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09화 (1,109/1,329)

15화

신현수의 눈빛이 으스스해졌다.

정한득이 진상건과 결탁했다.

재산과 사회적 위치의 차이를 생각하면 결탁이 아니라 경제적 이득을 좇아 스스로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대가는 역시 돈이었다.

문제는 단순히 정한득의 욕심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민정호의 자료에는 분명 넓은 부지를 확보한 전문 병원을 폐업시킨 후 개발해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이권을 일부 공유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진상건에게 선대 이사장과 진평호와의 악연은 곁가지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목표는 돈이었고, 병원 전체와 재단은 도구일 뿐이었다.

여파는 전문 병원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헛짚었어. 아버님과 내게 복수하려는 게 아니라 결국 돈이었구나. 우리 병원만이 아니라 재단이 가진 모든 알맹이를 빼먹으려는 속셈이었어.’

치를 떨고도 남았다.

신현수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민 부원장님, 진상건과 동조한 인간 모두 비밀에 부쳤을 일인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누구와 계약을 했는지 잊으셨습니까? 저 역시 일정 부분에서는 당사자 내지 협조하는 사람 중 한 명일 수 있습니다.”

“이권과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권을 노리고 있다면 애초 꺼내지 않았을 말이었다. 민정호라면 어떤 잡음도 없이 더욱 치밀하게 상황을 만들어 끌고 나갔을 것이다.

“진상건 이사장님 시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물론 폐업을 하게 되면 현실이 될 수도 있고요.”

“폐업이라니요?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신현수가 지나치게 흥분했다.

김지훈이 툭 어깨를 치며 눈짓을 했다.

‘진정해.’

“보통 사안이 아닌데 증거가 있습니까?”

“솔직히 내 자신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녹음을 했지만 객관적인 물적 증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금경태 일로 경험이 있는 김지훈이었다.

대단히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지만 법이 인정하는 테두리 안일 경우였다. 불법적으로 얻었다면 벌집만 쑤신 꼴이 될 수도 있었다.

“합법적이지 않다는 말입니까?”

“대화 당사자가 아니었으니까 아마 상당 부분이 불법일 겁니다. 고소나 고발을 할 근거가 안 된다는 말이죠.”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간 이룬 성과가 차등 수가 결정에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정한득은 기를 쓰고 전문 병원을 몰락의 길로 내몰 테고, 위원들은 음흉한 속을 안다 해도 재정 절감이란 명분에 찬동할 것이다.

답답한 일이었다.

“후우! 그럼 이 자료들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네요. 진상건은 물론이고 당장 정한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민정호가 읽다 만 서류를 가리켰다.

“흥분하지 말고 남은 부분까지 모두 확인하시죠. 정한득이 본원을 건드리지는 못할 겁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급히 남은 부분을 확인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은 물론 일말의 이성을 되찾은 신현수까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한득에 대한 분노보다 활로를 찾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만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 해결해야죠. 차등 수가가 결정되기 전에 과장님과 단둘이 정한득을 만날 생각입니다.”

“다 함께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자신을 몰락시킬 수 있는 치부를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면 누구나 반격하기 마련입니다. 신 교수님과 손 교수님은 물론 원장님과 부원장님 모두 모르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선생님들도 모르고 계시는 겁니까?”

“말씀드렸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왜 참석을 안 하셨지?’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까?”

“과장님과 교수님들 결정에 따른다고 하시며, 들은 적도 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정한득이 위원회에서 아예 물러난다는 전제하에서요.”

“정한득이 과연 우리 둘만 안다고 생각할까요?”

“진실을 아는 사람이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이 훨씬 위협적인 법입니다. 과장님과 나만 치면 될지, 아니면 모두를 쳐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겁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스스로 처세에 능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설득력이 있었다.

“언제 만날 생각입니까?”

“위원회가 열리기 바로 전날이 좋겠습니다.”

“너무 늦지 않을까요?”

“대책을 세울 시간을 주면 안 됩니다. 정한득의 처세술과 진상건 이사장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진상건과 정한득 얼굴에 자료를 날리며 분노를 토해 내고 싶었지만 현실이 마음처럼 흘러갈 리가 없었다. 냉정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대응하는 민정호가 대단하게 보였다.

‘폐업 수순으로 가는 것이 개인적으로 훨씬 유리할 텐데 손해를 감수하며 도와주다니, 어쩌면 내가 마음을 닫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을 부원장으로 추천하고 임명한 진상건과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될 것이란 사실이었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면 모르지만 사업적으로 상당히 밀접했던 사이였다.

앞날이 순탄할 수가 없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일이었다.

“민 부원장님, 이 자료를 공유하는 일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뭐가 고맙다는 말씀이십니까?”

“보통 사람은 정말 하기 어려운 일로 보이네요.”

민정호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제시한 시한이 넘지 않았기에 계약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것뿐입니다. 진상건 이사장님이 성급하게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됐을 수도 있습니다.”

섬뜩한 말이었다.

민정호가 등을 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빤히 보였다. 모든 의료진과 직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껍데기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다.

‘후우! 계약이란 말이 친근하게 들릴 수도 있구나. 민 부원장이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 됐다는 말이겠지?’

“이유가 뭐가 됐든 우리로서는 다행이네요.”

“시한이 두 달 남짓 남았습니다. 병원은 지금도 극히 불안정하고, 미래는 유동적입니다. 지금 상황에 만족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변동 사항이 있으면 과장님께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탁!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익숙해진 탓인지 그렇게 눈에 걸렸던 행동을 보고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 간사하다고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현수의 얼굴이 아직도 굳어 있었다.

병원은 아버지의 유업이었고, 비록 힘은 없어도 재단 이사였다. 애착이 큰 만큼 진상건이 병원 전체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현수야, 우리도 침착하게 대처해야 돼.”

“민 부원장에게만 맡겨도 괜찮을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만 든다.”

“재단 일은 잘 모르지만, 지금은 민 부원장을 믿고 맡기는 게 가장 현실적인 것 같다. 정한득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손일석이 콧등을 찡그렸다.

“지훈이 말이 맞아. 잘못 들쑤시면 진상건이 바로 움직일 텐데 뒷감당이 될까? 민 부원장도 그래서 결정 하루 전에 정한득을 만난다는 거 아니야. 들러붙은 놈이 정한득 한 명이라는 확신도 없고, 차등 수가에 걸려드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하잖아.”

“그래. 이제라도 진상건의 정확한 의도를 알았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최선을 다해 병원을 탄탄하게 만들면 누가 와도 겁낼 일이 없어.”

감정을 다스리기 쉽지 않은 모양인지 신현수가 훅훅 숨을 내뱉었다. 힐끗 눈길을 준 손일석이 턱을 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 욕심 끝이 없다더니 도대체 몇 명을 보는 거야? 말로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사필귀정, 권선징악, 뿌린 대로 거두리라, 뭐 이런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 꼴을 보니까 진상건도 곧 무릎 꿇고, 눈물 콧물 다 흘릴 것 같다.”

“맞아. 그런 사람들이 결국 가슴에 번호표 달잖아. 현수야, 우리의 힘을 믿자. 민 부원장도 같은 편이 확실해졌잖아.”

“알았어. 그래도 송재덕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은 만나 봐야겠어. 너희들은 경석이 형한테만 오늘 일을 알려 줘.”

“오케이! 민 부원장이 참 냉정해.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만 딱 불렀네. 하긴 내가 빠지면 김 과장하고 신 교수 둘이서 뭘 할 수 있겠어? 어깨 펴고 퇴근하자.”

“맞다. 여유를 잃지 않게 해 줘서 고맙다.”

“아! 송재덕 선생님에게 부탁할까?”

“뭘?”

“야 소리 세 번이면 정한득도 죽음이다. 죽음. 찍소리라도 내면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뽑는 거지. 안 그래? 어후! 생각만으로도 떨리네.”

신현수가 웃긴 했다.

김지훈이 고민에 빠졌다.

새로운 국면이었지만 사실상 변한 것은 없었다. 전문 병원 설립 전부터 진상건이 계획하고, 진행시킨 일을 이제야 알았을 뿐이었다. 민정호가 주던 막연한 갑갑함만이 사라졌을 따름이었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일 년에 100건 이상이라! 도진이하고 병옥이가 궤도에 올라서면 일주일에 두 건 정도는 문제 될 일이 없어. 그렇게 되면 다른 파트 수술도 덩달아 늘 수밖에 없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 온 대로 뚜벅뚜벅 앞만 보고 전진하면 된다. 또한 민정호라는 강력한 힘을 유지해 의료 외적인 부분을 맡겨야 했다. 육 개월이란 시한과 진상건의 농간이 마음에 걸렸지만 정면 돌파만이 남은 길이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머리를 두드렸다.

‘논문!’

점점 여유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차등 수가와 정한득이라는 빌어먹을 암초가 나타났다. 하지만 달리 보면 논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였다.

‘논문부터 케이스 발표까지 모두 개개인의 명예만이 아니라 우리 병원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야. 의사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는 것이 환자 확보를 위한 가장 빠른 길이다.’

돌연 마음이 급해졌다.

희연이가 막 잠들기 직전이었다.

간호학과 교수라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고경아는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일인삼역이 주는 고단함마저 잊은 듯했다.

강렬한 자극이었다.

‘역시 우리 마님이야. 나도 열심히!’

김지훈이 소파에 앉아 논문 자료들을 살폈다.

조용히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드르렁! 드르렁!

졌다.

이젠 잠 팍팍 줄이고도 쌩쌩 날아다닐 나이가 아니었다. 두꺼운 책은 훌륭한 수면제였고, 엉덩이 자국으로 눌린 소파는 편안한 침대였다.

다음 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됐다.

김지훈이 힐끗힐끗 눈치를 보았다.

이준영 교수의 회진이 끝나자마자 쪼르르 달려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얘기 들으셨죠?”

“들었어.”

“민 부원장 의견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괜찮다고 본다.”

“달리 해 주실 말씀은 없으세요?”

그때 누군가 쑥 끼어들었다.

“뭐니? 나만 빼고 둘이 뭐 하니? 차등 수가 얘기구나. 차등 수가. 그거 중요하다. 중요해. 이 정도 성과를 냈으니까 걱정할 일이 없지만 혹시라도 방해하는 놈 있으면 죽을힘을 다해 밟아 버려. 그냥 꽉 밟아.”

“밟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설마 위원회에 그런 돼먹지 못한 사람이 있겠니? 그치? 내 말이 맞지? 둘이 잘해 봐라. 잘해 봐.”

무척 신경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 역시 사인방과 민정호를 확고하게 믿고 있는 눈빛을 보였다.

사람 보는 눈의 깊이 차이일지도 몰랐다.

“지훈아, 세월 따라 나이를 먹는 사람이 있고, 어디로 처먹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어려도 진득하고, 나이 들었어도 팔랑개비 같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 우리는 제대로 나이 먹자. 아! 난 먹을 만큼 먹었구나. 그랬구나.”

‘이상하게 편해지네.’

“감사합니다.”

김지훈의 고개가 절로 꺾였다.

***

하루하루 바쁜 나날이었다.

차등 수가 위원회 개최가 나흘 남았다.

엄윤희의 결혼식도 나흘 남았다는 말이었다.

회진을 돌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우려와 달리 순조롭게 회복된 송진순 환자 때문이었다. 다행이었지만 수술에 국한된 얘기인 데다 말기 암 관리는 전문 병원의 영역이 아닌 탓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집 근처에서 치료받으셔도 되는데 퇴원을 안 하시겠다고요?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간호사도 친절하고, 선생님들 모두 잘해 주시는 덕에 한결 편하네요. 막내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내가 짐이 될 수도 없고요. 결혼식 본 후 퇴원하면 안 될까요?”

입원 기한에 제한을 두던 시절이 아니었다. 환자가 상당히 늘었지만 병실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별달리 할 치료가 없다고 해도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매 순간이 불안하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언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최대한 편한 상태에서 결혼식을 보고 싶으시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고마워요.”

송진순 환자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수술하는 날이었지만 서도훈과 환자를 같이 보는 덕에 모처럼 긴 여유를 얻었다. 중요 과정을 할 때쯤 참관하기로 하고 자꾸만 밀리는 숙제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연구실에 앉아 막 자료를 펼치는 순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수화기에 귀를 가져간 김지훈이 눈을 크게 뜨며 벌떡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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