대로 퍼져 과를 가리지 않을 정도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소아과나 이비인후과 환자 중 중한 증세를 보이는 경우는 능력 밖이 분명했다. 수술을 요하는 정형외과 및 신경외과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밤새 응급실과 수술실을 오간 김지훈이 환자 목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환자가 늘어난 것은 좋지만 교통정리가 제대로 안 되면 사고가 나고도 남는다. 추가로 다른 과를 개설하는 일도 현실적이지 않은데 걱정이네.’

최종 목표로 어떤 형태를 지향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형 병원이 없는 지역 여건을 볼 때 종합 병원으로 발전시켜도 승산이 있었다.

반면 전문 병원으로 시작했기에 규모나 시설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장기적인 계획을 따른다면 모를까, 종합 병원으로 발돋움하려 해도 향후 몇 년은 재정 형편이 따라 주지 않을 상황이었다.

‘병원을 확장할 부지가 있지만 진상건이 있는 이상 재단이 동의할 리가 없지. 이런 상황에서 욕심내면 망한다.’

당장은 고민할 일이 아니었고, 사실 일개 과장인 김지훈이 관여할 문제도 아니었다. 신현수도 똑같은 고민을 안고 상의해 온다면 머리 정도만 맞댈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외래 진료를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샤워 한 판으로 잠시나마 몸을 회복시켜야 했다. 이젠 찬물보다 뜨거운 물에 시원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전 진료가 끝났다.

빠르게 식판 하나 비운 김지훈이 조각 잠을 청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주요 직급이 모두 참가하는 평가 회의도 모자라 이준영 교수와 논문 검토를 하는 날이었다.

‘쉴 시간을 안 주는구나. 바쁘다. 바빠.’

김지훈이 시간이 되자마자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에 논문에만 집중하는 스승을 보면서도 한 가지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어떻습니까?”

“한 달 후 학회에서 발표한 뒤 국제 학회지에 게재 신청을 하자. 그 전에 미진한 부분 확실하게 보완해.”

“요새 환자가 많이 늘어 여유가 많진 않네요. 스승님, 혹시 민 부원장에게 들은 말 없으십니까?”

“무슨 말?”

“특별히 상의하시는 것이 있나 해서요.”

“김 과장하고 신 교수로 충분해. 원장님과 나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만으로도 벅차.”

말은 그렇게 해도 절대 자신의 일을 방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원장 자리도 부득이하게 맡았을 뿐 애초 행정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스승이었다. 개원 초부터 공식적으로 김진호 교수에게 부원장 자리를 넘기겠다고 한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반면 누구보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민정호의 말 몇 마디로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유추하고도 남았다.

“정말 모르세요?”

“내가 알아야 할 일이었으면 벌써 알았겠지. 민 부원장도 같은 생각일 거다. 지금은 논문에만 신경 써.”

정말 모를까?

곧 있으면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은 지 거의 이십 년 가까워진다. 웬만한 일은 눈빛만 보아도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마음먹고 얼굴을 닫으면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준영 교수는 확실히 민정호 저리 가라 하는 포커페이스의 대가였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 판단을 믿으라는 말씀이시네. 내가 과장 된 후로 아예 발을 빼시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알겠습니다.”

힘 빠진 목소리를 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스승의 이마에 그려진 깊은 주름살이 보였다. 어쩌면 성격이나 성향 때문이 아니라 수술과 학회 일만으로도 벅찬지 모를 일이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서글픈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스승님, 항상 건강하셔야 합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평가 회의 들어가기 전에 커피나 한잔하자.”

간만에 커피를 나눴다.

스승과 제자가 마치 고급 커피라도 마시는 것처럼 믹스 커피를 음미했다. 아주 먼 옛날이 되어 버린 음성에서의 생활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는 고소했는데 지금은 꽤 다네요.”

“나도 달다. 다음에는 블랙으로 하자.”

“말씀을 하시지!”

누구나 그런 것처럼 세월 따라 입맛도 변했다.

어디 입맛뿐이랴?

그러나 때론 평생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김지훈과 고경아의 사랑.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의 마음처럼.

회의가 시작됐다.

개원 초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환자와 수술이 늘었다. 더구나 마이너보다 메이저 수술이 더 많아 수입 증가 폭이 훨씬 가팔랐다.

환자 수에 집중하는 의사의 생각일 뿐이었다.

신현수는 물론 김지훈도 얼굴을 펴지 못했다.

‘제법 개선될 줄 알았는데 지출이 꽤 많아졌네.’

“상당히 긍정적이지만 치료에 드는 비용 지출도 덩달아 상승했습니다. 이 상태로는 적자를 면치 못합니다.”

민정호의 말에 찬바람이 불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입원실 가동률이 70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외과만 따지면 더 낮은 데다 메이저 수술 위주인 탓에 수입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병실 회전률은 민망할 정도입니다. 특히 중환자실은 50퍼센트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같은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전문 병원의 핵심 축인 외과가 제 몫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가장 큰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김지훈에게 눈길이 쏠렸다.

“수술 건수가 부족하다는 사실 인정합니다.”

“대책은 있으십니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여건이 따라 주지 못해 시간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이제 사 개월 정도 지났다는 생각이 아니라, 벌써 사 개월이나 흘렀다고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무리해서 수술을 늘릴 수는 없습니다. 자칫 사고의 위험성만 늘릴 겁니다.”

민정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논쟁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건이 충족되길 기다리다 병원이 먼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제 권한 밖이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간 이식 수술을 주 이 회 이상으로 늘려야 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이미 수술 예약만 수개월이 밀려 있고, 내과 진료도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간 이식 팀 상황이 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일단 수혜자 수술 팀이 두 개뿐이었다.

김지훈은 담도와 췌장 부분 수술까지 주관해야 했고, 손일석 역시 간 이식에 매우 중요한 혈관 수술 집도 및 교육까지 맡고 있었다.

반면 의료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에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의 시각으로 볼 때 서도진과 강병옥은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못했다. 독립적으로 수술하기까지 이삼 개월 정도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민정호가 다시 물었다.

“불가능합니까?”

집도의 개개인의 체력적인 문제와 약간의 혼란을 감수한다면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세상에 완벽한 일은 없건만 완벽하기를 바랐던 마음이 욕심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시행해 주시죠.”

섣불리 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수술 팀과 상의해 결정하겠습니다.”

“기한을 정해 주시죠.”

“이번 주 내로 결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결정하는 즉시 제게도 말씀해 주십시오. 원장님, 부원장님,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행정부원장도 운영진이자 핵심인데 당연한 일입니다. 서로서로 머리 맞대고 상의해야 더 좋은 결과가 나지 않겠어요? 김 과장,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이준영 교수도 무언의 긍정을 표했다.

통상 행정직이 진료 영역을 침범하면 누구라도 기분 나빠하기 마련인데 상당한 신뢰를 보였다. 사실 송재덕 교수 말이 아니더라도 민정호 역시 병원의 핵심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 이상 할 얘기 없으면 이만 마칩시다. 김 과장, 가자. 가자. 집에 가자.”

예상외로 빨리 끝났다.

텅 빈 회의실 한구석에서 김지훈이 얼굴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뜨지 못하자 민정호가 조용히 다가왔다.

“과장님, 제가 정말 무리한 요구를 한 겁니까?”

“환자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반쯤은 그렇죠. 환자가 늘어난다고 민 부원장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한이 되기 전에 병원이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길 바랄 뿐입니다.”

“계약 파기가 확정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꼭 맛을 봐야 아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비유를 하려면 다 하든지! 허구한 날 나한테 요구만 하는데 나도 요구 하나 합시다.”

“하십시오.”

“오늘 민 부원장님 말을 듣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더군요. 예전이었으면 월권이라 생각하며 티를 많이 냈을 텐데 말입니다. 최선을 다해 계약을 정상적으로 유지해 주길 바랍니다. 그 정도 노력은 해 줘야죠.”

민정호가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피고용자일 뿐 결정은 진상건 이사장님의 권한입니다. 병원을 폐업으로 몰고 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도 노력은 해 주세요.”

민정호가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개인적인 감정은 확실히 위험해.’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김지훈이 뒷모습을 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원하는 대답은 없었지만 왠지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병원 존립과 이 년의 기한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갑갑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병원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민 부원장을 잡을 수 있는 기회까지 사라진다.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

깊은 고민 없이 간 이식 수술 팀과 상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손일석이 당직인 날이라 곧바로 신현수와 함께 연구실에서 만났다.

“이번 달도 적자라고? 차등 수가니 뭐니 할 때부터 알아봤어. 수술 전 준비부터 중환자실 이송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수술인데, 두 팀이 수술하는 것으로 계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제 와 말하면 뭐 해?”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민 부원장이 이젠 확실히 우리 편이라는 사실 하나는 위안이 되네. 역시 강호의 정의는 살아 있어. 하필이면 우리와는 술 한 잔 안 하는 사람이라 탈이지만 말이야.”

“삼천포로 빠지지 말고, 네 의견이나 빨리 말해.”

“혈관 수술 스케줄 조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나는 매 주 한 건씩 해도 문제없어. 간담췌를 모조리 잡고 있는 김 과장이 문제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답은 간단하지. 병옥이도 마찬가지지만, 도진이하고 도훈이에게 부족한 면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가르쳐야지. 답은 뭐다? 김 과장이 전공의 때처럼 기를 쓰고 일하면 돼. 아니면 담도하고 췌장은 다 줘 버려.”

“후우! 개복 수술은 걱정 없어. 라파로만 아니면 괜찮은데 아무래도 고난이도 수술은 경험이 부족해. 나처럼 맨땅에서 시작하라고 할 수는 없잖아.”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췌장공장 문합술만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지. 김 과장, 나하고 경석이 형이 위장과 대장 라파로를 시작했으니까 아예 트레이닝 시작한다는 각오로 함께 가르치자. 그럼 짐을 빨리 덜지 않을까?”

“간암 수술에 공여자 수술까지 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서울에서 출퇴근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어.”

“내가 고생하지 않으면 누가 해?”

“나도 찬성! 다들 경험이 많고 기본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까, 한 달 정도만 바짝 밀어붙이면 될 거야.”

세부적인 사항까지 논의를 마쳤다.

이로써 간 이식 수술 팀의 운명이 결정됐다.

다음 날, 바로 통보했다.

서도훈이 모든 췌장 수술을 맡는다.

서도진과 강병옥 역시 담도와 담낭의 중증 질환 수술 모두 각자의 책임하에 맡는다.

단, 복강경 수술이나 고난이도 수술의 경우 김지훈의 지시를 따르며, 원하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신현수와 이경석의 수술에 참가한다.

물론 혈관 수술도 예외 없이 참가한다.

곧 펠로우 삼 년 차가 되는 이혁원과 송진우는 각자 진로를 결정한 후 해당 파트의 과정을 동일하게 따른다. 복강경과 혈관은 물론 기본이 되는 개복 수술까지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안호석 선생과 나종진 선생도 마찬가지야.”

후배 사인방과 펠로우들의 얼굴이 오락가락했다. 드디어 각자 자신의 파트를 맡는다는 생각도 잠시, 살인적인 일정이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채찍만 휘두르면 누구나 나가떨어진다.

“서도진 선생과 강병옥 선생, 가능하면 빨리 수혜자 수술 팀 네 개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야. 서도훈 선생과는 휘플까지 라파로로 하고 싶다. 모두 최선을 다해 줘.”

“알겠습니다.”

손일석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펠로우 선생들, 우리 병원이 독립채산제인 거 알지? 전공의 선발은 어려워도 펠로우나 교수 선발에는 입김을 넣을 수 있다는 말이야. 누군가가 돈이 많이 들기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거든. 다들 위기를 기회로 삼자.”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농담을 입에 물고 사는 손일석이었지만 허언을 하지 않았다. 김지훈과 신현수도 고개를 끄덕여 현실적인 말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줬다.

다들 입이 찢어졌다.

개원 전 계획했던 일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여전히 균형을 찾지 못한 병원 재정만이 아니라 민정호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란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호사다마일까?

김지훈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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