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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15화 (1,115/1,329)

1화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 기간 투병을 했거나 마지막을 앞둔 말기 암 환자는 어떤 식으로든 아픈 티가 나기 마련인데, 의외일 정도로 얼굴이 밝고 편안해 보였다. 막내딸 결혼식을 무사히 마친 덕인지, 아니면 아직도 곱게 단장한 때문인지 몰라도 언뜻 완치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참 편안해 보이시네. 행복하기 때문일까?’

송진순 환자가 웃었다.

“나 혼자 퇴원해도 되는데 굳이 따라와서 이 소란이네요. 다들 바쁠 텐데 어여들 가 봐.”

“우리 집에서 하루 더 자고 내일 천천히 준비하면 되는데, 왜 고집을 부리고 그래? 윤희하고 제부도 꼼짝 못하게 생겼잖아.”

“나 편하게 해 주시는 선생님들 놔두고 네 집에서 왜 자? 윤희야, 엄마 욕심에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여한이 없어. 지금이라도 날 잡아서 신혼여행 다녀와. 양 서방하고 평생 잘 살아야 한다. 그게 애미를 위한 길이야.”

“엄마, 왜 그런 소리를 해.”

엄윤희가 눈가를 훔쳤다.

“이렇게 좋은 날 왜 울어? 해 준 것도 없는데 잘 자라 줘서 고맙다. 대견해.”

막내딸과 사위의 손을 잡은 송진순 환자가 어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두런두런 오가는 대화 속에 진한 슬픔 대신 가족의 사랑이 듬뿍 담겼다.

의사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남은 기간 큰 고통 없이 지낼 수 있기만을 바랐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이지만 엄윤희의 행복한 모습을 본다면 송진순 환자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슬그머니 병실을 빠져나왔다.

송진순 환자가 따라 나왔다.

진지하게 무언가 말을 건네자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사래를 쳤다. 엄윤희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 문을 열어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긴 하지만, 딸 결혼식 다음 날인데 별소리를 다 하시네. 쯧! 불안하긴 하시겠지.’

김지훈이 곧장 중환자실로 향했다.

서도진과 강병옥을 비롯해 수혜자 수술 팀이 모두 나와 있었다. 이미 오전 검사 결과를 검토하며 이후 치료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일요일인데 일찍 나왔네.”

“일요일이라고 안 나오실 과장님도 아니고, 언제 나오실지 빤히 아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손일석 선생님처럼 주말에는 집에서 편히 쉬세요.”

서도진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강병옥도 격하게 공감하고 있었다.

어느 사회든 선배가 한 발 떼면 후배는 두 발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한창 배울 때라면 모르지만 중견 의사에 들어서는 후배들에게 때론 선배의 열정마저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줄 수도 있었다.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정답이건만 환자 걱정은 마음대로 조절되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 이번 수술은 특별한 점이 적지 않았다.

“어제 수술한 데다 할 일도 없고 해서 나왔어. 솔직히 장기를 이송해 수술한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환자는 괜찮지? 인공호흡기는 뗐나?”

얼렁뚱땅 군색한 변명을 했다.

“경과가 좋습니다. 아침 일찍 인투베이션 제거했고, 보호자 면회까지 다 마쳤습니다. 과장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 노골적이네.’

아무리 타박을 해도 환자 얼굴은 봐야 했다.

“수정아, 많이 아프니?”

열 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았다.

절개 창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성인도 견디기 어려운 수술 후 통증을 아이들이 버티기에는 너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많이 아프면 선생님들에게 언제든 말해. 조금만 참자. 이혁원 선생, 신경 써 줘.”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째 이혁원의 목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김지훈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전문의만 네 명이었다.

하나같이 환자에 대한 열정은 인정하지만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각자의 영역과 선을 지켜 달라는 눈빛이었다. 물론 김지훈의 생각이었고, 내심은 우리를 전공의처럼 대우하지 말라는 항의인지도 몰랐다.

더 있다간 눈총에 맞아 죽을 상황이었다.

서둘러 빠져나와야 했다.

‘내가 잘못했나? 스승님이 전적으로 내게 환자를 맡기신 게 저때쯤이었나? 어쨌든 수술 건수만 따라 준다면 수술 팀을 늘려야 할 날도 머지않았구나. 그래도 삼 개월은 더 지나야 해.’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보호자를 만나 상태를 설명했다. 중환자실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없어지지 않을 불안이 가득했지만 모든 보호자가 견뎌야 할 아픔이었다.

“우리가 이십사 시간 내내 지켜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급성 합병증만 발생하지 않으면 별다른 문제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막 인사를 마쳤을 때 손일석이 보였다.

“김 과장, 벌써 가는 거야?”

“응.”

“역시 부지런해. 참! 나오는 길에 현수하고 민 부원장 만났어. 어제 일 때문에 만나고 싶어 하던데, 지금 부원장실로 가면 바로 만날 수 있을 거야.”

안 그래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됐대? 정한득이 난리 안 쳤대?”

“얼굴은 나쁘지 않은데 난리를 쳤는지, 안 쳤는지는 나도 모르지. 회진 돌고 바로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손일석이 잰걸음을 놀렸다.

김지훈의 입가가 음흉하게 말렸다.

강병옥의 눈빛이 눈에 선했다.

말발도 통할 때가 따로 있다.

수술 욕심이 유난히 많은 강병옥이 더하면 더했지, 서도진보다 못할 리가 없었다. 미리 경고한다고 달라질 일도 없겠지만 불시에 당하면 더 당황스러운 법이었다.

‘너라고 별수 있겠어?’

왠지 모를 즐거움에 한껏 미소를 머금은 김지훈이 부원장실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고경아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편하다는 말처럼 몇 마디 훈계를 들은 후 후련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신현수가 웃고 있었다.

민정호는 여전히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결과는 명확해 보였다. 다만 정한득이 진상건과 연락조차 하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마음에 걸리긴 했다.

“김 과장, 왔어? 손 교수한테 들었구나?”

“얼굴이 좋네.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원하는 대로 다 됐지.”

김지훈이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잘됐다. 정말 잘됐어. 이제 마음 놓고 환자에게만 집중하면 되겠네.”

“위원들도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어. 회의 내내 불안해하는 정한득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아깝다. 사실 회의 전에 한 번 더 만났거든. 나이도 많이 먹은 사람이 기를 쓰고 빠져나가려는데 가관도 아니더라.”

“완전히 망할 수도 있는데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하지. 진상건과 입을 맞춘 것 같진 않았어?”

김지훈의 눈길을 받은 민정호가 입을 열었다.

“경고를 하긴 했지만 제 예상대로 우리와 만난 직후 연락을 취했더군요. 여러 얘기가 오간 것으로 짐작되지만, 진상건 이사장님이 자신을 위해 손을 쓰지 않을 것이란 사실만 확인했을 겁니다.”

“끝까지 진상건에게 매달리면서 욕심을 못 버리다니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드네요.”

“언젠가 합당한 대가를 치를 겁니다.”

“정한득은 둘째 치고, 이런 상황인데 진상건 이사장이 민 부원장님을 찾진 않았습니까?”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빤하게 보이는데 무척 담담했다. 병원과 관련된 모든 일에 계약을 언급하지만 성격 자체가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매사에 절대 무딘 사람이 아닌데 참 희한하네.’

“분위기가 좋을 리 없는데 같이 만날까요?”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인데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수님들은 정한득 문제를 포함해 절대 전면에 나서지 마세요. 긁어 부스럼만 만들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진상건과 관련된 문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나 몰라라 뒤로 빠지면 정한득과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었다.

“민 부원장님, 차등 수가까지 해결된 이상 도리어 우리가 부담이 없는 상황입니다. 나서야 한다면 우리가 나서는 것이 맞고요.”

민정호가 여유롭게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계약 이행에 변수가 생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두 분이 개입하면 오히려 대처하기 힘들어집니다.”

“따지고 보면 당사자는 우리입니다. 굳이 혼자 짊어지려는 이유가 뭡니까?”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전 전문 병원이 아니라 진상건 이사장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당사자도 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계약 중 발생한 모든 문제는 제가 해결합니다. 책임 문제를 두고 더 이상 거론하시면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단호해도 너무 단호했다.

얼핏 진상건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전문 병원 설립 전까지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은 김지훈과 신현수였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정말 도울 일이 없습니까?”

“환자에게만 전념하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단, 우리도 정한득이 저지른 비리에서 진상건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둘 다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변동이 생기거나 중대한 일로 판단되면 반드시 알려 줘야 합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계약이 유지되는 한 필요한 부분은 가장 먼저 알려 드리겠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솔직히 개인적인 유대가 부족할 뿐 민정호는 완벽한 행정부원장이었다. 가능하다면 계약 기간을 연장하거나, 혹은 병원 식구로 평생 함께할 사람이라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때문에 최소한 계약 기간을 모두 채우기를 바랐다.

물론 욕심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말속에 담긴 단서가 마음에 걸렸다. 가뜩이나 진상건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계약이 유지되는 한이라! 민 부원장도 파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후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별생각이 다 들었지만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오직 병원만을 위해 민정호를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코 편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말문을 막았다.

김지훈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 좋은 날인데 진상건과 관련된 문제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얘기하죠.”

민정호 입장에서는 용건 끝났다.

애초 전화나 신현수를 통해 알려 주면 되는 일을 두고 김지훈을 직접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예외적이기도 했다. 진상건과 만날 시간도 다가오는 참이었다.

“말씀 나누시죠. 그럼 이만!”

그때 문이 덜컥 열렸다.

“민 부원장님, 벌써 일어나는 거예요? 난 정한득이 어땠는지 한마디도 듣지 못했는데 조금 더 있다 갑시다. 신 교수나 민 부원장님이나 말주변이 거기서 거기라, 두 명한테 동시에 들어야 실감이 날 거 아닙니까?”

“선약이 있어 죄송합니다.”

“이거야 원!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게 낫겠네. 민 부원장님, 간만에 넷이 모였는데 커피 한 잔은 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사이에 생동감 있게 말해 주면 더 좋고요.”

잠시 멈칫거린 민정호가 어인 일인지 순순히 커피를 탔다. 매몰차게 돌아섰던 평소와 달리 별다른 말 없이 정한득에 대해 이미 했던 말을 다시 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랬구나. 하긴 민 부원장님 말투와 표정으로는 속을 알기 힘든데, 만만치 않은 신 교수까지 가세했으니 똥줄이 안 타면 이상한 일이지.”

“제가 그렇습니까?”

“어허! 대화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또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네. 아침에 거울 안 봐요? 아니면 사람들 반응을 좀 보든지. 가슴이 턱턱 막힙니다. 턱턱!”

“글쎄요. 지금까지 어떤 문제도 없었습니다.”

“나니까 말해 주는 거예요. 속정이 아무리 깊으면 뭐 해요? 겉으로 드러나야지. 우리처럼 잔정이 많은 사람들에겐 특히 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제 말이 어려우신 모양인데 참고하죠. 얘기 더 나누실 거면 잔 깨끗이 씻어 놓고, 문단속 잘한 후 가십시오. 그럼 이만!”

민정호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그놈의 한 발 정말 좁히기 참 힘드네. 어쨌든 진상건과도 지금처럼 당당하게 맞서길 바랍니다. 하긴 사람에 따라 변할 민 부원장이 아니긴 하네.’

손일석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에휴! 집에서 나올 때는 참 산뜻했는데 일진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네. 중환자실에서는 후배들에게 깨지고, 민 부원장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고……. 가만! 나한테만 적용되는 일이 아니잖아. 김 과장!”

“왜? 왜 그래?”

도둑이 제 발 저린 법이었다.

순간 당황한 김지훈이 말까지 더듬었다.

“같이 당하자 이거지?”

손일석의 눈이 찢어지며 살벌한 광선이 쏟아지는 순간, 희미하게 김지훈의 이름이 들렸다.

병동에서의 호출이었다.

동시에 휴대폰이 울렸다.

보통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과장에게 직접 연락하는 일이 없기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요? 병원에 있으니까 바로 갑니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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