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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89화 (1,089/1,329)

15화

의료진, 환자, 행정 부분이 모두 동의할 수 있으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보험이 된다고 해서 생체 간 이식 시 필요한 모든 치료에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절대 무리하면 안 됩니다. 자칫 환자 자체가 줄어들 수도 있으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병원도 상황이 다르지 않을 테니 보조를 맞추면 문제없겠죠. 그리고 주말에 수술한 환자 중 일부는 우리 병원에서 이차 수술이 불가능해 이송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같은 방침을 고수할 생각이십니까?”

손일석과 나눈 말을 그대로 전했다.

“대비하겠습니다.”

할 말 다 했다는 눈빛이었다.

김지훈이 재빨리 일어나려는 민정호를 앉혔다.

내내 수세에 밀렸다고 해서 감정이 안 좋아질 이유가 없었다. 이기고 지는 일도 아니었다. 이런 때일수록 인간적 유대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법이었다.

“호성이 퇴원 후 일까지 신경 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돕지 못해 죄송하지만 최선을 다해 주세요.”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시에서 병원비를 해결해 주기로 한 데다 지금도 사람들 이목이 집중돼 있습니다. 여기서 발 빼면 오히려 홍보 효과가 반감될 겁니다. 극대화시키기 위한 방편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마워서 한 말인데 참 냉정하네요. 혹시 연민이나 그 비슷한 감정은 없는 겁니까?”

누구나 발끈할 말이었다.

민정호는 물끄러미 김지훈을 볼 뿐이었다.

“과장님은 환자가 불쌍해서 수술하십니까? 시장은 정말 강호성 문제를 통감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한 것 같습니까? 경찰은 또 어떻고요? 감정만으로 풀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관련된 사람들 모두 각자의 상황과 이해득실을 따지기 마련입니다.”

민정호다운 말이었다.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아 더욱 냉철하게 들렸다. 솔직히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평소라면 따박따박 반박했을 김지훈이었다.

그런데 웃었다.

절대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민정호가 미세하게 동요했다.

“왜 웃으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고마워서요.”

때론 글자 하나가 맥락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감정으로와 감정만으로는 완전히 다른 표현이었다.

‘민 부원장도 땀내 나는 사람이었네.’

왠지 어색해졌다.

“이런! 커피도 안 드렸네요. 전에 보니까 블랙으로 드시던데, 믹스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민정호가 손을 저었다.

김지훈이 싹 무시하고 커피를 탔다.

정성을 다했건만 입은커녕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자리는 지켰다.

그것만으로도 변했다면 변했을 것이다.

“들은 대로 믹스 커피는 아예 안 드시는군요.”

“알면서 왜 타셨습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 전 딸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 와이프는 이미 아실 테고요.”

“사적인 질문은 삼가해 달라고 했습니다.”

“알아서 나쁠 일 있겠습니까?”

민정호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는 김지훈만 보았다.

왜 안 일어날까?

이유가 있었다.

정한득 때문이었다.

민정호가 고민을 거듭했다.

진상건의 말로 유추해 볼 때 진평호 때부터 관계가 깊었던 인물이자 정부 기관에서 고위직까지 역임했던 것이 분명했다.

결정적으로 진씨 일가와 이해관계가 맞물렸다.

삼 개월 후에도 이번 논의 때처럼 전문 병원의 앞날을 막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 빤했다. 편법의 경계선을 드나드는 이상 누구도 제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항할 무기라고는 열정밖에 없는 김지훈 과장과 이준영 교수였다. 누가 개입했는지조차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도 남았다.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매우 예외적인 행동이었다.

‘존폐만 판별하면 될 일을 두고…….’

생각이 이어졌다.

최소 육 개월 동안 한배를 탔다.

계약 이행은 목숨만큼 중요했다.

반면 병원 자체 문제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개입한 외부의 압력이었다. 때문에 간 이식 보험 논의에 누가 개입했고, 어떤 입김이 작용했는지 알릴 필요가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었다.

‘논의를 주도한 정한득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을 텐데 어떤 인간인지 알려 줘야 하나? 무슨 이득이 있을까? 어차피 내 선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고, 알려 준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지.’

환자 확보에 주력해도 모자랄 김지훈이었다.

신경이 분산되면 될 일도 망칠 수 있었다.

민정호의 콧등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심적 변화는 항상 고심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계약만 생각하면 되는 일을 두고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지금 고민해 봐야 답이 안 나오는 일이다. 존폐는 결국 내가 아닌 환자를 확보해야 하는 의사들에게 달렸다. 계약과 최종 판단에만 집중하자.’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별일 아닙니다. 그럼 이만!”

“자주 봅시다.”

민정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김지훈이 웃었다.

무례하게 보이는 태도마저 이제는 내성이 생긴 데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에겐 깍듯하게 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상대를 막론하고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말이다.

한 가지 중요한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무심코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민정호는 분명 고민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얼굴도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불편한 관계에서 확실히 벗어났다는 의미였다.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일수록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상대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생기겠지.’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번 만남에서는 똑같이 믹스 커피를 내더라도 빈 잔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의가 아니지.’

히죽히죽 웃던 김지훈이 후다닥 달려 나갔다.

일회용 블랙커피 넉넉히 샀다.

가장 비싼 놈으로.

어느새 회진 시간이 다 됐다.

파트 분위기 여전했지만 수술 세 건 확보했다.

그것도 다 메이저 수술이었다.

김지훈이 보릿고개에 쌀 한 그릇 얻어 온 가장처럼 의기양양 어깨를 폈다. 은근슬쩍 거드름을 피우며 후배 사인방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진아, 병옥아, 도훈아, 잘해라.”

뜬금없는 말이었다.

아직도 갑갑한 마음이 안 풀린 서도진이 반격하려는 찰나 강병옥이 급히 소매를 잡아끌었다.

김지훈이 이름을 불렀다.

점심때와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뭔가 있어!’

역시 가장 예리한 눈썰미를 지닌 후배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내일 부신 수술 논의할 거니까 다들 고민했으면 좋겠다.”

“당연하죠.”

고분고분 싹싹한 대답에 서도진이 연신 눈치를 주자 강병옥이 힐끗 주변을 살피며 속삭였다.

“수술이 있는 게 분명해요.”

“외래도 없는 날이잖아.”

“내과! 내과!”

이제야 감 잡았다.

간 이식 파트 수술 배분은 전적으로 과장이자 주임 교수인 김지훈에게 달렸다. 펠로우까지 마친 전문의로서 분한 일이었지만 합류할 때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잔뜩 기대하는 눈치를 본체만체 씨익 웃기만 했다. 이럴 때 보면 다들 영락없는 전공의 시절의 선후배였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한 나이가 더 먹어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진우야, 경철아, 회진 돌자.”

목소리마저 힘찼다.

혈복강으로 수술한 환자들이 상당히 안정됐다. 보호자들이 언제 큰 병원으로 갈 수 있는지 물으며 성화를 부렸지만 아직은 이송할 상태가 아니었다.

“최소 이삼 일은 더 있어야 합니다.”

외과 치료만도 일이 주 이상 걸리지만 전문 병원의 한계를 깔끔하게 인정했다. 환자 한 명이 아쉽다고 필요 이상으로 붙잡고 있다간 누구 말대로 소송 각이었다.

입맛이 쓰긴 했다.

장풍연 환자를 찾았다.

드디어 치료의 끝이 목전에 다가왔다.

고령에도 의지를 잃지 않은 환자와 변함없는 애정을 보인 가족들에게 고마웠다.

“내일 최종 검사를 시행하고 이상 없으면 모레 퇴원하셔도 됩니다. 한 달 후 외래 진료까지 끝나면 절 보실 일이 없네요.”

“감사합니다.”

“보호자분, 담낭 수술 날짜는 결정하셨습니까?”

“입원부터 퇴원까지 삼 일이면 된다고 하셔서 다음 주에 하려고요.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실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이보다 값진 선물은 없었다.

의사 입장에서도 무척 의미 깊은 환자였다. 복강경으로 시행한 담도 공장 문합술은 다음 환자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될 자산이었다.

‘휘플 라파로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제 강호성만 완전히 회복된다면 바랄 나위가 없었다. 퇴원 후 문제는 민정호에게 일임해도 좋다는 확신까지 얻은 마당이었다.

중환자실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아이 엄마가 보였다.

김지훈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누가 보아도 지나쳤다.

생각해 보면 응급실을 빼고는 처음부터 쭉 그렇게 행동해 왔다. 항상 옆에 붙어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는 경찰의 존재 때문인지도 몰랐다. 온 동네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고개 빳빳이 들어야 좋을 일 하나 없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대상이 틀렸다.

지난 팔 년간 아비로 인해 고통받고, 엄마에게 보호받지 못한 자식을 향해 머리를 숙여야 했다. 강호성이 행복한 웃음을 찾을 때까지 사과하고 또 사과해야 마땅했다.

다른 한편으로 동정이 갔다.

엄마는 여전히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해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가장 자주 접한 송진우에게도 말이다.

뿌리 깊은 공포가 엄마에게도 스며든 것이다.

‘죽일 놈! 얼마나 지독하게 학대했으면 엄마까지 저렇게 변했을까? 하지만 방조한 것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죗값은 치러야 해.’

솔직히 엄마에 대한 연민보다 아비란 작자에게 향한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더 강했다. 펴지지 않는 허리를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에게 미소를 보일 수는 없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지만 인간이란 그런 동물일 것이다.

김지훈이 살짝 고개만 숙였다.

형식적인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강호성이 웃었다.

중환자실에서, 그것도 아이가 환자인 경우에는 무척 보기 힘든 일이었다.

솔직히 울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송진우 선생, 요즘 호성이가 잘 웃네. 중환자실에 다른 환자가 없어서 그런지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아.”

“회진이 끝나면 바로 엄마를 볼 수 있어서 이때가 제일 좋고, 면회가 끝날 때가 가장 싫답니다. 오죽하면 회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답니다. 엄마에게 느끼는 정이 정말 대단합니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그게 이유였어? 이제 여덟 살 아이야. 단순히 엄마라는 사실 때문에 의존하는 거 아니야? 사랑 한번 못 받다 살갑게 구니까 변한 것 같지는 않고?”

“아닌 것 같습니다. 폭력이 가해질 때마다 엄마가 몸으로 막다 기절하길 반복했던 모양입니다. 호성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경찰도 엄마를 피해자로 여긴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여러 일이 있었고, 호성이에게만 집중하느라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강호성이 엄마에게 한없이 기댄다면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엄마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제기한 김지훈이었다.

실수를 넘어 명백한 잘못이었다.

언어폭력, 혹은 무언의 폭력 모두 육체적 폭행과 다를 바 없었다. 설혹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 할지라도 한 사람을 너무 쉽게 억측하고, 함부로 매도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엄마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서 정작 응급실에서 본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나? 정작 아비란 놈과 똑같은 짓을 했는지도 모른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확인해 봐야 했다.

급히 엄마를 찾으려던 김지훈이 걸음을 멈췄다.

송진우의 판단이 틀렸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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