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큰 걱정거리를 덜었지만 새로운 걱정이 다가왔다. 그동안 신경을 쓰긴 했지만 막상 민정호가 정한득을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괜찮겠습니까?”
“차등 수가 문제는 걱정할 이유가 없어진 것으로 보는데 뭐가 말입니까?”
“진상건 이사장이 가만히 있을까요?”
“당연히 격한 반응을 보일 겁니다.”
“부원장님 신상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요?”
“예측하기 힘들지만 계약서를 꼼꼼하게 작성하면 맺는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이 해지입니다. 개인적으로 큰 손해를 입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돈 문제만이 아니었다.
전문 병원은 민정호가 평생 몸담을 직장이 아니었다. 언젠가 떠나야 할 텐데 진상건의 위세를 생각하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순탄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의료진 이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마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직접 안 나섰어도 됐을 텐데, 입장 곤란한 일까지 맡겨 미안하게 됐습니다.”
“미안한 일이 아닙니다. 전 계약에 따라 해야 할 일을 이행할 뿐입니다.”
“보통 사람은 계약이라는 것으로 모든 일을 해석하지 않죠. 감정적인 문제는 특히 그렇고요.”
“과장님, 오늘 일로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감정은 사소한 일로도 바뀌지 않습니까? 계약서 성격만 달랐어도 지금쯤 서로 얼굴 붉혔을지도 모릅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격이라니요?”
“손에 피 묻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 때 즐겨 쓰는 방법이 계약은 상식적으로 맺은 후, 자신의 진짜 목적을 달성할 경우 상당한 추가 보수를 보장하는 단서 조항을 만들어 놓는 겁니다. 숨은 의도를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은 특히 더하지요.”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이 없다는 말입니까?”
“계약서만 보면 그렇습니다. 진상건 이사장님은 전문 병원 문제를 철저하게 자신과 무관한 일로 처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계약서 뒤에 숨을 수밖에 없다면 본인이 원하는 내용을 완벽하게 체결할 수 없겠죠?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신 거죠.”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민정호가 감정을 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간 오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민 부원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고요.”
“다른 사람보다는 정확하게 보고 계십니다. 사실 진상건 이사장님도 저에 대해 많이 아는 편이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문서화되지 않은 한 말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도 제대로 모르고 계시니까요.”
“구두 계약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군요. 솔직히 지금 모습을 보면 폐업 내용이 문서화됐다고 해도 도장을 찍었을 것 같진 않네요.”
“현재라는 결과를 빤히 알고 있는데 지난 일을 가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내용을 떠나 원칙은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
김지훈은 모르지만 민정호는 성공 보수를 약속하는 추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 이유는 오직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김지훈이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미련한 건지, 민정호가 팔색조인지 몰라도 알면 알수록 명확해지면서도 모호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계약에 목을 매는 것은 개인적 원칙이라 쳐도, 온갖 불이익까지 감수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파기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흔치 않은 사람이네.’
“알 듯 말 듯 하네요. 그건 그렇고, 정한득과 진상건 문제를 이대로 끝낼 겁니까?”
“제 말을 신중하게 듣지 않으셨군요. 진상건 이사장님은 이 정도 문제로 얽혀 들 사람이 아닙니다. 잔챙이에 불과한 정한득을 잡아 봐야 병원에 도움 될 일이 없습니다. 지금은 병원 존립이 최종 목적이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잔챙이인지는 몰라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쯤 연락을 했을 테고, 이사장 역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텐데 노골적으로 나선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민 부원장님과 병원에 더 큰 압력이 가해지지 않을까요?”
민정호의 눈가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걱정이지만 제 대답은 동일합니다. 계약 이행이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아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제가 정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시한은 이제 겁나는 말이 아니네요. 도리어 그때까지는 확실히 함께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진상건 이사장을 언급할 때마다 존대를 쓰네요. 혹시 존경할 구석이라도 있습니까?”
“고객입니다.”
때 아닌 웃음이 터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다는 사실에 연거푸 터지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손님은 왕인데 배신한 거 아닌가요?”
“제 일에는 감정이 필요 없습니다. 기분까지 완벽하게 맞출 이유가 없고요.”
“그러네요. 기분까지 무조건 맞춰 줘야 한다면 진상 고객이라는 말도 없었겠죠. 근데 참 안 어울리네. 농담하는 거 아니죠?”
“그렇게 보이십니까?”
여전히 진지하게 보였다.
김지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비 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어려운 일을 함께하는 동안 서로의 관계가 무척 발전했다. 딱딱하기만 했던 대화가 여느 사람과 나누는 대화와 별반 다르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제법 늦었다.
간만에 술을 먹은 데다 수정방이 의외로 독한지 알딸딸해지며 몸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일 있을 간 이식 수술에 대비해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늦었네요. 갑시다. 어후! 언제 집에 가지?”
민정호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출장 처리했습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모범택시 타고 가시죠. 그럼 이만!”
민정호가 홱 돌아섰다.
모범택시란 말이 이유 모르게 즐거웠다.
정한득이 발악을 할지 모르지만 민정호가 회의에 참석하는 이상 변수는 없을 것이다. 봉투를 확인한 후에는 더 즐거워졌다.
‘택시비 내고도 많이 남네.’
이제 토요일 오후에 벌어질 간 이식 수술에 모든 힘을 쏟아부을 때였다. 불안과 걱정을 덜은 이상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
***
아침이 밝았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날이다.
차분해야 할 병동이 어수선했다.
수혜자 수술 팀 전체가 모여 연락을 기다렸고, 남은 의국원은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 할 주말 집담회를 준비하면서도 귀를 닫지 못했다.
가족의 동의가 있었다 해도 기증자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금씩 지쳐 가다 다시 힘을 찾은 환자와 보호자들의 초조함도 극에 달했을 것이다.
‘지금쯤 적출 수술이 시작돼야 하는데.’
연거푸 미뤄졌던 기증이기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왜 연락이 안 오지?”
“마지막 길인데 예정된 시간에 바로 시작할 수 있겠어? 현수하고 민 부원장은 출발했지?”
“회진 끝나자마자 출발했어. 정한득이 막판에 분탕질을 치지 말아야 하는데 신경 쓰이네. 그 집안 성향이 안 좋잖아. 김 과장이 어제 일 말씀드릴 때 송재덕 선생님 얼굴 보니까 삐끗하면 야야야 터질 것 같더라. 그렇게 보면 이준영 선생님은 참 잘 참으시는 편이야.”
“언제 화내시는 거 본 적 있어? 그런 분이 터지면 더 무서운 법이다.”
“흐유! 그 주먹에 맞으면…….”
손일석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까지 상상하며 불안을 덜어 내는 순간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수술 시작한다고요. 알겠습니다. 장기 건강성 판정되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드디어 첫 고비를 넘겼다.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아홉 시였다.
“이혁원 선생, 송진우 선생, 절제까지 네 시간 예상한다니까 열두 시에 환자 내릴 수 있도록 준비해. 간이 절제됐다는 연락을 받는 즉시 수술에 들어가야 된다는 사실 잊지 마.”
“이송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119 차량으로 와도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리겠지. 간을 손보는 시간까지 따져도 빠듯하니까, 다들 바짝 정신 차려야 돼.”
간 적출, 이송, 이식 수술이 유기적으로 착착 맞아떨어져야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계속 연락을 취하며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이제 기증자의 간이 사전에 검사한 대로 건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개복 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문제가 보인다면 최악의 경우 수혜자 두 명 모두 이식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무척 드문 일이긴 했지만 배제할 수 없었다. 기증자의 상태는 물론 검사 결과까지 통보만 받은 상황인 탓에 불안이 가중됐다.
다들 수술방 휴게실에 모여 이식 가능 여부에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연락이 오기만을 고대했다.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김 과장, 설마 검사에 잡히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신장 이식 때 간혹 그런 경우를 봐서 그런지 되게 불안하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소리 마. 기증자가 평소 건강했던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자.”
이제나저제나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째깍! 째깍!
열 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보세요?”
(간 상태 양호합니다. 예정대로 진행해 주세요.)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 과장, 뭐래?”
“문제없대. 고경철 선생, 병동에 연락해서 환자 수술 준비 시작하라고 해.”
대략 두 시간 반 정도 남았다.
마음을 다잡고 수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좀처럼 시간이 가질 않았다. 정신이 분산되는 일을 막기 위해 주말 집담회를 참석하지 않은 탓인지도 몰랐다.
땡!
마침내 열두 시 종이 울렸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간이 도착했을 때 이식 수술을 최대한 빨리 이어 갈 수 있었다.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김지훈은 잊지 않았다.
두 명의 환자가 내려왔다.
김지훈이 수술 팀은 물론 환자의 가족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다들 경황이 없겠지만 어떻게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는지 잊는다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수술 들어가기 전에 간략하게나마 여러 사람에게 생명을 나눠 주신 기증자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으면 합니다. 아울러 정말 힘든 결정을 내린 가족분들의 슬픔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추모의 자리를 가졌다.
비록 오 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떠난 기증자에게 감사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더불어 한 알의 밀알처럼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이 재고되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부디 편안하시길.’
두 명의 환자가 수술실로 옮겨졌다.
두 개의 방에서 동시에 마취가 시작됐다.
열두 살 아이가 수술대 위에 누웠다.
수술실을 감도는 건조한 공기, 차갑게 빛나는 무영등,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갖가지 장비, 눈만 내놓은 의료진의 낯선 모습에 겁에 질렸다.
“수정아, 여기 볼까?”
아이의 시선을 돌린 윤서연이 간호사에게 눈짓을 하며 신중하게 마취를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노련한 손길에 두려움이 살짝 깎였다.
힘든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아무리 빨라도 밤 열 시가 넘어서야 수술이 끝날 것이다. 평소 정규 수술 중에는 마취과 역시 간호사처럼 교대를 해 왔다. 하지만 이번 수술은 주말에 벌어지는 데다 12살 어린아이기에 예외였다.
써전과 똑같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정맥 마취가 끝났다.
“수정아, 졸리면 자도 돼. 숫자 세어 볼까?”
“하나, 둘, 세…….”
잔뜩 긴장했던 아이의 눈이 감겼다.
인공호흡기가 가냘픈 숨을 대신했다.
띠! 띠! 띠! 띠! 띠!
바이탈은 안정적이었다.
의료진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긴 아이는 무척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수술 팀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에 정확하게 간이 절제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개복한 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술실 또한 완벽한 무균 상태가 아니었다. 섣불리 열었다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감염의 우려가 너무 큰 탓이었다.
이내 오후 한 시가 가까워졌다.
마취한 지 불과 십 분도 안 지났건만 한없이 긴 시간이었다. 상당히 실력 있는 써전이라 해도 돌발 변수까지 제어할 수 없기에 은근히 불안했다.
그때 숨죽인 발소리가 들렸다.
“과장님, 간 모두 절제됐대요. 우엽과 좌엽을 분리한 채로 이송하니까 바로 시작하셔도 좋다고 연락 왔어요.”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온갖 고비를 거쳐 드디어 이식 수술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 이제 아이의 우측 간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건강한 간을 심으면 된다.
“마취과, 수술 시작합니다.”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메스!”
열두 살 아이의 배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