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90화 (1,090/1,329)

16화

엄마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호성이에게 못할 짓을 했다.

엄마와 호성이 앞에서 사과하는 것이 옳았다.

그것이야말로 강호성과 엄마를 치유하는 길이었고, 제대로 된 사과였다.

“송진우 선생, 지금 면회시키자.”

엄마가 들어왔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엄마를 맞이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부드러운 손길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눈물부터 흘렸다.

“엄마! 울지 마. 나 안 아파. 정말이야, 엄마!”

강호성이 엄마 품에 안겨 울었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엄마와 아들이었다.

김지훈이 말을 잃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먹먹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강호성과 엄마에겐 하루에 단 세 번 주어지는 시간이었다. 결코 길 수 없는 시간이기에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김지훈 때문인지 엄마가 눈치만 보았다.

강호성은 울기만 했다.

‘엄마 얼굴 보기 싫다고 회진 후 면회를 시킨 것이 이런 일을 만들 줄이야!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구나.’

김지훈이 엄마를 보았다.

“호성이 어머니!”

“죄송해요. 죄송해요.”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일까?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호성이와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동안 무례하게 행동한 것 사과드립니다.”

김지훈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엄마가 어쩔 줄 몰라 허둥댔다.

사과 한번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이란 놈이 가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슴이 더 아파졌다.

‘후우! 무슨 생각으로 호성이를 본 걸까?’

김지훈이 마음을 다해 다시 한 번 사과했다.

강호성의 엄마는 그저 자식만 끌어안을 뿐이었다. 어쩌면 사과의 말이 들리기는커녕 깊숙이 숙인 허리조차 보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에게 억눌리다 못해 짓눌렸기 때문일 것이다.

“죄송합니다.”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김지훈이 중환자실을 나왔다.

강호성의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심사를 괴롭혔다.

답답한 한숨만 터졌다.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정말 기나긴 사흘이었다.

‘차라리 몸이 힘든 것이 훨씬 낫네.’

지친 마음으로 퇴근했다.

“아빠!”

며칠 만에 아빠의 품에 안긴 희연이가 떼를 부리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언제나 남편을 응원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 주는 고경아가 고마웠다.

“힘들었죠? 얼른 씻고 자요.”

죽을 때까지 갚아도 모자랄 것이다.

***

하루하루, 새날이 밝았다.

강호성이 드디어 병실로 올라왔다.

수술 후 금식 때문에 더욱 마른 아이의 영양 공급과 약해진 면역부터 정서적인 면까지 어느 환자보다 신경 써야 할 점이 많았다.

치료는 의료진의 몫만이 아니었다.

강호성이 엄마 손을 놓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함께 걸었다.

밝은 햇살을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

물, 미음, 죽으로 이어진 식사도 문제없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김지훈을 볼 때마다 밝게 인사했다.

엄마도 인사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젠 죄송하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이 더 많이 들렸다. 가끔씩 어색하게나마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깊은 어둠만이 감돌았던 곳에서 어떤 관심도 받지 못했던 한 여인과 자식이 세상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여기던 평범한 가족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 주었다.

경찰의 감시까지 사라졌다.

“호성이와 엄마 모두 피해자로 결론이 났습니다. 흉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아빠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더없이 반가운 말이었다.

얼마나 강력한 처벌을 받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강호성과 엄마는 짐승에게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부디 일평생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하나의 문제가 풀린 덕일까?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파트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내과에서 의뢰한 환자를 직접 진료한 서도진, 강병옥, 서도훈이 각자 수술 날짜를 잡고 준비에 들어갔다.

김지훈은 아예 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술 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정말 안 들어오실 거예요?”

“세컨 서기 싫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냉정한 놈들!’

세 개의 메이저 수술 예약과 연이어지는 손일석의 혈관 수술이 한가했던 써전들의 팔다리를 조금은 바쁘게 했다. 당연히 풀어졌던 긴장의 고삐도 다시 조였다.

김지훈 역시 슬슬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경석을 도와 부신 수술 준비에 바짝 신경 썼다. 충분한 논의를 통해 복강경으로 시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드디어 약속했던 진료 날을 맞이했다.

목요일 오전, 이경석과 함께 만났다.

이경석이 집도의로서 유선영 환자를 진료했다.

결혼을 약속한 연인과 함께였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상당히 초조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병을 이해하고, 같이 치료하고자 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희망을 전했다.

“복강경으로 시도하겠습니다.”

단 한마디에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이번 주에 필요한 검사를 모두 하시고, 다음 주 월요일에 입원하시면 됩니다. 수술은 수요일에 김지훈 선생님과 함께하겠습니다. 혈압과 칼륨 수치가 반드시 안정돼야 하니까 내과 치료를 등한시하면 안 됩니다.”

투병 중 불과 하루 사이에도 큰 변동을 경험했던 유선영이었다. 어렵게 원하는 수술을 받게 된 이상 며칠 상간이라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김지훈에게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순수한 사랑과 온갖 조건이 걸리는 결혼의 의미를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집안, 명예, 돈이 아닌 건강이 걸림돌이란 사실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아무 문제 없이 결혼하기를 바랍니다. 지금처럼 평생 동안 예쁜 사랑을 했으면 좋겠네요.’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곧바로 자신의 진료실로 향했다.

예약된 환자 모두 기존에 수술받았던 환자들이었다. 오전이면 모든 진료가 끝나지만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돼.’

하루가 빠르게 저물었다.

서도진이 가장 빠르게 수술을 했다.

담도암이었다.

많은 사람이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로 내원하는데 무척 운이 좋은 환자였다. 일반외과에서 가장 큰 수술인 휘플만이 유일한 치료였다.

여섯 시간에 걸쳐 담도, 췌장 일부, 위 일부, 담낭을 포함해 광범위하게 절제한 후 소장을 끌어와 새로운 통로를 만들었다.

깔끔했다.

이혁원은 완벽한 퍼스트였다.

집도를 해도 충분한 써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김지훈은 수술 내내 참관하며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함께 수술하는 것처럼 손을 놀리며 서도진만이 가진 장점을 놓치지 않았다.

‘언제 봐도 대담한 손이야.’

“끄으으응!”

환자가 잘 깨어났다.

회복실까지 따라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재빨리 자리를 피한 김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간 이식 시작까지 남은 이 주가 문제구나. 환자 모임에 참석해 보험 적용부터 수술 방법이나 절차까지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어.’

슬슬 머리를 돌리는 순간 회의 하나가 떠올랐다.

원장, 부원장, 각 과 과장, 진료부장, 응급실장에 신현수와 민정호까지 참여하는 회의가 오후에 열릴 예정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열기로 한 정례회의인 데다 경영 전반에 대한 평가 자리라 은근히 걱정됐다.

‘분명 실적 얘기가 나올 텐데.’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기대치에는 현저하게 못 미치지만 두 번의 당직을 포함해 장풍연 환자와 강호성까지 상당히 큰 수술도 여럿 시행했다. 더구나 이제 개원 한 달이 지났을 뿐이었다.

‘최선을 다했고, 다음 달에는 더 좋아질 거야.’

김지훈이 어깨를 폈다.

회의가 열렸다.

몇 장으로 이뤄진 자료가 자리마다 놓여 있었다. 지난 한 달간 올린 각 과의 실적과 병원 전체 비용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를 제외한 나머지 의사 모두 상당히 어색한 표정이었다. 이런 자료를 접해 보기는커녕 비슷한 성격을 가진 회의에 참석했던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내용도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까만 것은 글자와 숫자요, 하얀 것은 종이라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황이 변하지 않았으면 민정호가 농간을 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했다.

수입보다 비용이 많았다.

그것도 상당한 차이가 났다.

한마디로 완벽한 적자였다.

회의를 주재하는 송재덕 교수가 입을 열었다.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의 시작합시다. 앞으로 여러 문제를 상의해야겠지만 오늘은 경영 문제를 주로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들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비록 초반이라고 해도 상황이 좋지 않아요. 구체적인 문제를 알아야 해결 방안이 나올 테고, 재정에 관한 한 전문가의 시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민 부원장, 시작하세요.”

민정호가 일어났다.

“비용 측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비중이 큰 인건비를 비롯해 절대다수 항목이 고정 비용입니다. 임금 삭감 같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줄일 여지가 없다는 말이죠. 결국 문제는 수입입니다. 누가 얼마나 공헌을 했는지 차례차례 확인해 보겠습니다. 먼저 원장님 실적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전체가 아니라 개인별로 본다고? 수입이 문제라면서 공헌이라고 하니까 더 찔리네. 그래도 내 실적이 생각만큼 적지는 않아 다행이다.’

평가 방식에 적잖은 불만이 있었지만 송재덕 교수가 용인한 이상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표상으로 가장 처참한 의사는 따로 있었다.

그게 더 걱정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빤히 보이는데 말해 뭐 해? 원장 자리 차고 앉아 월급만 축냈지, 수술 한 건 없어 면목이 없다. 없어.”

순간 모두 민정호를 보았다.

이제 성격 모르는 사람 없었다.

더구나 돈 문제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민감했다.

때론 차갑다 못해 독설도 서슴지 않았었기에, 원장이자 가장 연배가 높은 송재덕 교수에게 어떤 말을 할지 몰라 다들 좌불안석이었다.

자칫 분위기 험악해질 수도 있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아닙니다. 조금 더 기여해 주시면 좋겠지만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완전 예상 밖이었다.

“내가? 정말이야? 정말?”

“애초부터 수술을 위해 모신 것이 아닙니다. 원장님을 존경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강호성처럼 외부 힘이 필요한 일, 각 병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환자를 유치하는 일에만 전념해 주십시오.”

“내가 얼굴마담이구나? 얼굴마담. 민 부원장도 날 존경하나? 그래?”

좀처럼 좋은 소리 하지 않는 민정호였다.

분위기 확 바뀌었다.

의도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스텝들과 원만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의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왜 대답을 안 해? 왜?”

“원장님, 사적인 질문은 삼가해 주십시오.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갈수록 수술이 늘어나는 복강경 파트와 부원장님께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뭐지? 이거 완전히 예상을 벗어나네.’

“내과를 비롯해 마취과, 방사선과, 응급실은 해당 분야의 특성을 고려할 때 평균은 달성했다고 판단됩니다. 단, 평균이라는 말이 경영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현재 수준으로는 수입에 비해 과도한 월급을 받는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더욱 노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존폐를 논하며 사방팔방 압박을 가했던 민정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약간의 자극을 통해 의료진의 기운을 북돋는 것처럼 보였다.

태도까지 정말 정중했다.

다른 사람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인지 한결 편안한 눈빛을 보였다. 부담스러웠던 자료를 다시 보며 의견을 나눌 정도로 분위기가 좋아졌다.

김지훈도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얼굴은 여전히 냉정하지만 민 부원장에게 이런 면이 있었네? 함께 가자 이거지? 예상 못한 일이야.’

몇 마디 던지며 끼어들었다.

가장 자신 있는 부분부터 꺼냈다.

“응급실이 전체적으로 한가했지만…….”

채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민정호의 눈길이 꽂혔다.

단 한 명 거론되지 않은 의사가 남았다.

바로 김지훈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