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간이 드러났다.
크고 작은 물혹이 가득 들어찬 간은 이미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얼마 남지 않은 정상 조직으로 버틴 시간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시작하자.”
절제 선을 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간도 기능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이식한 간에 퍼지는 병이 아닌 데다 거부반응 발생을 고려해 남길 수 있다면 최대한 남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동시에 이식될 간을 안전하게 심을 공간도 확보해야 했다.
연결 조직을 제거했다.
“모스키토!”
절제 선을 따라 절제를 시작했다.
사각! 사각!
“타이! 컷! 보비!”
낭종(물혹)이 절개된 채 내부가 노출되면 안 되기에 상당한 주의를 요했다. 반면 숱하게 경험한 과정이었고, 수술 팀의 능력이 발군인 이상 절제 자체를 제약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작은 간이 서서히 벌어졌다.
간 내로 주행하는 세 개의 혈관과 담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해 가며 조심스럽게 확보해 나갔다. 슬슬 어려움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간경화로 딱딱해진 간도 문제였지만 물혹으로 가득 찬 간 역시 여러 난관을 유발했다. 좁은 시야도 문제였지만 선천성 낭종 질환을 수술한 경험이 없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지금 보이는 낭종을 남겨야 하나? 크기가 작다고 함부로 제거하다가 너무 깊숙이 파고들 수도 있겠어. 남기는 것이 안전하다.’
하나하나 신중한 판단을 이어 갔다.
상대적으로 단단하거나 혹은 질긴 조직들이 하나둘 노출되며 간 우엽이 좌엽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간정맥부터 확보했다.
간 동맥과 문맥 역시 일정 길이를 노출시켰다.
가장 하부에 위치한 담도까지 확보한 후에야 김지훈이 허리를 폈다. 이제 이식될 간의 혈관과 담도에 연결할 수 있도록 깨끗이 다듬는 일만 남았다.
단, 간이 도착할 때까지 혈관을 자를 이유가 없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이상 혈류를 유지시키며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성인 혈관보다 훨씬 연약하니까 주의하자. 서도진 선생, 담도는 그쪽에서 정리하는 것이 편하겠다. 간이 도착하면 자를 거니까 그에 맞춰 다듬어.”
서도훈에 이어 수술 중 또 손을 넘겼다.
김지훈은 곧 수혜자 이식 팀 하나를 맡아야 할 서도진을 확고하게 믿었다. 어린아이의 장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생생한 경험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선배가 후배를 키워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무사히 모든 구조물을 확보했다.
이제 간만 도착하면 된다.
“손일석 선생 수술은 어디까지 진행됐죠?”
“거의 다 끝나 갑니다.”
복강 내부가 마르지 않도록 젖은 천으로 수술 부위를 덮어 보호했다.
째깍! 째깍!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너무 늦는데. 길이 막히나?’
수술 당일만 순조로웠지 우여곡절 끝에 기증이 확정되고, 수술까지 어렵게 왔다. 변수란 변수는 모조리 발생하는지도 몰랐다.
별생각이 다 났다.
지역에서 지역 간의 이동이었다.
주말 오후는 가뜩이나 차가 붐빈다.
119 구급차라 해서 비켜 주는 차량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급한 마음에 서두를 테고, 교통사고가 안 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혈관과 담도의 연결만 남겼을 뿐 이미 간을 절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면 두 명의 환자를 살리기는커녕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설마 아니겠지. 일석이 환자는 간을 모두 제거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면 안 돼.’
수술 방이 조용했다.
불안과 초조가 극에 달했다.
“마취과, 연락 없나요?”
“아직 없어요. 어? 전화 오는 것 같네요.”
준비실로 향한 간호사가 돌아왔다.
“과장님, 지금 막 병원에 도착했대요. 곧 가지고 올라온답니다.”
무사히 도착했다.
마지막 고비를 넘었다.
김지훈이 곧바로 수술을 진행시켰다.
미리 확보해 놓은 혈관과 담도가 제대로 정리됐는지 최종 확인하는 작업이 끝날 무렵, 특수 용기에 담긴 간이 도착했다.
손일석과 함께 이송된 간을 살폈다.
지체된 시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관류액을 비롯해 날로 발전하는 보존 기술과 적출 팀의 노련한 손 덕분이었다.
“김 과장, 어때?”
“우엽과 좌엽 모두 좋아 보인다. 시작하자.”
성인을 수술하는 손일석 팀에게 우측 간을 넘기고, 좌측 간을 즉시 옮겼다. 이식될 간의 크기를 가늠한 김지훈이 안도했다. 다행히 아이에게 이식하기에 딱 맞는 크기였다.
“루뻬!”
혈관과 혈관, 담도와 담도를 비교했다.
굵기가 확연하게 달라 그대로 연결할 수 없었다. 성인의 혈관에 맞춰 아이의 혈관을 사선으로 정교하게 잘라 최대한 단면적을 일치시켰다.
“수처 시작합니다.”
김지훈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간 이식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과정이었다.
수술 후 이삼 일 내에 발생하는 합병증인 연결 부위 출혈 혹은 혈전 발생을 막는 것은 수술 팀의 실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혈관의 굵기가 상이할수록 위험도가 더욱 높아지는 부분이었다.
“셀라인! 석션!”
연결 부위를 깨끗이 씻어 내 혈관 구조를 확실하게 구분하며 봉합을 진행했다.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어린아이의 간 이식은 항상 어렵기만 했다.
한 바늘, 한 바늘.
가장 굵은 정맥과 간 문맥을 차례로 연결했다. 단면적을 맞췄지만 애초 굵기가 다른 이상 연결 부위에서 급격하게 좁아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 부분에서 혈관에 강한 압력이 걸리겠지만 아이의 혈관은 생각보다 유연하면서도 강하다는 점을 믿자.’
동맥이 남았다.
가장 강한 압력이 작용하는 반면 간 혈관 중에서는 가장 가느다란 구조물이었다. 집중력을 유지하며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끝에야 연결할 수 있었다.
“셀라인! 석션!”
성인 손가락 두세 개 굵기인 복부 대동맥에서 출발한 간 동맥과 소장의 혈류가 모조리 유입되는 간 문맥부터 복부 대정맥과 이어진 간정맥까지 깨끗하게 씻어 낸 후 최종 점검을 시행했다.
이식 성공 여부의 일차 판정이었다.
수술 팀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따르륵! 따가각!
각 혈관을 잡고 있던 혈관 겸자를 풀었다.
동맥과 문맥이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간 조직 구석구석 흘러 들어가던 혈류가 정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검붉은 색으로 쭈글쭈글했던 간이 서서히 밝은 빛을 띠며 탄력을 찾았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서도진 선생, 괜찮지?”
“예. 완벽하네요. 출혈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만족스러웠다.
이번 수술에 담을 의미는 하나가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의 후배 모두 최고의 써전으로 만들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맥이 끊길 것이다. 수술이야 가능하겠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한 발 전진할 때였다.
아이의 간 이식은 뇌사자 기증보다 더 드물기에 집도만을 고집한다면 이식을 담당하는 써전의 실력을 배양시킬 기회가 없었다.
김지훈이 서도진을 보았다.
당당한 써전이 보였다.
“좋아. 담도 연결해.”
“예?”
“자리 안 바꾸고 뭐 해?”
잠시 멈칫거리던 서도진이 재빨리 집도의 자리에 섰다. 비록 일부 과정에 불과했지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에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차근차근 담도를 이었다.
김지훈이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잘하네. 스스로 노력했을 테고, 일석이 혈관 수술도 빠짐없이 참가한 덕이겠지? 이렇게만 가자. 세 달 후에는 내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겠어.’
“타이! 컷!”
마침내 간 이식 주요 과정이 모두 끝났다.
복부 절개창 봉합만 남았다.
그때 수술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온몸이 흠뻑 젖은 손일석이었다.
“배만 닫으면 끝이네.”
“무슨 일이야?”
“서도진 선생 손 보러 들어왔는데 조금 늦었네. 병옥이는 겁도 없는지 훨훨 날았어. 서도진 선생, 어린아이 수술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할 만했어?”
서도진의 눈이 반짝였다.
‘애초 일부분이라도 주실 작정이었구나.’
“쉽지 않네요.”
몇 마디 오가는 사이 김지훈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손일석과 수술 스타일이 서로 다르듯 수술을 끌어가는 분위기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수술이 끝나지 않았고,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서도진 선생, 뭐 하는 거야?”
한마디로 분위기 잡았다.
손일석이 눈을 흘기며 휙 사라졌다.
김지훈이 내심 웃고 말았다.
스승인 이준영 교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수술실에서는 무척 엄격하게 행동했다. 솔직히 신기동 교수에게 배운 손일석의 느긋함은 예외가 분명했다. 이젠 간 이식 수술에서조차 상당한 여유를 갖기 시작했다는 방증일 수도 있었다.
“타이! 컷!”
모든 수술이 끝났다.
드르르르륵!
즉시 중환자실로 옮겼다.
“선생님, 수술은 잘 끝났나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띠! 띠! 띠! 띠!
여기저기에서 심박동음이 울렸다.
주초에 수술한 이식 환자까지 모두 세 명의 환자가 누워 있었지만 꽉 차 보였다. 애초 전문 병원에 맞춰 규모가 크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중환자실이 제대로 유지되는 것 같아 상당히 뿌듯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수시로 환자를 살폈을 김지훈이 여유를 부렸다. 간 이식 경험이 두 자릿수를 넘어가며 수술 팀이 더욱 노련해졌다. 더불어 윤석진과 공정식까지 나와 환자 상태를 확인하며 대처하고 있었다.
‘아침에 나와도 될 텐데 고맙네.’
이제야 물 한 컵 마셨다.
온몸을 덮치는 피로가 조금이나마 가셨다.
‘몇 시지?’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었다.
토요일은 물론 일요일까지 주말을 모두 반납해야 할 상황이었다. 희생이라면 희생일 일의 대가는 환자들이 무사히 회복되는 것뿐이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수정이가 눈을 떴다.
인공호흡기와 충돌하며 파이팅과 동시에 목을 꽉 막은 관이 답답하고 아프다는 몸짓을 했다. 수술 전 심각한 간 부전에 빠지지 않았던 덕인지 무척 빨리 깨어났다.
“수정아, 내 말 들리니?”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발 호흡도 상당히 강했다.
다른 수술이었으면 당장 인공호흡기를 제거했겠지만 열 시간이 넘는 이식 수술을 받은 아이였다. 안전을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했다.
“고경철 선생, 오늘은 파이팅하지 않을 정도로 재우고, 내일 아침에 검사 결과 보고 삽관 제거하자.”
김지훈이 두 명의 환자 모두 안정되는 것을 확인한 후 보호자를 만나 수술 결과와 경과를 설명했다. 자정이 넘어 새벽 한 시가 다 됐을 때였다.
극심한 피로가 느껴졌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했다. 열심히 설명하던 김지훈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같은 수술을 했으니 같은 말이 나와야 하는데 손일석과 결이 약간 달랐다.
‘저런 점이 있구나.’
단순하게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환자 나이, 성별, 이식 수술 종류 등에 따라 많은 조건이 변하는 이상 절대 관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감사합니다.”
보호자의 목소리에 눈물이 섞여 있었다.
이로써 주말에 시행된 간 이식이 모두 끝났다.
드디어 퇴근이다.
토요일 오전 여덟 시에 출근했으니 정확히 열여덟 시간 만이었다. 함께 병원을 나서던 손일석이 굳은 어깨를 휘휘 돌리며 중얼거렸다.
“자식들 빨리 독립시켜야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네. 새로운 수술 팀 구성이 늦어져 이렇게 쭉 수술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어. 도진이하고 혁원이는 충분하지?”
“병옥이나 진우보다 빠르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우리 팀이 훨씬 빠를 수밖에 없어. 누가 가르치는지 세상이 다 아는데 어디서 망발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얼레? 한 번 해 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라이벌에 라이벌이 겹쳤다.
써전 대 써전으로서 경쟁하는 동시에 누가 후배들을 최고의 써전으로 길러 내는지까지 경쟁이 붙었다. 이것이야말로 자존심 싸움이었다.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 사이의 보이지 않던 긴장을 제자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길이 갈라질 때까지 티격태격 말싸움이 멈추지 않았다.
잠깐 눈 붙인 사이에 날이 밝았다.
김지훈이 아직도 꿈나라에 빠져 있는 고경아와 희연이를 보며 고양이처럼 빠져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중환자실을 들르기 전 겸사겸사 홀로 회진을 돌았다.
무심코 병실 문을 열다 말고 깜짝 놀랐다.
“왜 여기 계세요?”
월요일에 돌아오기로 한 송진순 환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신혼여행을 갈 수 없는 새 신랑, 새 신부에 온 가족이 다 모여 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에요.”
특별히 아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