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김지훈의 발걸음에 힘이 팍팍 실렸다.
누구보다 많이 의존하고 있는 스승이었지만 민정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사람 하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입 위에 올리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조금은 더 신중하게 판단하려 했는지도 몰랐다. 사실 아무리 많이 만난다 한들 사무적인 일에 국한된다면 민정호 같은 사람을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여하튼 스승의 마음을 또 한 번 확인했다.
‘스승님은 확실히 진상건과 민 부원장을 한통속으로 보지 않고 계시네. 좋아.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민정호만의 특권은 아니잖아?’
김지훈의 입꼬리가 스윽 말려 올라갔다.
“왜 웃어요?”
“스승님과 경아 씨 말을 들으니까 민 부원장이 유독 나한테만 기분 나쁠 정도로 냉정하게 대하는 것 같아요. 이유가 뭐가 됐든 좋은 태도가 아니죠? 복수해야겠어요.”
“복수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 파트 몫을 다하는 순간 잘근잘근 밟아 줘야죠. 그렇게 살지 않아도 잘 풀리는 일이 많다는 걸 똑똑하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요.”
무릎 꿇은 민정호!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김지훈이 절절매는 민정호를 떠올리며 희연이와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없는 시간을 쪼개 교육열을 불태운 엄마 덕에 산수까지 척척이었다.
“희연아, 이거 알고 푸는 거야? 경아 씨, 우리 희연이 천잰가 봐요. 곱하기 나누기를 그냥 막 해. 막.”
“에휴!”
고경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 유치원이 있는 것도 모자라 선행 교육을 받지 못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문제가 생기는 마당이었다. 한글은 물론 기초적인 산수 정도는 다 할 줄 안다고 여기는 학교 교육 탓이었다.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에 더해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지만 김지훈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학습지 늘리면 희연이 힘들어 안 된다고 방방 뛴 날이 엊그제였다.
현실 무시하는 엄마 흔치 않았다.
‘희연아, 엄마도 네가 마음껏 뛰어놀며 건강하기만을 바라지만 너무 좋아하지 마. 너 아빠 말이 다인 줄 알면 중학교, 고등학교 가서 힘들어진다.’
고경아가 설거지를 하며 흥얼거리는 김지훈을 향해 눈을 흘겼다. 요즘 들어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조금씩 핀트가 어긋나는 김지훈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응급실에 들른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경석이 좋아 죽었다.
“김 과장, 왔어?”
“아침부터 얼굴이 확 피셨네. 좋은 일 있어요?”
“있지. 응급실이 조금씩 바빠진다 싶었는데 어제 손일석 선생이 수술을 세 건이나 했어. 종진이하고 아뻬를 라파로로 했더라고. 전문의들이 당직을 서니까 일석이 아킬레스건인 라파로 케이스까지 자연스럽게 해결되네. 김 과장 당직도 아닌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예사롭지 않아.”
외과 환자가 늘었다면 내과 환자도 상당히 늘었을 것이다. 제법 많은 환자를 보았는지 간호사들이 꽤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무조건 환영할 일이었다.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하마터면 간만에 밥값 했다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밤새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민정호처럼 생각하고 말하면 안 돼. 정신 차려.’
“김 과장, 현수막 덕분에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는 걸까? 사실상 외과, 내과 전문의가 바로 환자를 보는 응급실이 없잖아?”
“그러게요.”
‘설마 우연이겠지.’
김지훈이 속마음을 숨긴 채 얼렁뚱땅 넘어가는 순간 당직실 문이 열렸다. 손일석이 휘휘 목을 돌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졌다.
마치 네 시대는 끝났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이쿠! 응급실장님, 김 과장님, 나오셨습니까? 아! 피곤하다. 당직도 당직이지만 외래도 있고, 오후에 있는 혈관 수술까지 준비해야 해서 오늘은 무척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두 분 모두 수고하세요. 그럼 이만!”
민정호 말투까지 따라 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안 좋아. 뭔가 풀려 가는데 안 좋아.’
입맛 다시며 응급실을 나왔다.
원무과 직원이 달려왔다.
“과장님, 호성이는 언제쯤 퇴원시키실 예정입니까?”
“글쎄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아서 다음 주 말은 돼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왜 그러세요?”
“오늘 시청에서 중간 정산을 하겠다며 퇴원 일정을 물어봐서요. 민 부원장님이 업무 하나는 참 깔끔하게 처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민 부원장이야? 근데 시청에서 중간 정산을 해?’
해마다 그 해에 배정된 예산을 모두 집행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의료와 관계된 예산은 지지부진 시간을 끌거나 우선순위에서 가장 끝으로 밀리는 것이 예사였다.
국가 예산으로 집행되는 의료 보호 환자의 진료 비용조차 마지막 삼 개월 치는 해를 넘겨 지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마치 원칙인 것처럼 말이다.
하물며 갑작스러운 지출이었다.
시청 소관이라 해도 확실한 지급 의지를 보이는 중간 정산이라니 기대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문득 누군가 떠올랐지만 워낙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탓이라 여겼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말은 퇴원 후에도 시청에서 호성이를 챙기겠단 말이겠지. 이유가 뭐든 좋은 일이네.’
회진을 돌았다.
강호성과 엄마가 열심히 운동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표정과 안색이 상당히 좋아졌다.
이젠 엄마도 웃으며 상대방을 보았다.
자식과 엄마 모두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병원 밥에 살찔 리 없기에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짐승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안도감, 자식과 함께할 수 있다는 희망이 주는 변화였다.
“호성아, 아침 뭐 먹었어?”
“오늘은 밥 먹었어요.”
“배 아프지 않아?”
“아니요.”
“엄마도 뭐 좀 드셨어요?”
“예. 여기저기에서 도와주시는 분들 덕분에 잘 먹고 있어요. 선생님들과 부원장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부원장? 스승님이 아니라 민 부원장이겠지?’
아악! 민정호! 민정호! 민정호!
출근해서 회진 돌 때까지 한 사람 이름이 계속 머릿속을 감돌았다. 과민 반응인지, 민정호가 그만큼 여러 일에 깊숙이 관여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고마운 일임이 분명했다.
적극적으로 공론화시킨 덕분에 강호성 모자가 받은 도움은 기대 이상이었다.
사람들의 온정은 꽃과 마음만이 아니었다.
물질적인 후원이 쇄도해 의료진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민정호가 알게 모르게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겠지만 엄마 입으로 직접 들을 줄은 몰랐다.
이럴 때는 절대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다시 얼굴 맞대고 몇 마디 나누는 순간 백팔십도 바뀌겠지만 말이다.
‘각자 할 일 하는 거니까, 난 내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자. 오늘 외래는 어떨까? 일석이한테 밀리면 안 되는데 큰일이네.’
김지훈이 불안한 마음을 안고 외래로 내려갔다.
멈칫거렸다.
이른 시간에는 거의 환자를 볼 수 없었던 외과 외래 앞 복도에 예닐곱 명의 환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장 환자가 많은 이준영 교수의 진료가 없는 날이었다.
순간 가슴이 섬뜩해졌다.
자신의 환자일 가능성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설마 일석이? 아니야. 여기서 더 밀리면 바닥까지 뚫고 들어간다. 경석이 형 환자여야 돼.’
절로 내과 진료실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당연히 대기 환자가 더 많았다.
서울 병원에서 상당히 많은 환자를 보았기에 성에 차지 않겠지만 일주일 전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달라졌다. 혹시 하는 마음에 한 줄기 기대를 품던 김지훈이 폭폭 한숨을 내쉬었다.
‘부럽다!’
활력에 찬 변화가 어째 자신만 피해 가는 것 같았다. 파트 주임 교수의 권한을 대부분 넘겼지만 비슷한 처지를 못 벗어나고 있는 구성원들에게 상당히 미안했다.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진료실에 들어갔다.
외래 간호사가 생글생글 웃었다.
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과장님, 오늘 오전은 바쁘시겠어요.”
“왜요?”
“지금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만 세 명이에요. 원무과에 알아보니까 몇 분 더 오신대요.”
헛바람 터졌다.
이런 경사가 없었다.
김지훈이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서둘러 옷매무새 다듬고, 마음의 준비를 한 후 진료를 시작했다. 역시 하루 일과를 힘차게 시작하는 길은 환자를 보는 것뿐이었다.
‘침착하자. 침착!’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의뢰 환자도 좋았다.
당연한 절차였지만 수술을 받은 후 마지막 진료를 위해 내원한 환자도 좋았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비록 아뻬라 해도 말이다.
부지런히 오전 진료를 진행하며 응급으로 아뻬 스케줄을 냈다. 강력하게 복강경을 원했고, 다른 문제가 없어 어려울 것이 없었다.
사람 참 간사했다.
복강경 하기 딱 좋을 정도로 마른 몸에 터지지 않은 아뻬였다. 진료 중 수술 환자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인데 부지불식간 이경석의 새로운 시도와 부신 절제가 떠올랐다.
욕심이 생겼다.
내심 고민했던 일이기도 했다.
‘딱 좋은 케이스인데 원 포트로 시도해 볼까?’
충수돌기는 가늘고 긴 장기다.
대부분 맹장 뒤에 숨어 있고, 터지지 않았더라도 염증이 심하면 절제 중 끊어질 수 있었다. 만일 끊어진 말단 부위가 대장과 소장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면 배를 열 가능성이 급격하게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 탓에 원 포트보다 확실하고, 안전하게 아뻬를 제거할 수 있는 투 포트로 시행해 왔다.
‘작게 열 수 있는 개복보다도 상처가 더 작다는 이유로 별생각 없이 지나쳐 온 것 같다. 이왕이면 아예 티 안 나는 게 훨씬 좋지 않을까?’
신중하게 생각했다.
새로운 시도일 것은 없었다.
기술적으로는 이미 원 포트가 대세가 된 담낭 절제가 훨씬 어려웠다. 다만 수술 내내 숨을 곳이 없는 담낭과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는 아뻬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원 포트로 한다고 해서 100퍼센트 아뻬가 끊어지는 것도 아닌데 겁부터 먹을 이유가 있나?’
결정했다.
불상사가 생긴다 해도 투 포트로 전환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까지 섰다.
‘좋았어. 해 보자.’
수술이 시작됐다.
원 포트로 시행한다는 말에 퍼스트를 서는 송진우와 마취과는 물론 간호사까지 깜짝 놀랐다.
“도중에 끊어지면 곤란할 텐데요.”
“기구 하나 더 넣지, 뭐. 시작할 테니까 송진우 선생은 내가 혹시라도 위험해 보이는 조작을 가하면 바로 얘기해.”
처컥! 처컥!
터지지 않은 채 발갛게 익은 아뻬가 잘 보였다. 반면 해부학적 위치와 배꼽 하부에서 확보할 수 있는 각도상 구멍 하나로는 확실히 기구 조작이 쉽지 않았다.
김지훈은 신중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맹장 뒤에 위치한 아뻬를 살살 달래 앞쪽으로 끄집어냈다. 클립으로 동맥과 아뻬 뿌리 부분을 가뿐하게 잡고 잘랐다.
“샘플 나갑니다. 마무리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게 끝났다.
“컷!”
절개창이 보이지 않았다.
복강경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진우 선생, 그동안 우리가 너무 관성에 젖어 있었나 봐. 경험이 더 쌓이면 터진 아뻬도 원 포트로 할 수 있겠어. 아무리 간단한 수술도 개선할 점이 있는지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송진우가 입술을 모았다.
‘꼭 거창해야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문제라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개선하는 것 또한 써전의 의무다. 이런 점을 배워야 돼.’
여느 때처럼 수술했고, 환자는 불과 한 시간도 안 돼 병실로 올라갔다. 그러나 수술 후 반응은 사뭇 다를 것이다. 작은 상처 하나의 차이로 삶의 질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거즈를 떼는 순간 곁눈질을 하던 보호자가 깜짝 놀랐다. 어딘가에 배를 연 자국이 있어야 하는데 배꼽 위로 달랑 실오라기 하나만 보였다.
“선생님, 수술하신 거죠?”
“예.”
“근데 상처가 안 보이네요.”
“배꼽 속에 숨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억지로 찾지 않는 한 수술했는지도 모를 겁니다.”
보호자가 감탄까지 터트렸다.
아뻬도 사람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지만 환자와 보호자가 복강경을 원한 이유는 오직 미용적인 측면이었다. 그런 기대를 100퍼센트 충족시킨 것이다.
갑작스러운 시도로 완벽한 결과를 얻어 냈다.
김지훈의 어깨에 팍팍 힘이 들어갔다.
그때뿐이었다.
병실에서 나온 김지훈이 외래에 전화를 걸고는 입맛을 다셨다. 오전 같은 호사를 누릴 일이 없었다. 회진 때까지 빈 방을 지켜야 할 모양이었다.
그때 병동 간호사가 급히 달려왔다.
“과장님, 응급실에서 공정식 선생님이 과장님을 찾아요. 수술 끝났으면 바로 내려와 달라고 하셨대요.”
“응급실이요?”
‘무슨 일이지?’
오늘도 한가한 일과에 몸을 비틀 써전이 쌔고 쌨다. 손일석과 신현수도 있는데 아주 특별한 환자가 아니라면 굳이 김지훈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