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변할 것도 없는 눈빛이 변했다.
김지훈은 그렇게 느꼈다.
“김 과장님, 아직 제 말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보고 느끼는 점이 없으십니까?”
그동안 같은 주제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다.
충분히 곤란했고 답답했지만, 수술이 점점 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의사만큼 수술 건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민정호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다각도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확실한 방법을 찾으려면 목표로 삼아야 할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김 과장님이 올려야 할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흔히 듣는 말이 있었다.
개인 병원 봉직의는 흔히 월급의 서너 배에 달하는 매출을 요구받는다. 반면 수가가 높은 대신 규모가 크고, 관련 인력이 많은 대학 병원 급은 대여섯 배 이상이라는 말이 일반적이었다.
다들 대충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떤 의사에게도 확실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의술은 인술이라는 말을 듣고 산다.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돈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을 돌려 말하는 것뿐이었다.
즉, 돈 벌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거의 모든 치료 행위가 민간에 맡겨져 있는 현실을 떠나 의사들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기에 매출이라는 단어부터 시작해 진료 행위를 돈 문제와 직접적으로 결부시키는 것 자체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콧등만 찡그렸다.
“생각대로 말하기 꺼려하시는군요. 의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그 점은 지나갑니다만, 설마 대여섯 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어라? 잘못 알고 있었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 과장님은 파트 주임 교수고, 세 파트나 다름없는 수술 팀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중복되는 인원을 빼도 최소 여섯 명에 가까운 써전을 유지할 수 있는 수술을 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명이 아니라 여섯이라고?
헉! 소리 절로 터졌다.
민정호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항변할 틈도 주지 않았다.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합니까? 본원의 주요 장비와 시설 대부분 간 이식에 맞춰 구비됐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김 과장님의 파트가 병원의 존립과 폐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변명은 아닙니다만, 자리 잡는 데 시간이 걸리는 분야입니다. 상대적으로 흔한 질환을 담당하지도 않고요.”
“그걸 개원 전에는 모르셨습니까? 누구보다 앞장서 전문 병원 설립을 주도한 것으로 아는데 제겐 변명으로 들립니다. 핑계조차 될 수 없습니다.”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돈! 돈! 돈!’
월급 타며 병원 재정에는 신경 쓸 필요조차 없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였다. 이 모든 일의 원흉 진상건은 물론 돌변한 민정호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그때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
‘정말 돈 문제일까?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일인가?’
아니었다.
민정호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 핵심이 있었다.
이제야 자신의 수술을 잡은 후배들과 간 이식 파트임에도 혈관 수술을 하며 입이 귀에 걸린 손일석의 얼굴이 휙휙 스쳤다.
“첫 달 적자의 대부분은 김 과장님 파트에서 발생했습니다. 위기감을 갖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셔야 합니다. 책임져야 할 직원이 몇 명인지 항상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제대로 한 방 얻어맞았다.
민정호의 입은 그야말로 비수였다.
아예 가슴을 후벼 팠다.
‘행동으로 보여라!’
공개적인 자리에서 개망신을 당했지만 왜 내게만 이러냐고 항의할 근거조차 없었다. 사람인지라 하마터면 욕까지 나올 뻔했지만 인정해야 했다.
단지 과장이라서가 아니라 설립을 주도한 의사로서 응당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가 구석에 몰린 제자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사람이었다.
김지훈이 하등 쓸데없는 자존심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며 이성의 끈을 꽉 잡았다.
‘어후! 자존심 팍 상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네. 그래. 민정호 당신 말이 맞아. 최소 나라도 월급 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안일했어. 무의식중에 우리 파트, 우리 과, 우리 병원의 미래를 위해 일해야 하는 현실을 피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혁민 교수, 박승준 교수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새삼 깨달았다. 원장인 송재덕 교수와 부원장을 맡은 이준영 교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
책임을 맡은 사람과 자신의 일만 하면 되는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깊은지 확실하게 알았다. 준비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
침묵이 길어졌다.
신현수가 불안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한 번 터지면 누구보다 무서운 김지훈이었다.
좋은 말도 때와 상황에 어울리지 않으면 반대로 들리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민정호의 말 대부분을 자신도 피해 갈 수 없기에 도리어 중재조차 힘들었다.
‘내 책임이 더 클 텐데 과장이란 이유로 지훈이가 다 뒤집어쓰네. 미안하다. 회의 끝난 후 술이나 한잔하자.’
김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민정호를 직시했다.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민정호도 피하지 않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지훈아, 부딪쳐야 우리만 손해야. 참아!’
다들 좌불안석 불안을 금치 못했다.
첫 회의부터 격하게 충돌하면 다음 한 달 분위기가 어떻게 변할지 불을 보듯 빤했다. 누군가 개입해야 할 상황이건만 김지훈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이준영 교수마저 지켜만 보았다.
김지훈의 입이 열렸다.
“민 부원장님,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세세하고 구체적인 말까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행이군요. 말씀에 통감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원장님, 부원장님, 과장님들께 약속합니다. 앞으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소나기 피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정성이 묻어났다.
민정호가 빤히 쳐다보았다.
해야 할 말이 더 있다는 눈빛이었다.
“민 부원장님에게도 약속합니다.”
팽팽했던 긴장이 빠르게 풀렸다.
자칫 큰 소리 날까 우려했던 참석자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민정호 역시 예의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지만 김지훈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나 호의를 보이지만, 반대 상황에 몰리면 욱하기 마련인데 확실히 다르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민정호가 한 장의 봉투를 건넸다.
“김 과장님, 과장님이 달성해야 할 구체적인 실적을 적은 서류입니다. 참조하시고, 다음 달에는 달라져 있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겁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끝까지 밀어붙이다니 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네. 하지만 나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민 부원장님도 계약 기간이 이 년이란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가장 민감한 부분을 공개적으로 건드렸다.
민정호가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었다.
적어도 계약에 목을 거는 민정호에겐 그랬다.
이준영 교수가 웃었다.
분명 민정호는 김지훈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무엇보다 환자와 돈을 노골적으로 연관시켰기에 자칫 서로의 가치관을 걸고 충돌할 수 있었다.
김지훈은 잘 참았다.
오히려 말속에 숨은 뜻을 찾아내 받아들였다. 아무리 속이 깊은 사람이라도 혈기만 왕성한 시절에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흘러온 세월만큼 발전하며 성숙해졌다는 말이었다.
‘지훈아, 넌 작은 병원 안에서 살 운명이 아닌 것 같다. 원치 않아도 보다 넓은 사회로 나가게 되겠지. 그때마다 이런 일을 수없이 경험하게 될 거야. 오늘을 약으로 삼아 당당하게 이겨 내길 바란다.’
민정호는 분명 예측 가능한 사람이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은 표면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인간적으로 가까워져도 감정을 앞세우지 않을뿐더러 상대의 실수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성격일 따름이었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무척 엄격하기에 비난할 구석도 없었다.
‘지훈이와 대화를 많이 해 이젠 부드럽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자존심까지 긁을 줄 몰랐어. 쉽게 보지 못할 성격이 분명해.’
어쩌면 이준영 교수 또한 그런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해 민정호를 보다 쉽게 이해하는지도 몰랐다.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김 과장, 잘했다. 잘했어. 우리끼리 싸우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제 풀에 망하는 거지. 이대로만 가자. 이대로만. 민 부원장도 말 좀 싹싹하게 해. 아무리 좋은 말도 그렇게 하면 기분 나쁘다. 그치? 내 말이 맞지?”
“공적인 일에 감정은 금물입니다.”
“감정을 빼려고 하는 게 바로 감정이야. 감정. 자연스럽게 말해. 화가 나면 내고, 즐거우면 웃어.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다. 웃통 벗어도 시원찮을 김 과장도 가만히 있잖아. 나 같았으면 바로 들이박았어. 바로. 둘 중의 하나는 죽는 거야. 둘 중의 하나는.”
심각한 듯, 농담인 듯.
“원장님, 애초부터 웃통 벗을 생각 없었습니다.”
“김 과장까지 왜 그래? 왜? 편을 들어 주는 거잖아. 편을. 겸사겸사 민 부원장에게 욕도 하는 거고. 민 부원장이 그렇게 좋아? 그런 거야?”
누군가 웃음을 참지 못해 캑캑거렸다.
민정호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동감했단 말이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건가? 어쨌든 김지훈이란 사람이나 이준영 교수님이나 둘 다 결코 만만치 않네.’
송재덕 교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논의가 이어졌다.
재정만이 주제가 아니었다.
진료 도중 경험한 불편들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며 개선책을 찾았다. 건의 사항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병원의 주역들이 직접 환자를 보며 느낀 문제기에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김지훈도 열심히 듣고 말했다.
병원 구조상 원장, 부원장 다음가는 책임을 지고 있어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비록 시작은 불편했지만 이어진 시간은 무척 건설적이었다.
민정호가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돌연 무표정했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에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다음 회의 때는 어떤 문제들이 개선됐는지 보고해 주기 바랍니다.”
회의가 끝났다.
송재덕 교수가 은근슬쩍 쿡 찔렀다.
“김 과장, 다음번에는 민 부원장에게 큰소리치자. 큰소리. 그럴 수 있겠지? 그치?”
김지훈이 웃기만 했다.
간 이식을 포함해 환자가 늘고 있는 이상 자신만 생각하면 당연히 가능한 목표였다. 그러나 맡고 있는 파트, 즉 여섯 명의 써전을 고려하면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혼자 도달할 수 없는 목표였다. 결국 현재 취하고 있는 진료와 수술 배정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내가 주임 교수를 맡고 있다고 해서 두 개 파트의 모든 권한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어. 간 이식이 활성화될 때까지 적절한 분배도 중요해.’
서도진, 강병옥, 서도훈을 불렀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환자가 없어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실상 독점에 가까웠던 권한을 대부분 포기했다. 부족했던 진료 시간을 늘리고, 수술 역시 각자의 판단으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했다.
단 한 가지만은 예외를 두어야 했다.
“미안하지만 간 이식은 당분간 내가 전권을 가질 수밖에 없어. 각자 경험이 쌓여 독자 수술이 가능해지면 우리 파트를 어떻게 운영할지 다시 상의하자.”
“간 이식은 우리도 배워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전체 건수가 적어 걱정입니다. 한 달에 네 건 정도로는 숙달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서도진이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간 부린 수술 욕심도 간 이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손을 놀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아뻬조차 부담스러운 것이 써전인 탓이었다.
“그 점이 나도 고민이야. 서도훈 선생이 양해를 해 줘야겠어. 당분간 간 이식 이외의 수술을 적정한 선에서 골고루 나눠 해야 할 것 같다.”
“전 괜찮습니다. 다만 제가 췌장과 담도 파트의 메인이라는 점만 생각해 주십시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내과 컨설트는 적정히 내달라고 했어. 내가 양해해 달라고 하는 건 서도훈 선생이 직접 진료하게 될 환자를 말하는 거야. 간 이식보다는 훨씬 많아지지 않을까?”
“과장님이 우리에게 환자를 주신 것처럼 상황을 보며 서도진 선생이나 강병옥 선생에게 제 환자를 의뢰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서도훈이 잠시 고민했다.
당장 손에 쥔 떡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의뢰할 환자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홀로 살 수 없는 법이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으라 했다.
각자 별개의 파트였지만 자신의 파트와 간 이식은 불가분의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욕심을 부려 봐야 장기적으로 손해일 뿐이었다.
더욱이 가장 친한 동기가 걸린 일이었다.
솔직히 친분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써전이자 서로 배우는 관계기에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김지훈이 툭 서도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다. 이런 고민도 얼마 가지 않을 거야. 간 이식이 팍팍 늘면 서도훈 선생도 함께할지 모르겠어.”
“전 사양하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