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만 흘렸다.
“허허허! 허허허! 경석아, 밥 먹자. 밥.”
무한 반복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고작 밥 먹자는 소리가 다였다. 제자에 대한 사랑과 자랑스러운 마음이 말문조차 막은 모양이었다.
“선생님, 가시죠.”
머리 숱 많고 키 큰 제자와 세월을 이기지 못한 키 작은 스승이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정겹게 보였다.
식당이 제법 붐볐다.
의국원들 모두 이경석과 강병옥을 보자마자 제각각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환자부터 수술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김지훈은 보이지 않았다.
“이 교수, 김 과장 어디 갔나? 어디 갔어?”
“먼저 식사한 모양입니다.”
“이런 수술 같이해 놓고 어디서 혼자 뭐 하는 거야? 이제 라파로까지 확실히 뜨겠지? 그치? 간 이식만 활성화되면 걱정이 없다. 없어.”
이준영 교수가 맛있게 한 숟갈 넘겼다.
‘관심받을 사람은 네가 아니란 말이지?’
김지훈이 간담췌를 제외한 분야의 복강경을 이경석에게 모두 맡기려는 모양이었다. 제자의 행동과 마음이 흡족할 따름이었다.
그 시간.
수술 한 건 없는 김지훈이 꽤나 부산했다.
미리 식사하길 정말 잘했다.
윤석진과 공정식이 희소식을 갖고 왔다.
간 이식 환자 모임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보험 문제로 일정을 미뤘던 환자는 물론 의향을 비쳤던 환자 두 명도 이식을 받기로 결정했다.
네 명의 환자 모두 생체 이식이었다.
입이 절로 벌어졌지만 한 가지 고민이 다가왔다.
수술로 따지면 여덟 건이었다.
일주일에 한 건씩 시행한다고 해도 스승인 이준영 교수 혼자 공여자 수술을 담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존 수술이 있는 데다 수술하는 날까지 다른 탓이었다.
‘간 이식 수술 많아지고, 외래 환자까지 몰리면 쓰러지시겠네.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이리저리 고민하는 사이 수술을 마친 신현수와 손일석이 교수실로 찾아왔다. 각자의 파트와 더불어 위장관 라파로에 혈관 수술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너무 부러웠다.
‘현수도 위장관 라파로를 하면서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 민 부원장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에이! 나도 파트는 두 개나 되는데 왜 이렇게 노는 시간이 많지?’
곧 변할 것이다.
이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 건의 이식 수술이 확정적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손일석이 뛸 듯이 기뻐했다.
간암 수술, 민정호의 강력한 권유와 압박으로 시작한 위장관 복강경으로 이경석과 더불어 사인방 중 가장 바빴던 신현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고민을 토로하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준영 선생님 부담이 상당히 클 수밖에 없어. 공여자 수술 팀까지 이식 수술 팀을 아예 두 개로 나눠 운영해야 할 것 같아.”
“어떤 식으로?”
“선생님과 내가 한 팀, 현수하고 일석이 네가 한 팀이 돼 수술하면 어떨까? 두 팀으로 감당이 안 되면 도진이하고 병옥이를 추가 팀으로 만들면 되고.”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신현수가 은근히 김지훈과 한 팀이 되기를 바라는 눈치를 보였다. 강력한 라이벌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개원 후 스승과 수술할 기회를 아예 잃은 김지훈이었다.
‘수술이 아니어도 스승님께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나도 스승님과 대화 좀 하고 살자.’
김지훈이 싹 무시하고, 갈 길을 갔다.
순조롭게 모든 결정을 내렸다.
내과 컨설트를 번갈아 받기로 했다.
이제 시작인 데다 서도진과 강병옥이 간 이식 준비부터 수술까지 완벽히 적응하고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당분간 수술 전 준비는 두 팀이 모두 모여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다.
간 이식 전문 병원이었다.
외과만이 아니라 관련된 의료진 전원이 참석해 함께 준비하는 것이 마땅했다. 손발이 잘 맞아야 할뿐더러 환자에게도 무척 유리한 일이었다.
“김 과장, 내과하고 마취과는 누구하고 준비할 거야?”
“나는 석진이하고 김진호 선생님이 우리 팀이면 좋겠어. 고경아 선생은 누구 팀인지 말 안 해도 되겠지?”
“정식이하고 서연이가 우리 팀인 건 불만이 없는데, 고경아 선생 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하자. 그만한 역량을 가진 간호사가 없잖아. 우리 팀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해.”
“다른 수술도 많고, 교육까지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야. 병원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힘들어서 안 돼.”
김지훈이 단호하게 거부했다.
손일석이 눈을 쫙 찢었다.
“김 과장님, 최고의 수술 팀을 원하는 건 써전의 기본이자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그리고 병원 일만이라니요. 공과 사를 구분하셔야죠.”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어. 너야말로 객관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한 사람에게 일이 너무 많이 몰리면 얼마나 피곤한지 잘 알잖아? 실수할 확률만 커져.”
“나도 그건 인정하지. 그렇게 걱정이 되면 우리 팀하고 전담 간호사 선생을 바꾸시든가.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과장의 횡포 아니야?”
옥신각신, 티격태격.
아내이자 처형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과장의 권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수술 방 소속 다른 간호사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손일석 말마따나 써전이라면 당연히 부릴 욕심이었다. 어느 분야라도 최고의 실력자를 양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애먼 사람에게 불똥이 튀었다.
“현수야, 네 의견은 어때?”
둘 다 친구이자 동료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써전이었다. 오직 자신의 팀을 최고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을 탓할 수도 없었고, 고경아에게 상당한 무리가 될 것이란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아주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둘 다 양보할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네. 제수씨 정도면 누구하고 수술을 해도 호흡을 맞출 수 있으니까 번갈아 들어가는 게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아니면 수술 방 자체 결정에 맡기는 것도 좋겠지.’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찌릿! 찌릿!
김지훈의 눈에서 광망이 쏟아졌다.
‘현수야, 생각 잘해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와이프 쓰러지면 너 죽고, 나 죽고, 모두 죽는 거야.’
분명한 협박이자 위협이었다.
분연히 떨쳐 일어나 소신 발언을 해야 하건만 온갖 생각이 스쳤다. 왠지 동의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불이익을 당할 것만 같았다.
고심은 개뿔! 졌다.
손일석의 눈치도 보아야 했다.
“일석아, 혈관 수술 전담 간호사 선생이 이식 수술까지 담당하면 어떨까? 많은 면에서 고경아 선생보다 너하고 호흡이 더 잘 맞지 않겠어?”
“그런가?”
절대 보이지 말아야 할 틈을 보였다.
천하의 손일석이 말이다.
“오케이! 결정!”
땅땅땅! 책상 세 번 두드린 김지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평소 정시 퇴근을 모르고 살았던 인간이 어느새 옷까지 갈아입었다.
마님을 향한 일편단심, 사랑의 힘이었다.
“으윽! 으윽!”
손일석이 땅을 쳤지만 늦었다.
김지훈이 후다닥 로비로 달려가 응급실 한 번 힐끗 보고는 고경아를 기다렸다. 모처럼 함께하는 퇴근길이 꽤나 좋은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경아 씨, 여기예요.”
“일 하나 없어도 늦게 들어오던 사람이 웬일로 이 시간에 퇴근을 해요?”
“일이 없긴 왜 없어요? 오늘도 할 일이 남았지만, 오직 우리 경아 씨를 위해 과감히 던져 버렸다는 걸 왜 모를까?”
“희연이 보고 싶은 건 아니고요?”
“물론 희연이도……. 하하하!”
갖은 아양을 떨며 정문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병원 건물에 커다란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뜨일 정도였다.
<국내 최초 복강경을 이용한 담도공장 문합술 시행>
<국내 최초 복강경을 이용한 부신 절제>
<간 이식 수술 시행 확정>
<응급실 24시간 전문의 대기>
자기 홍보 시대라지만 왠지 낯부끄러웠다.
자기 자랑 같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더욱이 국내 최초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응급실 홍보에 간 이식은 시행 확정이라니 지나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구 생각이지? 민 부원장이겠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퇴근길에도 무척 깔끔한 복장을 한 민정호가 보였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민 부원장님, 저기 현수막 민 부원장님 생각이죠?”
“그렇습니다.”
“홍보도 홍보지만 좀 낯간지럽지 않습니까? 간 이식은 아직 시행하지도 않았고요.”
“창피하십니까?”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김 과장님, 사회는 정글입니다.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강자인 겁니다. 실력만 믿고 기다릴 때가 아닙니다.’
“그런 감정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감정과 일을 분리하고 현실을 직시하세요. 책임져야 할 사람이 누군지 잊지는 않으셨죠?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더 노골적으로 홍보를 해야 합니다.”
고경아가 옆에 있었다.
마치 지적하는 것 같은 직설적인 말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욱해 한마디 하려는 순간 민정호가 고경아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고경아 선생님 같은 분들만 계셨으면 현수막을 걸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항상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예?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퇴근하시는 모양인데 빨리 가시죠. 저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민정호가 예의를 차리고 갈 길을 갔다.
김지훈이 입만 벙긋거렸다.
‘뭐야? 와이프를 칭찬한 거야, 아니면 나를 돌려 깐 거야? 근데 경아 씨에게 하는 말은 또 왜 이렇게 예의 바르고, 길어?’
말 고와질 수 없었다.
“경아 씨, 저 인간이 원래 저런 사람인가요?”
고경아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어느 자리에서건 명백한 잘못이 없는 한 일단 남편 편을 드는 것이 가정의 화목을 위한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평소 민정호란 이름만 나오면 갈팡질팡하던 남편이었다. 칭찬을 하다가도 불만을 터트리고,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에 대한 감정이 오락가락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법이었다. 집에서는 아내지만 병원에서는 직장 동료로서 조언이 필요하다고 느끼곤 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그동안 말 못했는데, 민 부원장님이 간호사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항상 예의를 지켰고요.”
“예? 가끔 헷갈리기는 해도 무례하다고 느낄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고요?”
“그러게요. 이유가 있겠죠? 지훈 씨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서울 병원에서 받던 부담이 더 크긴 했어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차이가 뭘까?
김지훈이 눈가만 찡그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부터 시작해 간호사, 행정 직원들은 크게 불만을 터트리지 않았다. 최근 들어 김지훈 단 한 명만이 목표인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이유가 있다? 그래. 달리 생각하면 내가 병원 존립에 핵심이란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맡은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겠다는 말인가?’
아무리 봐도 냉정한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감정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정한 선에 맞으면 대우하고, 미달하면 독설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희한해. 그런데 민정호 나름 합리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또 뭐지? 헷갈린다. 헷갈려.’
그때 언제 봐도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김지훈의 허리가 90도 꺾였다.
“선생님, 퇴근하십니까?”
“김 과장, 여기서 뭐 해? 우리 고 선생도 있었구나.”
“저것 때문에요.”
이준영 교수가 현수막에 힐끗 시선을 주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병원이 실력으로 승부해야지 홍보에 너무 치중하면 오히려 거부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러다 역효과라도 나면…….”
김지훈이 주절주절, 고자질하는 아이처럼 속마음을 토로했다. 스승은 제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란 확신에 차 있었다.
“안 그렇습니까?”
이준영 교수가 물끄러미 눈길을 주었다.
“진상건 이사장을 잊지 마.”
단 한마디였다.
김지훈은 스승의 말이 아무리 짧아도 곱씹고 또 곱씹는 제자였다. 순간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준영 교수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고 선생, 희연이 잘 크지? 본 지 오래됐다. 일간 시간 내서 저녁 한 끼 하자. 김 과장 데리고 들어가.”
“예, 선생님. 조심해서 가세요.”
고경아의 목소리가 방방 날았다.
김지훈이 고개만 숙였다.
‘진상건 이사장이라! 후우! 눈에 안 보인다고 어떤 사람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지 잊었었네.’
병원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간이 지금도 전문 병원의 폐업을 바라고 있다. 민정호가 어떻게 행동하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현실이었다.
김지훈이 퇴근길 내내 쩝쩝 입맛을 다시며 말을 잃었다. 머리를 톡톡 치다 말고 돌연 웃었다.
고경아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