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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08화 (1,108/1,329)

14화

상황 많이 달라졌다.

이젠 한가함과 무료함에 못 이겨 병원 곳곳을 어슬렁거리던 김지훈이 아니었다. 심심찮게 퇴근이 늦어질 정도로 수술이 늘었고, 특히 간 이식 건수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까지 올랐다. 물론 세 파트를 책임져야 한다는 민정호의 기준과 아직은 괴리감이 있긴 할 것이다.

웬만한 일로는 찾아올 민정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빤히 알고 있었다. 고개 빳빳이 들고 목에 힘 주기는 이르다 해도 어깨쯤은 펼 만했다.

“응급 수술 때문에 진료가 밀렸는데 왜 그러시죠? 별일 아니면 회진 끝나고 말씀하시죠.”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차등 수가 문제로 일과 끝난 후 만났으면 합니다. 시간이 다소 필요해 예정보다 앞당겨 상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불과 이 주도 안 남았다.

안 그래도 필요한 자료를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논문 작성과 겹쳐 글씨와 숫자가 섞인 서류만 봐도 머리가 띵할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 있었다.

선입견도 많이 지워졌고, 한시적이라 해도 민정호의 목적이 병원의 미래와 부합한다는 사실까지 알았지만 그동안 커피 한 잔 나눈 것이 다였다.

‘왜 시간을 당긴 거야? 어쨌든 일과 끝난 후면?’

“다른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간단히 할 얘기가 아니네요.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상의하면 어떻겠습니까?”

“식사하면서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 식사 후 신현수 선생님, 손일석 선생님과 함께 과장님 연구실에서 뵙겠습니다. 연락 주시죠.”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단 한 발만 좁혀지면 보다 원만한 관계를 만들 수 있건만, 그 작은 간극이 최후의 보루라도 되는 듯 철저하게 고수하는 민정호였다. 집중하기 어렵다는 핑계라도 댄 것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많이 발전했다고 해야 되나?’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부랴부랴 외래 진료를 마치고 회진을 이어 갔다.

세 개 파트라지만 아직은 김지훈의 파트이기에 규모가 남달랐다. 서도진을 비롯한 수혜자 수술 파트와 간담췌를 맡은 서도훈, 함께 환자를 봐야 하는 공여자 파트까지 전문의만 여섯 명 이상을 넘나들었다. 서울 병원에서도 꿈꾸지 못할 호사였다.

우르르르르!

‘뿌듯하긴 하지만 비효율적이야. 다들 자기 자리를 빨리 잡아야 하는데 언제나 가능할까? 에휴! 그것도 결국 나한테 달린 일이네.’

간 이식 환자를 비롯해 중증 질환으로 수술한 환자가 대부분이라 제법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상당한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송진순 환자까지 바쁘기만 했다.

엄윤희가 엄마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다행히 환자는 잘 깨어났고, 마취와 수술 여파로 잠이 든 상태였다. 수술 후 두 차례나 데메롤을 투여했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 간담췌 장기의 암과 수술이 유발하는 통증은 마약성 진통제로도 제어하기 힘든 데다 시한부 선고까지 받은 이상 중독을 우려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자식에겐 모든 것이 아프고, 불안할 것이다.

조그만 신음에도 눈시울을 붉혔다.

“선생님, 엄마가 코에 낀 줄하고 소변 줄 때문에 무척 힘들어하세요. 언제쯤 뺄 수 있을까요?”

“수술 상처부터 보겠습니다.”

드레인이 깨끗했다.

마음에 걸렸던 가느다란 튜브도 제 기능을 유지해 담즙 배출이 원활해 보였다. 아직까지 검고 끈적끈적하게 보였지만 곧 좋아질 것이다.

“내일 아침에 다시 확인한 후 이상 없으면 모두 뺄 겁니다. 위나 장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곧 물도 드실 수 있을 겁니다.”

무난히 회복된다는 전제하에 한 말이었지만 암과 관련된 증상이 언제 얼마나 좋아질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물조차 토할 수 있었고, 통증이 줄어든다 해도 진통제 없이는 거동까지 불편해질 수도 있었다.

차마 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때그때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왠지 가슴 아프게 들렸다.

‘퇴원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 자체가 힘들 텐데 환자와 가족 모두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든 암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일이었다. 미흡하기만 한 호스피스 치료가 제도적으로 정착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언제나 현격하지만 말이다.

회진을 끝낸 김지훈이 서도훈을 불렀다.

“오늘 덕분에 수술 잘됐어. 고맙다.”

서도훈이 입술을 모았다.

단순하게 지나갈 일만은 아니었다.

집도의의 올바른 판단과 태도를 다시 느꼈다.

김지훈이 자존심을 앞세우며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면 실패했을까? 결국 성공했을 테고, 도리어 자신이 실수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손을 넘겼다.

훨씬 경험이 많고 숙련된 써전임에도 더 어렵다고 할 수 있는 이후 과정까지 모두 맡긴 행동은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자세였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서도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내가 선배이자 과장이라고 해도 우리 끊고 맺는 것은 확실하게 하자. 아! 책임까지 넘기는 건 아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휘리릭 사라졌다.

“경아 씨, 오늘 좀 늦어요.”

(왜요? 말을 안 했더니 늦게 들어오는 날이 점점 늘어나네. 희연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차등 수가 문제 때문에 어쩔 수가 없네요. 희연이한테 과자 사 간다고 전해 줘요. 마님! 사랑합니다.”

와중에 식은땀 뻘뻘 흘렸다.

서도훈도 미소를 머금으며 송진순 환자의 차트를 다시 확인했다. 당장 티가 나지 않아도 노력과 열정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이었다.

연구실이 부산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간 이식 수혜자 자료를 취합했고, 신현수는 이준영 교수의 수술을 포함한 공여자 자료 전체를 정리했다. 민정호는 자신의 몫인 간 이식 수술의 수입과 비용을 깔끔하게 비교해 놓은 지 오래였다.

준비한 자료를 검토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확인 차원이 아니라 차등 수가 결정에 대비하기 위한 자료이기 때문이었다.

민정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수님들 생각은 어떠십니까? 별다른 일 없이 통과될 것 같습니까?”

손일석이 손가락을 튕겼다.

“차등 수가는 걱정 안 해도 될 것으로 보이네요. 김 과장, 이 정도면 시비 거는 사람 없지 않겠어? 민 부원장님과 내가 알아본 바로는 H 병원 실적도 우리만 못한 것이 확실해.”

“다음 주 시행할 수술까지 하면 세 달 동안 열세 건이니까 시작치고는 나쁘지 않아. 일주일에 한 건 꼴이긴 해도 두 달 이상 예약이 밀려 있으니까 전망도 괜찮고. 신 교수도 동의하지?”

“보험 적용만이 아니라 환우회와 충분히 소통한 덕이 아닌가 싶어. 다들 고생했어. 김 과장, 손 교수, 다른 얘기지만 환자가 조금만 늘어도 힘에 부칠 텐데 파트 분리는 생각해 봤어?”

“일전에 얘기한 것처럼 서도진 선생과 강병옥 선생 경험이 최소 두 자릿수는 돼야 가능할 것 같아. 총 이식 건수가 삼십 개 정도 될 때 결정할 생각이야.”

“나도 김 과장 의견에 동의해. 이 추세라면 서너 달 걸릴 테니까, 그 전에 혈관 수술을 충분히 주면 경험 부족을 우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 대충 시점까지 딱 맞아.”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꼬가 트인 것처럼 술술 풀려 나가는 상황이었고, 모든 파트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향후를 예측할 때 계획에 큰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찜찜한 구석이 없진 않았다.

의사 입장에서는 지난날의 걱정이 우스울 정도로 상당히 만족스러운 경과였다. 그러나 묵묵히 듣고 있는 민정호의 의견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재정 문제였다.

게다가 애초 약속된 자리를 앞당겼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병원 상황과 나아갈 방향은 말한 그대로입니다. 민 부원장님은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수술이 많아지긴 했지만 흑자로 전환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의료진을 포함해 직원 대부분 경력자라는 사실이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적자를 메우고, 앞으로 추가 투여해야 할 비용까지 생각한다면 간 이식 부분이 최소 두 배 이상 늘어나야 합니다.”

일 년에 100건 이상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간 이식 파트 모두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도 환자가 따라 줘야 가능한 수치였다. 그 점이 불확실한 이상 돈 문제는 항상 갑갑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손익분기점에 못 미쳤다는 사실은 물론, 돈 들어갈 일이 늘면 늘었지 줄어들 수 없다는 현실에 한숨만 나왔다. 당당하게 폈던 어깨에서 시나브로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등 수가에 걸려든다면 모든 수술이 크게 늘지 않는 한 흑자는 꿈도 못 꿀 겁니다. 결국 돈을 차입해야 될 테고, 최종적으로는 폐업입니다.”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폐업이라는 무시무시한 얘기를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말하는 민정호가 얄미울 정도였다.

“두 달 전과 비교하면 상황이 많이 좋아졌으니까, 곧 흑자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요? 차등 수가도 H 병원보다 실적이 좋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고요.”

“차등 수가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고집 부리며 적절하게 타협하려고 했던 수가도 하한선에 맞춰지지 않았습니까?”

할 말이 없었지만 정한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 직전 민정호와 다르지 않았던 의료계 전체의 의견을 수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참! 변명 같아도 우리에게 무척 나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위원회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서로의 의견이 충돌했지만 이번 경우는 객관적인 근거를 두고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설령 사심이 작용한다고 해도 무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같은 일이 벌어지면 이준영 선생님도 지켜만 보지는 않으실 겁니다.”

민정호가 돌연 눈가를 좁혔다.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반응이었다.

이내 표정을 지우긴 했다.

“혹시 정한득이란 사람을 말하는 겁니까?”

“정한득을 아십니까?”

“심사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죠. 관계가 나쁘다고 하셨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라는 말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겁니까?”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사의 경계가 애매하긴 했지만 민정호의 관심이 상당했다. 게다가 정한득의 존재보다 객관적 근거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관심처럼 보이는데 이건 또 뭐지? 평소 성격을 볼 때 이유 없이 관심을 가질 사람이 아니잖아.’

어떻게 아는지, 왜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지 먼저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 이상 섣불리 입을 열 민정호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의문을 꾹꾹 누르고 지난 일을 설명했다.

“진평호 회장이란 사람부터 시작해서 아들 문제까지 여러 가지로 엮이긴 했지만, 서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유가 될 수 없는 일이 발단이었습니다.”

진평호, 금경태, 정갑수로 이어지는 악연과 그들이 차례로 퇴출되게 된 배경을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이준영 교수를 비롯해 누구 한 명 정한득과 이해를 다투거나 충돌한 적이 없었지만 사람의 앙심은 논리적일 수 없는 법이었다. 때론 시간이 갈수록 더욱 독해지는 것이 앙심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퇴직 후에도 연줄을 이용해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처세에 능한 사람일 텐데 의외네요. 어쨌든 세 달이 지났는데 서로 간의 대화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손일석이 눈을 흘겼다.

“그 말을 민 부원장님이 하는 게 더 의외네요. 그건 그렇고 단순히 위원장이라서 정한득을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혹시 진상건과 관련이…….”

“이사장님과의 관련이라니, 넘겨짚으신 겁니까?”

“진평호와 금경태라는 이름이 나올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아서요. 합리적인 추측이죠.”

민정호가 힐끗 눈길을 주었다.

“주의해야겠군요. 맞습니다. 진상건 이사장님과 함께 여러 차례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다들 깜짝 놀랐다.

“예? 아니, 수가 결정 때 난리를 친 정한득이 위원장이라는 사실을 빤히 알았다면서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겁니까?”

“역시 대화가 부족했군요. 지금은 상황이 변했지만 당시에는 교수님들께 반드시 알려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도 못했고, 잘잘못을 가릴 일은 더더욱 아닌 것 같습니다.”

“대처할 수 없었다는 겁니까?”

“지금은 가능하십니까?”

다들 말문이 막혔다.

특히 정한득과 직접 대면한 김지훈은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민정호 말처럼 정한득의 방해를 확실하게 막아 낼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의문 하나가 남았다.

“그럼 왜 이제 와 말하는 겁니까?”

“계약 이행에 중대한 변수가 됐다고나 할까요? 일단 제가 준비한 자료부터 보시죠.”

자료를 넘기는 신현수의 손이 벌벌 떨렸다.

김지훈과 손일석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자료를 던진 민정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전후 상황을 정리했다.

“이게 사실입니까?”

“정한득이란 사람에겐 어떤 감정도 없습니다.”

오히려 확신에 찬 말로 들렸다.

‘자식이 그 지경이 되도록 남 탓만 한 사람이 아니라 돈에 눈이 멀어 진평호, 금경태와 결탁했던 사람으로 봤어야 했어. 퇴직 후에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됐던 거야.’

김지훈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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