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17화 (1,117/1,329)

3화

복잡다단했던 일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김지훈은 간 이식 수술을 비롯해 담도와 췌장 쪽 수술로 바삐 움직였고, 학회 발표를 위한 논문 작성까지 겹쳐 쉴 틈이 없었다. 서도진, 강병옥, 서도훈이 자리를 잡아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민정호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정에만 집중했다. 수시로 사람이 아닌 시스템을 강조하며, 효율적이고 유기적인 체계 학립에 전념했다.

그사이 숨은 사정을 아는 모든 이들이 기회가 될 때마다 근황을 물었다. 반응이야 빤했지만 돌연 본원에서 새로운 행정부원장을 임명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 불안감이 적지 않았다. 이제 민정호는 전문 병원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작정하고 자리를 만들었다.

“진상건 이사장과 만난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당장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장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들리는 소문이 사실인가?’

“안 좋은 소문이 도는데 들으셨습니까?”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직원 특채는 진상건 이사장님 의중에 달린 일인 데다 제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불길한 말이었다.

“행정부원장 자리의 권한과 영향력이 작지 않습니다. 우리는 민 부원장님과 계속 일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사장이 계약을 파기하려고 해도 민 부원장님은 기간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그동안 우리에게 한 말과 맞는 행동입니다.”

“애초 계약과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년 계약이었지만 존폐 결정에 육 개월이란 시한을 정한 이유기도 합니다. 세상 일이 뜻대로만 굴러가진 않으니까요.”

김지훈이 일순 말을 잃었다.

육 개월이 지나면 계약 파기가 가능하다는 말이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진상건의 수족과 같은 사람이 올 것이 빤했다. 민정호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은 기대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전문 병원이 독립채산제를 택하는 대신 행정부원장 임명권을 넘겼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미련 없이 떠나겠지? 계약에 목을 매는 사람이란 사실이 득인 줄만 알았는데 도리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무책임하게 떠나진 않겠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안이라도 세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든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세요. 우리와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이 년이란 기한은 약속과 다름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전히 무표정했다.

말속에 숨은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지만 민정호의 눈빛이 흔들린 것만은 확실했다. 최소한 원하지 않거나 달갑지 않다는 의미였다.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민정호가 먼저 정적을 깼다.

“병원에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기간 각자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계약 파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 방안이 없다는 사실에 김지훈은 심한 무력감마저 느꼈다.

“과장님, 행정부원장의 교체는 직원들에게 큰 동요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 나눈 말은 확정될 때까지 우리 둘만 알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묻고 갈 일이 아닙니다. 최소 우리 병원 운영의 최종 결정권자인 신 교수는 알아야 합니다.”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제 거취에 관한 문제가 더 이상 다른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김지훈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결국 진상건이 관건이었다.

정한득은 기폭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지훈은 민정호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을 뿐 능력 면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배워 온 김지훈이었다.

‘인간적으로도 이건 아니야.’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계약 당사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분명 이 년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민정호가 잠시 김지훈을 바라보았다.

‘가장 많이 부딪친 사람인데 극구 날 잡으려 하다니 세상 참 묘하네. 김 과장님,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김지훈이 곧바로 신현수를 찾았다.

소문을 못 들었을 리 없었다. 내심 불안해하고 있던 신현수도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상건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강해졌다.

“지훈아,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정한득 비리에 진상건도 관련이 있을 텐데 공론화시킬까?”

“민 부원장도 떠나길 바란다면 모르지만, 그런 눈치는 조금도 없었어. 결국 계약 파기와 맞바꿀 증거가 없단 말이겠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병원 힘을 키우는 것밖에 없어.”

“그다음은?”

“현수 네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민 부원장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돼. 그 부분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난 기본을 맡을게.”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

병원의 힘은 실력과 실적에서 나온다. 환자 없이 자리싸움이나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하등 쓸데없는 주도권 쟁탈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다.

스스로를 다잡아야 하는 이유 하나가 추가된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일만이 남았다.

어떤 일이 있든 의사 본연의 의무는 바뀔 수 없었다. 대학 병원 산하기에 비록 한 명뿐이지만 전공의 교육 역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었다.

오늘도 무사히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이혁원을 찾았다. 민정호 거취 문제는 신현수에게 맡기고 가시화되기 전까지 잊고자 한 덕에 부담도 상당 부분 덜었다.

“오늘 경철이하고 이혁원 선생이 당직이지?”

“예. 피곤하실 텐데 미리 쉬시죠.”

“너희들이 문제지, 어쩌다 오는 당직이라 괜찮아. 이혁원 선생이 보기에 경철이 기본기가 어떤 것 같아?”

“탄탄합니다. 아뻬만이 아니라 다른 수술 경험도 제법 쌓았고요. 서울 병원에 가면 이혁민 선생님과 신기동 선생님도 깜짝 놀라실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 이 핑계 저 핑계로 한 번도 못 찾아뵀네. 주말에라도 가야겠다.’

툭하면 함께 근무했던 시간이 떠오를 정도로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도 무척 그리운 얼굴이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든든한 선배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곤 했었다.

‘민 부원장 일도 상의할 수 있었으면 훨씬 잘 대처했을 텐데. 후우! 지금은 경철이에게 집중하자.’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이혁원을 찾은 이유는 고경철의 마지막 교육 때문이었다. 수련받을 당시만 해도 개복이 모든 수술의 기본이었지만 이젠 복강경 수술이 더 보편화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수련 방식도 변해야 했다.

“라파로를 줄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경철이에게요?”

“힘들까?”

“그건 아닙니다만, 이제 이 년 차 되는데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서울이나 천안 병원에서는 치프도 받기 힘든 실정입니다.”

“실력만 뒷받침되면 욕먹을 일이 아니잖아? 경철이 다음으로 우리 병원에 파견되는 전공의도 일 년 차나 이 년 차 중 한 명이겠지만 새로운 전통을 만들고 싶어.”

“라파로를 배우고, 직접 수술해 볼 수 있는 병원으로 말입니까? 전문 병원 설립 취지에 딱 맞긴 하네요.”

“바로 그거야. 똑같은 수련을 받는 병원이 아니라 무언가 더 배울 수 있는 병원이라면 상당한 자극을 받지 않겠어? 지금도 사람이 부족한데 인원 충원할 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해.”

이혁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고민도 없이 내뱉는 김지훈이 아니었다. 과장으로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을 상의한다는 것은 원하는 바가 있다는 말이었다.

바로 휴게실이었다.

‘처남이라 마음에 걸리시는지도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으면 오늘이라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잘할 수 있을까?”

“따르륵 소리 대신 라파로 기구를 달고 삽니다. 실전과 큰 차이가 있겠지만 최소한 기구를 못 다뤄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냉정하게 판단한 거지?”

“저 과장님 눈치 아무 때나 보는 놈 아닙니다. 마음에 드는 소리만 골라 하지도 않고요.”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도진이한테 많이 배웠구나. 가끔은 눈치도 보고, 이왕이면 아부까지 떨어도 돼. 마냥 싫은 사람 있겠어?”

“진심이십니까?”

“정색하긴! 나도 과장 대우 받고 싶은 사람이야. 치고 올라올 생각만 하지, 받들어 줄 생각 하는 놈 하나 없어서 서운해. 됐지?”

이혁원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매정한 놈!’

기다려 봐야 입만 텁텁해질 뿐이었다.

김지훈이 가운을 벗었다.

“퇴근할 테니까 환자 오면 집으로 연락해.”

“예. 수고하셨습니다.”

써전을 가리지 않고 응급실 환자가 늘어난 지 오래였다. 정시 퇴근은 언감생심이었고, 보란 듯이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환자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

아뻬였다.

최근 내원한 아뻬 환자 중 절반은 수술한 고경철이 한껏 기대에 부풀어 목소리마저 고조됐다. 김지훈이 환자를 보는 그 순간에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때가 좋았어. 아뻬 하나만 받아도 세상 다 얻은 것처럼 붕 뜨곤 했었지. 경철아, 오늘은 많이 다를 거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설명을 마친 김지훈이 슬며시 이혁원을 불렀다.

“어때?”

“마른 데다 초기에 와서 딱 좋은 케이스 같습니다. 라파로로 준비시킬까요?”

“오케이! 수술 준비 끝날 때까지 응급실 지키고 있을 테니까 확실하게 준비시켜. 버벅대면 바로 취소하고.”

“알겠습니다.”

전공의는 전공의였다.

이혁원이 손짓을 하자마자 고경철이 달려왔다.

“고경철 선생, 올라가자.”

“예? 수술 준비해야 되는데요.”

“이번 환자는 과장님께서 직접 준비하실 거야.”

이혁원이 어깨를 툭 치며 잡아끌었다.

영문 모를 일에 당황한 고경철이 어떤 일이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김지훈만 보았다. 김지훈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신중하게 환자를 다시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김지훈이 수술 방으로 향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이혁원 옆에서 환자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고경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아뻬를 복강경으로 한다는 기쁨 대신 긴장만이 가득했다.

“이혁원 선생, 준비됐어?”

“이론적으로는 충분합니다.”

“고경철 선생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누구나 최선을 다해. 중요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환자를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확실하게 해내는 거야.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습니다.”

김지훈이 냉정한 얼굴로 수술복을 갈아입었다.

내심 고경철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개복이든 복강경이든 아뻬가 기본이라 하지만, 그동안 누구도 전공의에게 기구를 넘겨준 적이 없었다. 처음이란 사실은 교육에도 큰 부담이 분명했다.

띠! 띠! 띠! 띠!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이 퍼스트를 서고, 이혁원은 세컨 자리에 서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경철의 긴장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고경철 선생, 우리가 있어. 집도의에게 필요한 긴장만 유지해. 손 대신 기구를 이용할 뿐이야.”

사실 가장 기초인 에어 팁을 찔러 넣는 과정마저 복벽을 뚫는 감각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지훈의 부드러운 조언 덕분인지 고경철이 침착하게 첫 관문을 넘어섰다.

처컥! 처컥!

공기가 주입됐다.

잘 익은 아뻬가 방긋 인사했다.

일 년 차에게 최고로 좋은 경우인 굿모닝 아뻬였다. 그러나 개복이 아닌 단 한 번의 경험도 없는 복강경이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곧바로 손이 바뀔 것이다.

“모스키토! 보비! 클립!”

아뻬 동맥을 잡았다.

수처 대신 클립으로 잡아도 안전하다는 것이 증명된 지 제법 됐다. 그 덕에 상당히 수월해졌지만 고경철의 이마는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다.

불안할 것이다.

“어디를 봐? 모니터와 손에 집중해.”

따끔한 소리만 날아들었다.

고경철이 눈가에 힘을 주며 집중한 끝에 아뻬를 잡아 절제했다. 살짝 묻어 나오는 피를 제거하고 수술 부위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과장님, 마무리하겠습니다.”

“진행해.”

“타이! 컷!”

비록 두 부위를 뚫었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깔끔하게 잘해 냈다. 또 한 명의 의사가 써전으로서 중대한 첫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남몰래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김지훈이 이혁원에게 최종 마무리를 맡겼다.

휴게실이 활활 불타올랐다.

이혁원이 아버지 못지않은 화력을 선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