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주말이다.
김지훈의 눈가가 시꺼멓게 물들었다.
‘아! 졸리다. 그래도!’
이제 이틀만 지나면 평일 대낮에도 길 잃은 하이에나처럼 이곳저곳 얼굴 들이밀 일이 없었다. 물론 토요일마다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행사를 무사히 넘겨야 마음이 더 편해질 것이다.
전격성 간염!
이 주에 걸친 화두였다.
수술까지 한 마당이었다.
아무리 희귀하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또 보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식 결과를 떠나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박아 넣지 않으면 의사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를 간과할 스승들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처참하게 타오를 것이다.
김지훈 공력 쌓였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정신 번쩍 들 정도로 찬물에 샤워까지 해 대며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서도진 선생, 수술 중 어떤 점을 가장 주의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까?”
“예. 제 소견으로는 혈관 부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전격성 간염의 경우 염증의 여파가 간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침착했던 초반이 지나며 공방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서도진의 얼굴이 발개지려는 찰나 김지훈의 고개가 홱 돌았다.
한 놈만 패면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적절하게 분산해야 후환이 방지되는 법이다.
“이혁원 선생, 간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다른 간염과 비교해 차이점이 있었습니까? 있다면 보다 빨리 진단해 내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을까요?”
오판이었다.
적정한 선의 질문과 대답으로 폭탄을 방지해야 했건만, 김지훈 스스로 분위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어느새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고, 이준영 교수마저 가세하는 순간 그야말로 불바다가 됐다.
결국 전격성 간염 하나로 거의 모든 시간을 잡아먹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토론에 참가했던 써전들 모두 화끈한 열기에 휘말렸다. 집담회가 끝나고서도 치열함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 오늘도 영양가 만점이었네.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지만 다들 배운 게 많았겠지?’
남몰래 씨익 웃으며 뿌듯함에 몸을 맡기던 김지훈이 주변을 둘러보다 말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스승의 화염방사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잠시 잊었다.
김지훈이 천장만 바라보았다.
서도진과 이혁원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복수하고 말겠다는 눈초리까지 보여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다. 과장이자 선배라는 안전판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야 간신히 추스를 수 있었다.
‘다들 눈빛이 너무 섬뜩하네. 그런다고 내가 죽냐? 어쨌든 공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점은 미안하다. 다음에는 좀 더 부드러울 수 있도록 노력할게.’
지나간 일이었다.
후회해도 늦었다.
김지훈이 낯짝에 철판을 깔았다.
‘이 정도면 집담회 잘 끝났고, 사실 너희들도 복수할 처지가 아니지. 이제 퇴근해 편히 쉴 일만 남았네. 입이 깔깔한데 점심은 뭐 먹을까?’
유인철 환자가 아무 문제 없다면 주말 내내 뒹굴뒹굴 구르며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희연이가 마음에 걸렸지만 아빠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자, 피해서도 안 되는 의무였다.
기대감도 슬슬 증폭되기 시작했다.
월요일, 정규 수술로는 처음으로 간 이식이 시행된다. 알 수 없는 희열에 히죽히죽 웃던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른 채 여전히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김 과장, 논문하고 케이스 발표 준비 잘되고 있지?”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어? 내가 논문을 쓴다고 말씀드렸었나? 그런 적이 없잖아. 뭐지?’
“논문이요?”
“왜 그렇게 놀라? 학회가 머지않았어. 라파로로 시행한 췌장하고 담도 쪽 질환, 그동안 시행한 수술에 예정된 수술까지 더해 간 이식 결과 논문으로 발표해야지. 전격성 간염은 케이스 보고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말씀하셔서…….”
“김 과장, 강의는 없어도 임상 교수야. 논문 하나 안 쓰고 교수직을 유지할 생각이었어? 김진호 교수에게도 쓴다고 했다며. 국내는 물론 세계 학회에도 제출할 때가 됐어.”
기억이 나긴 했다.
‘국내는 몰라도 세계 학회는 수술실에서 농담조로 한 말을 어떻게 아셨지?’
여하튼 임상 교수를 떠나 의학의 기본이기에 차곡차곡 자료를 모아 왔다. 하지만 스승의 바람 혹은 요구는 그 정도 선이 아니었다.
최소 세 개를 써야 하는 데다 논문 작성 자체가 한두 달 안에 끝날 작업이 아니었다. 게다가 세계 학회라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준영 교수가 낌새를 느낀 모양이었다.
“나도 이번 학회에 간암 논문 제출을 준비하고 있어. 두 달 반 남았으니까 더 이상 뒤로 마루지 않았으면 한다.”
다들 함께한 자리여서 그런지 말투가 확실히 달라졌다. 제자가 아니라 과장이자 경력 쌓인 써전으로 대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두 달 반이요?”
“국내 발표는 그 안에 맞춰야 돼. 다른 의사들에게도 우리 병원이 전문 병원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야.”
빼도 박도 못할 말이었다.
‘지금 당장 시작해도 시간을 맞추기 어렵잖아.’
김지훈이 멍하니 말을 잃었다.
한가한 시간은 이미 끝났고, 바삐 움직여야 할 일만 남았다. 개원 초의 어려움으로 논문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스승은 그 와중에도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이준영 교수는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체력만이 관건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등에 쌓였다. 혼자 작성하기 힘들뿐더러 여러 사람의 머리를 모아야 하는 일이기에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다.
서도진, 강병옥, 이혁원, 송진우.
다섯이 함께 작업한다면 훨씬 수월할 테고, 세계 학회에 제출해도 될 만큼 질 높은 논문이 탄생할 것이다. 문제는 불과 몇 분 전 저지른 만행이었다.
“나 혼자 수술한 것도 아닌데 같이 쓰자. 도진아, 혁원아, 부탁한다.”
화염방사기를 피한 후배는 일 저자나 이 저자를 떠올리며 수긍했고, 이름까지 부르며 부탁한 후배들은 대답 대신 살벌한 눈초리를 쏘아 댔다. 언제쯤 과장으로서 한없는 존경을 받을지 아득했다.
‘세상일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터벅! 터벅!
토요일 퇴근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환한 대낮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양손에 들린 자료가 무지막지하게 무겁기만 했다.
당직 여파까지 만만치 않았다.
‘희연이하고 놀아 주기로 했는데 어쩌지? 이런 컨디션으로 논문 준비하며 감당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난감한 주말도 정말 간만이었다.
***
새로운 주가 시작됐다.
하루하루가 정말 바빴다.
순풍에 돛 달았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유인철 환자는 하루가 다르게 회복됐고, 정규 수술로 간 이식을 받은 환자부터 암 환자까지 모두 순조롭게 수술을 시행했다.
외래도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사실 놀라울 지경이었다.
충분한 간격을 두고 예약한 탓도 있지만 이틀의 진료 시간이 짧다고 느낄 정도였다. 여러 이유가 있다 해도 이준영 교수의 명성, 송재덕 교수와 민정호의 능력과 노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했으면 환자가 이 정도로 늘 수 없었겠지. 민 부원장에게도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데 코빼기도 보기 힘드니… 무슨 일이 있나?’
갑자기 늘어난 환자에 일순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되긴 했지만, 김지훈 홀로 파트를 대표하는 의사가 아니었다. 서도진, 서도훈, 강병옥이 딱 버티고 서서 지난 경험을 충분히 살리며 자신의 환자를 만들어 갔다.
역시 가장 기쁜 일은 간 이식의 활성화였다.
보험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여전히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비용이 들었지만, 보험이 아니었으면 많은 환자가 억 소리 나는 돈에 치료 자체를 포기했을 것이다. 단 몇만 원도 아쉬울 수밖에 없는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실로 단비와 같은 일이었다.
늘어난 수술과 외래로 한가한 시절이 시나브로 사라졌다. 많은 시간을 요하는 논문과 간간이 서지만 잠 못 자는 당직이 겹치면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이 흘렀다.
‘아! 피곤해.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이준영 교수와 팀을 이뤄 네 번째 간 이식을 시행한 김지훈이 뻐근한 어깨를 휘휘 돌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열 시간 남짓 걸렸다.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열 시 넘어 퇴근이네. 다른 수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넘겨야겠어. 예약이 넘치는 게 능사가 아니다.’
꽤 늦은 시간인데 손일석이 보였다.
“오늘 당직이었어?”
“혈관 수술도 다 낮에 하는데 이 시간에 내가 왜 여기 있겠어? 김 과장, 정형외과 의사 한 명 뽑아야 하지 않겠어? 서울 병원에 파견이라도 요청하든지. 또 골절 동반이야. 무지하게 신경 쓰이네.”
“안 그래도 원장님께 말씀드렸다가 입장 곤란해서 혼났어. 진상건이 떡 버티고 있는데 원장님 말이 통할 리가 없잖아. 정형외과도 난처할 수밖에 없을 테고.”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기한테도 이득일 텐데 심보 참 고약해. 잘 살든 못 살든 악당 같은 사람들이 참 많아. 그건 그렇고, 보험 평가가 언제라고 했지?”
“한 달 반도 안 남았어.”
“매주 한 건씩 예약돼 있으니까 세 달 사이에 총 열 건 정도 하는 거네. 차등 수가니 뭐니 그런 개소리는 안 나오겠지?”
“다른 병원 상황도 고려해야 할 거야. 상대적으로 우리 건수가 적으면 트집을 잡고도 남지 않겠어?”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내가 누구야? 끈 떨어졌다고 해도 귀는 열려 있지. H 병원은 우리보다 확실히 적어. 차이가 좀 날 거야.”
“정말?”
“진충기 선생님도 간 이식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하더라. 실력은 충분한데 이름에서 밀린다고 말이야.”
“이름? 누구 이름?”
“우리 병원에 자타가 공인하는, 환자들도 알 수밖에 없는 간담췌 최고의 대가가 계시지 않냐. 그리고 대가가 되기 직전의……. 흠흠! 아무튼 그런 놈이 하나 더 있고.”
누구를 말하는지 빤했다.
신현수와 더불어 간 이식을 두고 평생 경쟁해야 할 최고의 라이벌 앞에서 생색내면 어디 한 군데 모자란 놈이 될 것이다.
김지훈이 슬쩍 눈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는 말인데, 그래도 H 병원보다 우리 수술이 많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된다. 의료진 구성은 몰라도 규모로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나잖아.”
“홍보의 힘이라고 본다. 너보다 살짝 한가한 내가 알아본 바로는 민정호 발바닥에 불이 났다고 하더라. 진상건과 등 돌리고 완전히 우리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래서 요즘 현수 얼굴이 편해 보이나?”
“이 상태로 가면 곧 흑자까지 바라볼 수 있을 텐데 걱정할 일이 없겠지.”
“흑자를 말하기에는 일러.”
“그건 과장이 알아서 할 일이고. 아! 응급실에 아뻬 하나 있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수고해. 당직 때마다 꼭꼭 오는데 라파로를 배워야 하나?”
손일석이 뒤늦게 일복을 꽃 피우는 모양이었다.
뒷모습을 보며 콧소리를 흘리던 김지훈도 부리나케 병동으로 향했다. 한 번에 환자 두 명이 생기는 생체 간 이식을 하고 딴 짓을 했다가는 가뜩이나 늦은 퇴근이 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쁘다. 바빠!’
간 이식 수술이 더 많아지면 점심, 저녁 다 건너뛰고 밤늦게 퇴근하게 될 날이 늘어날 것이다. 당직이 있는 주면 밤샘까지 각오해야 했다. 논문에 케이스 보고까지 작성하는 탓에 남은 날도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고경아는 항상 든든한 동료이자 아내였고, 강력한 후원자였다. 쑥쑥 커 가는 희연이도 아빠의 직업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기에 남은 시간을 모두 가족에게 쏟아부었다.
누군가는 개인적인 취미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람에 따라 가치관이 다른 법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역시 충분히 개인적이라고 김지훈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만큼 열심히 살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픈 사람을 봐야 하는 직업과 달리 도리어 자신에겐 무관심하거나 등한시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돌연 식귀가 아우성을 쳤다.
‘아! 배고프다.’
일종의 건강하다는 증거였다.
여러 이유를 모두 담아 카르페 디엠!
한 달이란 시간은 짧고도 길었다.
갈수록 환자가 늘어났다.
간 이식을 제외한 모든 수술 예약을 후배들과 적절히 나눠 수술이 과도하게 미뤄지거나 일이 몰리는 것을 방지했다. 덕분에 후배들 눈빛 많이 순해졌다.
이제 의료 쪽은 걱정할 일이 크게 줄었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할 행정적인 문제가 남았다.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 보기 힘든 민정호와도 심도 있는 대화가 필요했다.
‘이제 차등 수가 결정이 겨우 이 주 남았네. 오늘 진료 끝나는 대로 만나야겠다.’
마지막 환자만 남았다.
‘담도암?’
차트를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