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왜?”
“전 췌장과 담도 전문이 목표입니다. 과장님을 최대한 빨리 뛰어넘어야 하는데 다른 파트에 눈 돌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후배의 도발이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야! 무섭다.”
“간 이식에만 신경 쓰셔야 할 겁니다. 도진이하고 병옥이가 저보다 더 무서운 놈들입니다.”
“우리가 뭘 어쨌다고?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큰 웃음이 터졌다.
한가하면 한가한 대로, 바쁘면 바쁜 대로 융통성 있게 상황을 조절하는 것만이 과장의 의무나 책무는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 또한 후배가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써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병원은 고인 물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부신 수술을 하루 앞두고 드디어 간 이식 환자 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윤석진과 공정식이 노력한 결과를 보게 되는 날이었다.
김지훈이 가슴을 폈다.
실적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돈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열과 성을 다해 환자, 보호자를 대하다 보면 절로 따라올 결과였다.
“손일석 선생, 몇 명이나 모였을까?”
“너무 조용한데.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잖아. 몇 명 안 되어도 실망하지 말자고.”
서도진과 강병옥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김지훈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처음인데 많겠어? 모두 준비는 다 했지?”
“예. 최대한 알기 쉽게 준비했습니다.”
“들어가자.”
문을 열었다.
써전 네 명이 얼어붙었다.
작지 않은 회의실이 가득 찼다.
전형적인 간 기능 부전 환자부터 걱정 가득한 가족들의 수많은 눈동자에 불안과 기대가 어려 있었다. 김지훈에겐 감동이자 무한한 책임이었다.
‘이식을 해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윤석진이 간 이식 파트를 소개했다.
“김지훈입니다. 손일석입니다.”
“서도진입니다. 강병옥입니다.”
큰 박수로 환영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보험 적용 문제까지 직접 담당하신 선생님입니다. 여러분의 수술을 책임질 김 과장님 말씀 먼저 듣고 궁금한 점 질문하시면 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간 이식에 드는 비용 문제로 걱정이 많으실 겁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보험 적용 이후의 변화입니다.”
민정호 덕에 의사는 치료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많이 벗어났다. 환자와 가족에겐 치료 이상으로 절실한 문제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기존 비용부터 시작해 보험 적용 이후 예상되는 비용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기증을 바라는 환자, 생체 이식을 염두에 두는 환자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말했다.
역시 민감한 문제였다.
질문이 쏟아졌다.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답변하며 환자와 가족들의 반응을 살폈다. 누군가는 기뻐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30퍼센트도 적지 않겠지.’
툭하면 억대 이상의 비용이 드는 희귀 질환부터 시작해 셀 수도 없는 암 환자까지 중증 질환을 가진 모든 이들이 갖는 공통적인 고민이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의료계의 권한이 아니었다. 전보다 확연히 줄어든 비용에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치료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어서 수술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손일석 선생님,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 대신 다른 선생님이 말씀드릴 겁니다.”
손일석이 편안한 자세로 서도진을 가리켰다.
발표가 이어졌다.
생체 간 이식이었다.
곧이어 강병옥이 뇌사자 장기 기증 시 필요한 절차와 수술 시기 등에 대해 설명했다. 환자와 가족만 동의하면 되는 생체 이식과 달리 정부와 관련된 사항이 많아 꽤 시간을 잡아먹었다. 미리 참석하고 있던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가 보충 설명까지 해야 했다.
“불법인 장기 매매를 방지하고자 정부가 직접 관여하고 있습니다. 뇌사자 발생 시 개별 병원이 아닌 전체 등록 순서를 따른다는 점을 꼭 알아 두세요.”
역시 많은 질문이 나왔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석이도 같은 생각이겠지?’
혼자 모든 설명을 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
서도진과 강병옥을 보는 환자들의 눈에 신뢰의 빛이 비쳤다. 의도한 바였고, 차후 다른 환자들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예정했던 시간이 훌쩍 넘었다.
김지훈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이런 분위기면 수술이 확실하게 늘어나겠어. 예정된 환자들의 수술 결과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실패는 아예 생각하지 말자.’
자리를 마무리하기 직전이었다.
불쑥 민정호가 들어왔다.
김지훈이 흠칫거렸다.
보다 유연한 태도를 취했던 손일석이 지그시 눈길을 주었다. 입가를 씰룩거리는 것이 어째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하는 모양이었다.
“민정호에게 개망신 당했다고 들었어. 돈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말은 심하지. 어쨌든 잘 참았어. 강호가 원래 그런 세상이잖아. 장부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아.”
“장부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단어에 연연하지 말고 숨은 뜻을 봐. 아직도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볼래?”
전체 회의가 무난하게 끝났다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김지훈 역시 서운한 감정이 앙금처럼 남아 있는데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보자니 은근 기분이 가라앉았다.
“윤석진 선생,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말 안 했나? 민 부원장이 환자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끝날 때쯤 오라고 했어.”
의도가 빤히 보였다.
힐끗 시선을 준 민정호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써전들의 시간이 끝나고 윤석진이 민정호를 소개하자 아주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행정부원장을 맡고 있는 민정호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을 뺏은 이유는 보험 적용과 실제 치료 비용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갑갑한 얘기였다.
굳이 자리를 지키지 않아도 좋았다.
김지훈은 일어나지 않았다.
‘잘 얘기해야 할 텐데.’
민정호가 실제 수술한 예를 들어 가며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했다. 내심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우려했건만 준비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치료가 상당히 많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환자분들이 예상한 비용을 30퍼센트 이상 초과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 병원은 최대한 현실을 반영하고자 합니다.”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노력하겠습니다. 최소 다른 병원보다 부담이 커지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환자들 모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의외일 정도였다.
내심 못마땅했던 김지훈도 끄덕여야 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치료 비용은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미리 계획을 짜 준비해야 하는 가족 입장에서 정확한 비용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하기에 수술을 시행하는 병원 또한 명확히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어째 환자들에게 더 신뢰를 주는 것 같네. 하긴 예상보다 비용이 더 나오면 사람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을 거야.’
묘한 기분이었다.
의술은 인술이라는 명제는 옳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었다. 의사 대부분 환자에게 말하길 꺼려하지만 돈과 의료는 별개가 아닌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었다.
돈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반면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의사도 비용에 신경 써야 하는 시대였다.
김지훈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야! 돈 문제는 확실히 민정호 몫이야. 말하기 갑갑한 일을 참 깔끔하게 설명하네. 저 표정, 저 말투로 사람들 끌어당기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야.”
손일석 역시 툴툴거리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사람의 절실함은 절대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민정호에게 온갖 문제를 문의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의료에는 분명 문외한이었을 민정호라는 인간에게도 말이다. 단순히 돈과 계약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할 수 있는 준비가 아니었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자리가 끝났다.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럴 때 보면 함께 일해야 할 사람이 분명한데 공사 구분이 너무 확실해서 문제네. 민 부원장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잖아.”
“아예 없지. 이런 어중간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말이야. 결국 내가 나서야 일이 풀릴 것 같네.”
“뭐 하려고?”
“사람 아는 데는 술이 최고잖아.”
“어림없다. 애쓰지 마.”
손일석이 두고 보라는 듯 민정호를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환자와 가족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오해도 다소 풀렸는데 이쯤에서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술이나 한잔합시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을 왜 합니까? 술 마시는 데 큰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아! 혹시 술을 아예 못하시나요? 그럼 음료수라도 마시면서…….”
“거절하겠습니다. 사적인 일은 삼가해 주시고, 병원과 관계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사람이 꼭 한 가지 일만 하라는 법 있어요? 술 한잔하면서 병원 일을 얘기하면 되잖아요? 겸사겸사 인간적으로 친해지면 얼마나 좋아요. 세상 그렇게 엄숙하게 살아야 피곤할 뿐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민정호가 매정하게 돌아섰다.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빨도 안 들어가네.”
“거봐. 내가 애쓰지 말라고 했지? 커피 한 잔 같이 마시기 힘든 사람이야.”
“정말 저렇게 살아도 안 힘든가? 친구는 있는지 모르겠어. 설마 부모님에게는 안 그러겠지?”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입을 내밀었다.
‘왜 지나칠 정도로 거리를 두는 걸까?’
문득 존폐라는 말이 떠올랐다.
민정호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존립으로 결정하면 병원 식구 누구와도 얼굴 붉힐 일이 없었다. 도리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반대라면?
‘구조 조정 전문가였으니까 무자비하게 병원을 청산하려 하겠지? 그 전에 인간적으로 친해지면?’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철천지원수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상황을 대비하고 있거나, 혹은 지난날의 경험으로 몸에 밴 원칙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돌연 등짝이 서늘해졌다.
민정호의 의도나 결정대로 병원의 미래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라 해도 등을 돌려서 좋을 일이 없었다. 지금도 연락을 취하고 있을 진상건과 민정호의 능력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손일석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럴듯해. 우리 김 과장 생각이 맞는다면 민정호는 여전이 위협적인 사람이네. 어떻게 해결하지?”
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어차피 육 개월은 꼼짝 못할 민정호였다.
“우리는 하던 대로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면 돼. 동시에 민 부원장이 가진 능력을 모두 뽑아내 병원에 사용하도록 밀어붙여야 해. 홍보와 재정 절감은 당면 문제잖아?”
“좋은 생각이야. 밀어붙인다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든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몸으로 부딪쳐야 없던 정도 생기잖아.”
김지훈이 어깨를 폈다.
특이한 성격을 가진 사람과 함께 일할 뿐이었다. 동료라는 개념을 갖고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워낙 강한 탓일 수도 있었다.
사실 개인적인 친분이나 유대를 빼면 고민할 일이 없었다. 각자 해야 할 일에 전력을 기울이면 부차적인 일까지 절로 이뤄질 상황이었다.
“일석아, 가자.”
“회진?”
“회진도 돌고, 내일 부신 라파로도 최종 점검 해야지. 경석이 형이 성공하면 학회에서도 난리 날 거야.”
손일석이 웃었다.
‘너 같은 놈이 내 친구라니 운도 좋네. 욕심 부리지 않아 고맙다. 함께 가자고 한 말 지켜 줘 정말 고맙다.’
“역시 넌 대장부야.”
“무슨 소리야? 너도 이젠 대장부니 강호니, 뭐 그런 소리 안 할 때도 됐잖아.”
“네가 판타지나 무협을 몰라서 그래. 생활화시키는 순간 어떤 상상력이 발휘될지 모른다고.”
“환자나 잘 보세요.”
구시렁구시렁.
강호성의 밝은 웃음과 차차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나가는 엄마를 만난 후 회의실로 향했다.
이경석의 얼굴이 다소 발갛게 보였다.
일이 없는 써전 대부분이 참석했다.
흐뭇한 눈으로 제자를 보는 송재덕 교수의 입가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이경석 선생, 시작하자. 시작하자.”
전에 없던 열기가 써전들을 감쌌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도약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