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일단 꼬리 내려야 했다.
“서도진 선생, 각자 파트를 고려해야 하고, 우린 간 이식 수술 두 건이 있잖아.”
“한껏 미룬 탓에 날짜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써전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립니다.”
“조금만 기다려. 곧 보험이 되는데 더 많은 환자가 오지 않겠어?”
“그건 그때 가 봐야 알 일이고, 당직이나 서야 환자가 오다니 비참하네요.”
“설마 내 얘기는 아니지?”
‘명색이 과장인데…….’
김지훈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신세 한탄입니다만, 손일석 선생님 혈관마저 없었으면 어떤 일을 저질렀을지 모릅니다.”
서도진이 감히 인상을 썼다.
누구도 김지훈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정규 수술 하나 없는 과장의 비애였다.
화가 나기는커녕 너무 민망해 밥을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이놈의 식곤증은 또 뭘까?
휘리릭!
김지훈이 사라졌다.
후배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주말 당직의 피곤까지 몰려와 눈치 보며 한 시간 잤다. 고개가 툭 꺾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 건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다들 직장에서는 그렇게 졸잖아?
김지훈이 긴장을 끌어 올렸다.
곧 내과 공정식을 만나 간 이식 환자 문제를 상의해야 할 시간이었다. 수술을 미룬 두 명의 환자 이외에 얼마나 많은 환자가 수술을 원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과장의 사활이 달린 일이었다.
공정식을 만났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윤석진이 자청해 합석했다.
보험 적용 시기를 설명하고, 환자 예약 및 수술 일자에 대해 상의했다. 개원 후 첫 간 이식이니만큼 절대 무리한 시도를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삼 주 후 기존에 예약했던 환자 두 명을 일주일 간격으로 시행할 생각이야. 일정에 맞춰 입원시켰으면 해.”
“걱정하지 마. 첫 수술은 누가 하는 거야?”
“나부터 시작해서 일석이와 번갈아 가면서 해야겠지? 두 번째 환자는 일석이에게 컨설트 내줘.”
“오케이!”
목소리는 경쾌했지만 그래야 두 건이었다.
절로 간 이식 파트의 살벌한 눈초리가 떠올랐다.
딱히 하소연할 데도 없었는데, 수술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는 내과 동기들이야말로 고민을 털어놓기 딱 좋았다. 물론 질환 대부분이 공통분모지만 말이다.
“수술이 없어서 다들 눈치가 좋지 않아. 시작은 하게 됐지만 이후가 문제야. 우리 파트 입장에서 한 달에 두 건이면 굶어 죽기 딱 좋은 건수거든.”
“다들 칼바람 날렸을 텐데 답답하겠지.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잖아. 좋은 소식이 있어.”
“뭔데?”
“간 이식 환자 모임을 확실하게 만들었어. 대부분 돈 문제로 힘들어했는데 보험 적용이 결정됐으니까 최소 두 건은 더 하게 될 거야.”
김지훈이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이야?”
“곧 자리 만들 거니까 환자하고 가족들에게 생체 간 이식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이나 하셔.”
“맡겨만 줘. 야! 이렇게 되면 일주일 간격으로 한 달 내내 간 이식을 하게 되네. 숨통이 좀 트인다. 고맙다.”
“이 정도로 좋아하면 곤란해. 병원 이름이 여기저기 알려졌는지 외래 환자가 제법 와. 조만간 췌장암, 담도암, 담낭암까지 환자 서너 명 의뢰할 테니까 일정 잘 잡아.”
‘대박!’
공력 많이 줄었다.
하마터면 소리쳐 만세를 부를 뻔했다.
구석에 몰리긴 몰린 모양이었다.
김지훈의 입이 쭉 찢어졌다.
가뭄의 단비였다.
윤석진과 공정식이 함께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든든했다. 어느 분야건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어 발전한다는 말을 실감했다. 전문 병원 자체가 일반외과 수술을 목적으로 한 병원이기에 더욱 고마웠다.
졸지에 간 이식 네 건, 암 수술 서너 건이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신까지 하면 무려 여덟 건 내지는 아홉 건의 메이저 수술이 기다리고 있었다.
실실 웃음을 흘리던 김지훈이 돌연 눈가를 좁혔다. 똑같이 수술에 목마른 의사라 해도 파트 주임이자 과장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손가락질을 당하고도 남았다.
‘내 자신이 아니라 전체를 봐야 한다.’
엄밀하게 말해 트레이닝 병원이 아니었다.
고경철을 제외하면 펠로우라 해도 전문의가 아닌 의사가 없었다. 욕심도 적절할 때 부려야 욕을 안 먹는 법이고, 후배들은 이미 준비된 써전이었다.
‘거의 두 달에 걸쳐 시행하지만 생각만으로도 배가 다 부르네. 간 이식은 일석이와 나눠 하고, 나머지는 도진이, 병옥이, 도훈이가 각각 하나씩 맡는 게 좋겠어. 경석이 형에게 부신 수술을 넘긴 것도 자연스럽게 지나가겠구나.’
환자 입장을 십분 고려해야 했다.
수술 전 자신의 집도의로 알고 있던 의사가 바뀌면 불안해지기 마련이었다. 누가 됐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다.
“정식아, 석진아, 암 환자는 후배들에게 컨설트 내줘. 이준영 선생님이 보증하는 써전들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넌?”
“나야 간 이식이 있잖아.”
“일석이와 번갈아 하면 한 달에 두 건인데 괜찮겠어? 하긴 당직만 서도 충분하겠지. 그놈의 일복이 나까지 힘들게 할 줄은 몰랐어. 앞으로도 암 환자는 후배들에게 넘길 거야?”
김지훈이 머리를 긁었다.
“나도 중간중간 수술은 해야지. 간 이식만 기다리다간 손 녹슬어. 귀찮더라도 내가 다시 부탁할 때까지 적절하게 나눠서 컨설트 내면 안 될까?”
“그게 뭐 어렵다고? 알았어.”
술술 말이 통했다.
함께하길 정말 잘했다.
병원 구조상 내과가 활성화되면 수술은 절로 늘어난다. 수술이 많아지면 역으로 내과 환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어 곧 선순환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희망이 더욱 가까워졌다.
김지훈이 교수실로 돌아왔다.
시간 있을 때 철저하게 준비해야 사달이 안 나는 법이었다. 간담췌와 부신의 악성 질환 종류와 치료법을 찾아 세세하게 검토했다.
당직 여파 사라지지 않았다.
뻑적지근한 어깨를 수시로 풀어야 했다.
‘나도 나이 먹었나? 온몸이 뻐근하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후배 사인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지훈이 후다닥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상황이 달라졌지만 한 사람당 수술 하나 간신히 확보된 마당이니 내세울 일도 아니었다.
‘이놈의 눈치 언제까지 봐야 하지?’
“들어오세요.”
교수실 문이 열렸다.
‘민 부원장? 너무 자주 보는 거 아니야? 아! 간 이식 보험 적용이 어떻게 됐는지 아직 모르나?’
“시간 있으시죠?”
민정호가 대답도 듣지 않고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서울 병원처럼 규모가 크면 다른 일이라도 있겠지만 전문 병원 규모에서는 핑계 댈 일 자체가 없었다. 아마 민정호도 이미 다 알아보고 찾아왔을 것이다.
“하실 말씀이 있을 텐데요.”
“보험 문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한결같은 무표정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네. 외래 진료 중이라서 스승님을 아직 못 만났나? 내가 주장했던 수가보다 더 낮게 책정됐는데 뭐라고 설명하지? 처음 논의할 때 괜히 목소리를 높였어.’
슬그머니 눈치까지 보았다.
이래저래 하루 종일 다른 사람 눈치 봐야 하는 날인가 보다. 어쨌든 이런 내용은 주로 이준영 교수 아니면 송재덕 교수와 논의했던 민정호였다.
다소 의아한 일이었다.
“원장님께 못 들으셨습니까?”
“다른 일로도 바쁘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병원 경영 전반에 관한 문제 모두 과장님과 먼저 상의할 때라고 봅니다. 직함은 없지만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신현수 선생님과도 접촉을 늘릴 생각입니다.”
사인방을 인정한다는 말일까?
뜬금없지만은 않았다.
일전 서로 가슴을 열자는 말까지 했었다.
귀 기울인 것 같아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어떻게 결정됐는지 말씀해 주시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저 수가에 삼 주 후부터 보험이 적용됩니다. 삼 개월 후 병원 평가를 시행해 차등 지급한다는 안까지 통과됐습니다.”
세세한 부분을 상세히 설명했다.
민정호는 듣기만 했다.
참새 눈물만큼 호의적인 태도가 엿보인다고 해서 성격이 바뀌었을 리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원하는 사항을 하나도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말을 상당히 장황하게 하십니다. 고집을 꺾지 않으시더니 헛수고만 한 꼴이군요.”
여지없었다.
인정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런 꼴이 됐네요.”
“대책은 있습니까?”
평소 같았으면 연이어 폐부를 찌르는 말을 날리고도 남았을 민정호가 화제를 돌렸다. 번복할 수 없는 일은 아예 돌아보지 않는 타입인지도 몰랐다.
순전히 김지훈 생각이었다.
“다행히 내과 진료가 늘어나 수술 환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늘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내내 단 한 건의 수술이 없는데 예약된 수술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아픈 데 참 잘 찌르네.’
곧 있을 수술에 대해 설명했다.
민정호가 지그시 김지훈을 보았다.
“최악이군요.”
“최악이라니요? 메이저 수술만…….”
“희망 사항일 뿐 확정된 수술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과장님은 수술 팀 세 개를 책임져야 합니다. 일인당 한 달에 하나꼴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병원이 굴러갈 수나 있겠습니까?”
반박 자체가 불가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삼 개월 후 더 큰 위기에 빠지고도 남습니다. 있던 수술까지 미뤘으니 두 달 안에 반드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겠군요. 차등 수가도 다른 병원 일이 아닙니다. 그 속에 숨은 위험을 직시해야 합니다. 존립과 폐업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김지훈이 딴청을 부리는 척하며 웃었다.
‘이 정도면 폐업은 생각도 안 한다는 말이겠지? 겉과 속이 참 달라. 같은 건가?’
한편으로 의문이 스쳤다.
내용을 이제 막 안 사람치고는 상당히 예리한 분석이었다. 꼭 누군가에게 이미 들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민정호는 일에 관한 한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그사이에 공부 많이 했네.’
그렇게 넘겼다.
여하튼 십분 맞는 말이었다.
가뜩이나 수가가 낮은 상황이었다.
그 수준도 모자라 수가를 깎는 차등 수가에 걸려드는 순간 간 이식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악순환에 빠질 공산이 높았다. 만회하겠다고 비급여 항목을 남발하다간 더 빨리 무너지게 될 것이다.
“나도 답답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서울 병원 경험으로 볼 때 한 발만 내디디면 확실히 달라진다는 점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민정호가 입술을 모았다.
더 이상 김지훈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아무리 날고뛰는 의사라도 정한득과 정부를 넘을 수는 없었겠지. 솔직히 나도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진상건 이사장에게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일까? 아니면 희망이란 아주 불확실한 단어에 미래를 맡겨야 하는 건가? 혹은 김지훈이란 의사에게?’
지난 주말 정한득을 보며 진상건의 영향력과 치밀함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모든 일이 진상건이 원하는 대로 이뤄질 확률만 높아졌다.
반면 반대 경우수도 만만치 않았다.
전문 병원은 점점 강한 활력을 보이고 있었다.
정신적 지주인 송재덕 교수는 사심이 없었고, 이준영 교수는 천생 의사였다. 가장 격한 충돌을 우려했지만 오히려 묵묵히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술이나 치료에 관한 일은 문외한에 가깝지만 구성원 개개인의 자세와 능력을 인정해야 했다. 강호성의 일은 신선한 충격임이 분명했다.
특히 김지훈이란 의사에게 눈이 갔다.
젊은 나이에 과장을 역임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정보만 취합해도 보기 드문 의사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일복 하나만 보면 상당히 희한했다.
내심 당직 때마다 벌어지는 수술 건수를 보고 놀랐다. 그러나 일회성 혹은 우연에 불과할지 모를 일을 믿을 수는 없었다. 백번 양보해 일복을 인정한다고 해도 당직에 국한될 뿐 더 중요한 외래는 한산 그 자체였다.
‘수술 욕심이 대단한 것 같은데 동료부터 챙기고, 예약된 수술까지 미루는 걸 보면 여러모로 무척 판단하기 힘든 사람이다.’
여하튼 뾰족한 해결 방안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완만하게라도 매출이 증가하는 간암 파트와 복강경 파트, 내과가 아니었으면 진작 폐업으로 마음을 굳혔을 것이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민정호가 하지 말아야 할 실수라도 한 것처럼 정색했다.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여섯 달이란 기한을 말한 이상 지금은 현실과 상황에 집중해야 할 때다. 그것이 계약을 정확하게 이행하는 길이다.’
나름의 탈출구가 있었다.
현실을 따라가는 것도 그중 하나의 방법이었다.
“알겠습니다. 최저 수가로 결정된 이상 비급여 항목을 개발해야겠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전처럼 이견을 제시하실 겁니까?”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100퍼센트 보험이 적용되는 치료는 없었다.
하물며 간 이식이었다.
적절한 타협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