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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12화 (1,112/1,329)

18화

어떤 상황에서든 싫은 놈은 싫은 법이었다.

특히 정갑수는 확실하게 잊고 싶은 인간이었다.

당연히 정한득을 친구 아버지로 대우를 할 생각 또한 티끌만치도 없었다. 더구나 민정호와 나눈 말이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꾹 참고 술 한 잔 따랐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더 아프다고 했지? 잠깐이라도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한 잔 따르겠습니다.”

정한득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세상 뻣뻣하던 놈이 꼬리를 말았구나. 환자가 늘었다고 해도 여전히 적자란 사실에 살길을 찾는 건가? 하긴 나이를 먹었는데 천지 분간을 못하면 안 되지.’

“김 과장이 따라 주니까 술맛이 훨씬 좋네. 다 같이 합심해서 잘살면 그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했다고 욕하는 인간이 이상한 거 아니야?”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김지훈이 지그시 이를 물었다.

연장자라는 사실은 차치하고 악연이라 해도 무방한 관계였다. 기분이 나쁘다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민정호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대꾸할 상황이 아니었다.

술 몇 잔 오갔다.

정한득의 얼굴이 발개졌다.

높은 도수에 술기운이 슬슬 도는 데다 김지훈과 민정호 모두 순순히 자신의 말만 듣자 기가 살았다.

“김 과장, 오늘 왜 왔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 원한다면 좋은 자리 하나 추천해 줄 수도 있어. 이왕이면 큰물에서 놀아야지. 이사장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본원으로 복귀하는 것도 좋고 말이야. 갑수하고 얽힌 일은 깨끗이 잊고 서로 도우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겠어?”

“아직도 의료계에 영향력이 꽤 크신 모양입니다.”

“위원장 자리 아무나 차는 거 아니야. 정책 결정에 필요한 능력을 다 갖춰야 가능한 일이야. 은퇴할 날이 곧 오겠지만 그때까지 김 과장 키워 줄 정도는 돼. 어때? 이사장님과 자리 한번 만들어 줄까?”

‘이 인간 정말 답이 없네. 확 들이받을까? 이쯤이면 본론으로 들어가도 좋을 텐데 민 부원장은 왜 지켜만 보고 있는 거야?’

정한득이 완전히 자기 세계에 빠졌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이 있어. 이준영 교수나 신현수나 김 과장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다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거지. 지금이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함께하면 그깟 욕 몇 마디 먹는 게 대수겠어?”

스승과 친구를 건드렸다.

사전에 오간 말이 있다지만 김지훈이 참을 수 있는 선을 넘었다. 발끈하려는 순간 술은 입에도 대지 않던 민정호가 김지훈에게 술을 권했다.

“과장님, 잔이 비었습니다.”

‘어후! 지금도 참아야 하나?’

“한 잔 드시고 진정하시죠.”

‘진정하라고? 정한득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겠지? 시작할 때가 됐다는 소리네.’

민정호의 눈길이 서서히 정한득에게 향했다.

‘은밀하게 알아봤다고 해도 여기저기 들쑤실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상황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게 확실해. 오늘 중으로는 대처할 시간이 없을 테니 생각보다 쉽게 풀리겠어.’

정한득을 압박하는 것은 곧 진상건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오늘부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에 발을 내딛는 상황과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진상건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기에 대처할 틈을 줄 수 없었다. 내내 입을 다문 이유도 최대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탐색이었다.

“위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야 할 말이 생각났나?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한 이유가 있겠지? 들을 준비가 돼 있으니까 어서 말해 봐. 혹시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정한득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기대 만발이었다.

민정호가 문제의 서류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김지훈의 입가가 말렸다.

“각 병원에서 보낸 자료를 모두 검토하셨을 텐데 내부적으로 결정이 났습니까?”

“어느 정도 윤곽은 잡혔는데, 설마 그 일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건 아니겠지?”

“진상건 이사장님을 비롯해 우리 모두의 관심사 아니겠습니까? 결과를 알 수 있을까요?”

“걱정할 필요 없어. 김 과장은 아쉬울 수도 있지만 그게 현실이야. 수가 결정 때 이미 한계를 느꼈을 테고, 이 자리에 온 이유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행여 결론이 바뀔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으면 빨리 접고 받아들여. 그래서 온 거 아닌가?”

김지훈이 술잔을 비웠다.

지금이야말로 여유를 보일 때였다.

“한 잔 받으시죠.”

“오! 좋지. 김 과장도 이제 눈을 뜬 모양이야. 허허허! 시간 앞에 장사 없다더니 변할 때도 됐지.”

‘무식한 놈!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니잖아? 침착하자. 감정을 죽이고 여유 있게 행동하자.’

“피할 수 없는 구석에 몰리면 자의든 타의든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잃을 게 하나도 없으면 모를까, 극히 드물다고 봅니다. 하지만 반대로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탈인 경우도 있겠죠? 아니면 욕심이 과하기 때문일까요?”

속으로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 잔 더 따르면서도 은연중 자신만만 태도를 보이자 정한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요상하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도 인생 경험이 쌓였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욕심을 부리면서 줄까지 잘못 서면 패가망신밖에 더 남겠습니까?”

정한득의 낯빛이 변했다.

생각지도 않은 말이었다.

민정호가 이때다 하고 치고 들어왔다.

“위원장님,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내일 열릴 차등 수가 위원회를 공평하게 객관적으로 이끌어 주시면 됩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결정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김지훈이 슬쩍 인상을 썼다.

‘이 정도 뜸을 들였으면 한 방에 쓰러트려야지. 누가 봐도 너무 약해. 민정호답지 않아.’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습니까? 수가 결정 당시 하신 말씀 중 주관이 많이 들어간 발언이 있었는데 오해였던 모양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 건가요?”

“자네도 상황을 잘 알면서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게다가 수가 결정은 위원회 소관인데 주관이니 뭐니 하면 서로가 곤란해져. 옳고 그른 일은 또 뭐야?”

“이미 곤란해졌습니다.”

김지훈과 민정호의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정한득의 눈가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불안해하면서 진의를 파악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분은 위원장님이시네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씀드리는 겁니다. 당황하지 말고 제가 가져온 자료부터 확인해 보십시오. 흥미로우실 겁니다.”

“흥미롭다니?”

“당사자에겐 괴로울 수도 있겠군요.”

정한득이 거칠게 서류를 잡았다.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손이 달달 떨렸다.

민정호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본원에까지 손해를 끼치셨더군요. 편법과 불법을 오간 이상 이 문건이 검찰 손에 들어가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여럿 있을 겁니다. 그중에서도 위원장님이 특별한 처지에 빠질 것 같습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너 죽고 싶어?”

“말씀이 험하십니다. 누구나 잘못을 하면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세상 아닙니까? 피하고 싶었다면 이사장님의 철저한 일 처리를 먼저 배우셨어야죠.”

정한득이 강하게 손을 저었다.

“설마 민 부원장도 이걸 믿는 건 아니겠지?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몰라도 날 음해하려는 수작이야. 그놈이 누구야? 설마 너야?”

얼굴까지 시뻘게졌다.

잔뜩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자체로 시인한 것과 다름없었다.

민정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내게 정보를 준 사람이 위원장님을 무고했다는 말인데 더더욱 진실을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 과장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번 해코지한 사람이 두 번째라고 못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민 부원장님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따로 들은 말이 있어서 판단하기 어렵네요.”

“정말입니까?”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형님께서 확실하게 판별해 주지 않을까요? 억울한 사람을 절대 외면하지 않는 분이라서요.”

“대검에 있다는 그분 말입니까? 그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있을까요? 거짓으로 판명돼도 사람 평판에 큰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자칫 위원장님이 재기 불능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의외로 죽이 척척 맞았다.

김지훈이 남은 술잔을 비우며 깍지를 꼈다.

고민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정한득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법이었다.

과거 일까지 떠오른 정한득이 혼란에 빠졌다.

‘저놈과 관련이 있는 검사라면 진평호 회장과 금경태를 잡아넣은 놈이잖아? 나도 속았다고 끝까지 우겨 간신히 빠져나왔는데 또 걸려 들어간다면…….’

처세에 능한 사람일수록 빠져나갈 구멍이나 안전판을 만들어 놓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정신줄 풀고 있다 제대로 한 방 먹은 데다 진상건과 상의할 시간조차 없었다.

일단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아무튼 모조리 거짓말이야. 술기운에 할 말이 아니니까, 다음에 얘기하세. 민 부원장은 그놈이 누군지 내게 알려 줘. 해명할 수 있어.”

“화를 내도 부족할 판에 해명이라고 하셨습니까? 실수하셨네요. 이렇게 자리를 피하면 내일 아침 관할 검찰청에 직접 고소하겠습니다.”

“왜 이래? 같은 배를 탄 식구잖아.”

“식구는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일어나시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김지훈이 정한득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앉으시죠.”

“김지훈! 너…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예전 일을 잘 피해 위원장까지 맡은 분이 어떤 상황인지 판단을 못하시다니 실망입니다. 앉으세요. 할 얘기가 남았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부들부들 떨던 정한득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진상건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잘 알 텐데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도…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별거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내일 공정한 결과가 도출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게 다야?”

“김 과장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전 계약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명백한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막론하고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했다. 굳이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정의 구현을 부르짖을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민 부원장님!”

“술잔이 비었네요. 한 잔 더 하시죠.”

맡겨 달라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불만과 의문을 꾹꾹 눌렀다.

민정호가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위원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마든지 공정하게 진행하지. 그렇다고 네놈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 같아?”

“위원들이 잘못 판단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위원장님에게 있을 테니 나올 수밖에 없고, 반드시 나와야 합니다.”

“협박하는 거야?”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럼 이 서류들을 모조리 없애. 특히 공적인 문서는 다 태워 버려. 그래야 협조할 수 있어.”

민정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곤란합니다. 단, 이 문서들이 함부로 공개되진 않을 겁니다. 개인적인 감정도 없고요. 김 과장님도 제 제안에 동의하실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믿자.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낼 수는 없어.’

“동의합니다만, 그 전에 내일부로 위원회에서 손을 떼야죠. 물론 진상건 이사장과도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 병원에 해를 끼치는 일에 손가락 하나라도 얹으면 위원장님의 남은 인생이 편치 못할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 힘 다 빠지고 난 후 네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누가 알아? 너 죽고 나 죽자는 소리밖에 안 돼.”

김지훈이 웃었다.

“위원장님은 죽을 수 있지만 차등 수가에 걸려든다고 해도 우린 안 죽습니다. 억울하십니까? 남들에게 못할 짓을 한 대가니 감수하세요.”

“으으으!”

정한득이 신음을 터트렸다.

민정호가 탁탁 서류를 정리해 정한득에게 넘겼다.

“찬찬히 확인해 보시죠. 말씀드린 대로 위원장님 문제로 공개되는 일은 없습니다. 계약이 끝나면 제가 개입할 일도 없고요. 김 과장님 역시 병원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나서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믿어?”

“다른 선택이 있습니까? 있으면 해 보시죠. 얼마든지 대응해 드리겠습니다. 잘 판단하십시오. 내일 회의 때 뵙겠습니다. 과장님, 가시죠. 그럼 이만!”

특유의 습관 나왔다.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매몰차게 돌아서는 모습에 오히려 더 강한 압박을 느낄 상황이었다. 극심한 혼란에 빠져 혼자 고민하게 놔두는 편이 나았다. 설령 진상건과 상의한다고 해도 수습할 시간이 없는 이상 소리만 지르고 말 상황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김지훈이 정한득을 노려보았다.

“정갑수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야 알았네요.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란 말을 잊지 마세요.”

“네놈이 끝까지…….”

“아들 친구가 아니고, 친구였던 적도 없습니다. 그나마 연장자로 대우할 때 말씀 가려 하세요. 객관적 근거하에 공평하게 결론을 내야만 당신이 살 겁니다. 잊지 마세요.”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죄짓지 말고 조용히 살기를 바랍니다.’

공평하게 심사를 진행한다면 차등 수가에 절대 걸려들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미 각 병원 상황을 알아보았기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정한득도 이미 알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김지훈이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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