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왜?”
(연락 없었어?)
“연락 오는 대로 알려 줄 테니까 오늘은 전화하지 마. 깜짝 놀랐잖아.”
(나도 수혜자 수술 팀을 맡고 있는데…….)
“일석아, 우리 침착해지자. 끊는다.”
손일석도 안달이 났겠지만 모든 결정은 기증자 가족에게 달렸다. 난리친다고 변할 일이 없는 이상 침착하게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생각과 말뿐이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밥을 다 먹은 후에도, 희연이와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마님의 눈치를 보는 순간에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 나라의 어린이와는 전혀 다르게 늦게 자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희연이가 꿈나라로 달려갔다. 고경아가 몇 번이나 안 잔다고 목소리를 높인 후였다.
온 세상이 잠들 때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끌리면 대개 기증 의사가 번복되던데 잘못된 거 아니야? 문자로 보내도 좋다고 했는데 너무 늦어서 연락을 안 하나?’
점점 심해지는 불안에 김지훈이 거실을 어슬렁거리며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 못했다. 어느덧 시곗바늘이 열두 시에 가까워졌다.
입맛이 썼다.
입원한 채 기증만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얼굴과 동시에 희망 고문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대로 취소된다면 엄청난 절망에 빠질 수 있었다. 애초 기증이란 말 자체를 듣지 않은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내일도 결정이 안 되면 환자들에게 뭐라고 하지? 차라리 깨끗하게 포기하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에휴! 정말 편할까?’
갈팡질팡 생각만으로도 상당히 갑갑했다.
생각 외로 긴 밤이 지났다.
다음 날 아침에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해당 병원에 전화를 해 알아보았지만 말끝을 흐릴 뿐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다. 공공 기관에서 기증 관리를 담당하는 직원 역시 기다려 보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보호자를 만났다.
“뇌사 판정까지 모두 끝났지만 가족 전체 동의를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 이대로 기다리기만 해야 하나요?”
12살 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관련 종사자 모두 기증 절차를 대신 진행할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결정 권한이 없어 답답할 따름이었다.
더구나 사오 일 이상 시간이 끌리면 기증 의사가 철회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막연히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입원비만 허공에 날리는 꼴이었다.
“하루만 더 기다리죠.”
“하루요? 하루?”
아픈 자식을 보며 기다린 세월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의 하루는 긍정보다 부정의 의미가 강했다. 가슴이 찢어지고도 남았다.
보호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수술만 받으면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 딸을 차마 볼 수 없을 것이다. 12살이라지만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 어린아이기에 의사의 역할도 한계가 뚜렷했다.
“뇌사에 빠진 분 역시 더없이 소중한 자식일 겁니다. 부모님 마음은 더 아플 테고요. 이해해 주시고, 수정이에겐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담당 환자에게 똑같은 소리를 했을 손일석 역시 눈가에 그늘이 깔려 있었다. 환자는 물론 가족과 의사에게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답답한 마음과 달리 일과는 어떤 문제도 없이 정상적으로 굴러가야 했다. 더구나 수술실에서는 잡념 자체를 지워야 안전하기 마련이었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집도의 자리에 선 서도훈이 묵묵히 수술에만 집중했다. 수술이 끝나고 난 후에야 전후 사정을 물었다.
“기다리는 일이 무척 힘드네.”
무거운 기운만 감돌았다.
어느새 정한득을 만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른 오후 회진을 돌았다.
무사히 회복되는 환자들 덕분에 마음이 다소 편해졌고, 송진순 환자는 또 다른 의미의 편안함을 전했다. 결혼식 참가 때문에 아예 퇴원을 권유했지만 본인이 극구 이틀간의 외박을 요청해 허락한 참이었다.
“벌써 가실 준비를 다 하셨네요. 잘 다녀오세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송진순 환자가 고운 차림으로 웃었다.
안색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잠시나마 행복해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편으로 외박 내내 잘 버틸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적지 않았다.
특히 언제 심해질지 모를 통증이 문제였다.
김지훈이 가족 중 한 명에게 조용히 말했다.
“경구용 진통제를 꼭 가져가세요. 통증을 느끼시는 기색을 보이면 바로 두 알을 복용하게 해야 합니다. 마약성 진통제라고 용량을 줄이면 조절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유의하세요.”
“알겠습니다.”
겸사겸사 막내딸 결혼식을 축하한다는 말과 달달한 주스를 맞바꿨다. 병실을 울리는 수다 속에 당사자보다 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엄마와 언니들이 보였다.
왠지 즐거웠다.
아무 일 없을 것이라 믿었다.
회진을 마쳤다.
서울로 갈 채비를 할 때가 돼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민정호는 김지훈의 착잡한 안색을 보면서도 조용히 출발 준비만 했다. 하긴 감정을 드러낼 사람도 아니었다.
신현수가 등을 툭 쳤다.
“걱정하지 말고, 정한득이나 잘 만나고 와.”
“취소됐다는 말도 없는데 지레 실망할 필요 있겠어? 답답한 마음 정한득에게 모조리 시원하게 쏟고 와. 민 부원장님, 가면서 우리 김 과장 기분 좀 풀어 주시죠.”
민정호가 힐끗 눈길만 주었다.
“하하하! 불가능한가? 노력 좀 합시다.”
말할 사람이 따로 있지 민정호에게 부탁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반응에 멋쩍어할 손일석이 아니었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뇌사자 장기 이식을 두고 무척 많은 이들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환자에게 미안하고, 병원 입장에서도 좋을 일이 하나도 없네. 두 건이라도 더 하면 정한득이 아예 수작을 부리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 점도 아쉽다.’
김지훈이 내심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제 집중해야 할 일은 정한득을 잘 처리하고, 차등 수가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출발할 시간이 됐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익숙하지 않지만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번호였다.
거의 나흘이 지난 이상 또 결정이 연기됐다는 말을 들을 시점이 아니었다. 동의냐, 철회냐 둘 중의 한마디를 전하는 전화가 분명했다.
긴장이 확 다가왔다.
‘드디어 결정이 났나?’
“얼굴이 왜 그래? 누구야?”
“장기 관리 센터.”
손일석과 신현수도 흠칫 놀라며 귀를 기울였다.
“여보세요?”
김지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목소리를 죽인 채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눈가를 찡그렸다. 궁금해하는 손일석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느 쪽일까?
“우와!”
돌연 괴성이 울렸다.
결론 났다.
손일석이 후다닥 병실로 향했다.
“일석아, 내일 수술이다. 수술 팀들에게 모두 알리고, 수정이 부모님에게도 설명 부탁해.”
“오케이! 걱정하지 마. 정한득이나 확실히 깨 버려. 손버릇 나쁜 놈 놔뒀더니 거덜을 내는 꼴이잖아. 오냐오냐했더니 어디서 할아버지 수염을 뽑아?”
적절하지 않은 듯 적절한 비유였다.
손일석이 간만에 입담을 털어 낼 만큼 오랜 기다림이 오히려 기쁨을 배가시켰다. 좋아 죽는 김지훈과 신현수를 보는 민정호의 눈빛도 평소와 달랐다.
운이 따른다는 생각을 하는 건지, 똑같은 환자일 뿐인데 자기 일처럼 너무 기뻐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몰라도 전에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부르릉!
차 소리마저 힘찼다.
민정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기쁘십니까?”
“환자와 가족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는데 기쁘죠. 시간이 끌리긴 했지만 기증을 결정한 분들에게도 정말 감사하네요. 병원에도 큰 도움이 되겠죠?”
“이번 주에 국한하면 그렇습니다.”
“가끔이라도 오늘 같은 일이 겹치면 플러스마이너스 해서 대충 한 단계 올라설 것 같은데 아닌가요?”
“병원 경영을 주먹구구로 한다면 모를까, 불확실한 일을 두고 단계 운운하는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최소 확률로 따질 수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초 치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수술 중에는 항상 냉정해야 하는 것처럼 민정호 역시 자신의 영역 내에서는 냉철함을 유지할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자 배워야 할 태도였다.
어차피 호응받기 틀렸다.
김지훈이 화제를 돌렸다.
당면한 일이기도 했다.
“정한득에겐 뭐라고 할 생각입니까?”
“정한득 위원장이 중식을 좋아한다고 해서 중식집을 잡았습니다. 잔 권하고, 술 드시면서 지켜보시면 됩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요?”
“필요할 때는 해야겠지만 과장님은 병원을 대표한다는 자세만 보여 주시면 충분합니다. 가급적 여유롭게 보여야 정한득 위원장이 더 궁지에 몰릴 겁니다.”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겼다.
“뭔가 더 있다는 인상을 주라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과장님도 많이 발전하셨네요. 중식집에서도 지금과 같은 태도를 쭉 유지해 주십시오. 아주 좋습니다.”
왠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칭찬하는 말처럼 들렸다. 나이가 적을뿐더러 부원장이라 해도 행정직과 의료직의 직급이 엄연히 다른데 말이다.
‘근데 왜 기분이 안 나쁘지? 이런 일도 경험하고, 배워야 의료 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일까? 그런 면에서 보면 민 부원장도…….’
“민 부원장님도 많이 변하셨네요.”
“전 변한 거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단어 선택을 달리할 뿐입니다. 오히려 과장님이 변하신 거죠.”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죠. 내가 변했다는 사실을 일부분 인정하지만 사람들 대부분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자신이 변했다는 말은 쉽게 하지 않더라고요.”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인정하는 걸까?
서울로 가는 내내 정한득을 두고도 무언가 초점이 어긋난 것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남자들끼리, 혹은 직장 동료로서 내밀한 속을 보일 상황이 아니었지만 상대가 민정호기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마치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의 관계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의 치부를 드러내 이득을 취하는 일이 께름칙할 수밖에 없는 김지훈의 얼굴이 편해지고 있었다. 때론 몽둥이가 약인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나쁜 놈을 만나야 하는 장소치고는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직원들도 못 먹이는 요리를 정한득 입 속에 넣어 줘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에휴! 평소 이런 식당을 애용한다는 말이겠지? 왜 나쁜 놈들이 더 잘 먹고 잘사는 걸까?’
참아야 할 일이었다.
예약된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도착해 있던 정한득이 깜짝 놀랐다.
“민 부원장, 우리 둘이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
“병원과 관련된 일이라 과장님과 함께 왔습니다.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시키시죠. 여기 코스 요리가 먹을 만합니다. 술은 무엇으로 하실까요?”
정한득이 상당히 찜찜한 얼굴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대세에 지장을 줄 시점이 아니었다. 이미 수가 위원회 위원들과 입을 맞춘 이상 칼자루를 쥔 사람은 자신이었고, 김지훈은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라 여겼다.
‘김지훈을 데리고 오다니 생각도 못했어. 요새 전문 병원 환자가 늘어 진 이사장이 짜증을 내던데 김지훈을 끌어들여 확실하게 처리할 생각인가? 한 번 실패했다지만 좋은 생각이야.’
김지훈만 빼내도 전문 병원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남은 인원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면 궤도에 오를 수도 있지만 그 전에 게임이 끝날 것이다. 설령 틀린 판단이라고 해도 막판의 사소한 변수일 뿐이었다.
정한득이 여유를 찾았다.
“수정방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삼대 명주 중 하나를 고르시다니 역시 안목이 있으십니다.”
식사가 시작됐다.
민정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술은 김지훈의 몫이었다.
술맛은 분위기에 좌우되기 마련이었다. 마치 아들의 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구는 정한득 때문에 양주 이상으로 비싸다는 수정방이 소주보다 못했다.
울컥 치미는 화를 참아야 했다.
“김 과장, 차등 수가 결정이 내일인데 환자가 좀 늘었나요? 수술이 몇 건 있었다고 해도 다른 병원에 비해 규모가 너무 작아서 걱정이 됩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허허! 그럴 겁니다. 전문 병원을 표방한다고 해서 사람들 인식이 한순간에 바뀌진 않겠지요. 그건 그렇고, 술자리에서 아들 친구한테 말을 높이자니 어색하네.”
아직은 터트릴 때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헛기침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