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87화 (1,087/1,329)

13화

생각지도 못한 병명이었다.

‘좌측 부신의 종양?’

부신(Adrenal Gland)은 콩팥 위에 달린 작은 구조물로 내분비계를 담당하는 중요한 장기였다. 내과 치료에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호르몬 교란이 심하면 심각한 증상을 유발하게 된다.

이 환자가 딱 그 경우였다.

“알도스테론(Aldosterone)증?”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축기 혈압이 170에서 180 사이를 오갔다. 심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혈청 포타슘, 즉 칼륨 수치가 지나치게 낮았다.

‘전해질 균형이 완전히 깨졌다. 양성인 선종이지만 이러다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빠른 치료를 요했다.

수술로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부신의 종양이라니 전문 병원에 어울리지 않는 질환임이 분명했다. 따지고 보면 내분비 외과가 따로 없어 잘못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환자를 불렀다.

“제 전문은 간, 담도, 췌장 쪽 질환입니다. 부신은 전문 분야가 아닌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먼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수술로 혹을 제거하면 완치가 가능한가요?”

김지훈이 신중하게 각종 검사를 다시 확인했다.

“추가 검사가 필요하지만, 현재 소견으로 볼 때 완치가 가능한 양성 종양인 선종으로 판단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환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게 고마워할 일은 아닌데. 하긴 악성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겠지. 젊은 나이에 이런 병에 걸리다니 많이 힘들었겠어. 그나저나 다른 선생 놔두고 왜 굳이 내게 진료를 신청했을까?’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지훈이 조용히 기다렸다.

“복강경 수술도 전문이라고 들었어요. 수술이 가능한지 상담을 하고 싶어서요.”

김지훈이 순간 멈칫거렸다.

“복강경이요?”

자주 시행하는 수술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발생 빈도가 낮은 췌장이나 담도 질환보다 훨씬 드문 데다 내과 치료가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복강 내 장기가 아닌 탓에 개복이 원칙이었다.

실제 의사들에게도 부신을 복강경으로 수술한다는 말 자체가 생소한 때였다. 그런 수술을 환자가 먼저 말하다니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다른 의사들이 복강경으로 시도하지 못했던 여러 수술을 성공시킨 김지훈이긴 했다. 하지만 대상 장기가 특수했고, 가장 최근에 수술한 장풍연 환자와도 수술 성격 자체가 상당히 달랐다.

결정적으로 복강경은 김지훈의 파트가 아니었다. 환자 없다고 욕심을 부리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분위기 나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죄송하지만 복강경은 이경석 선생님이 전문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미 원무과에서 복강경 전문 선생님이 따로 계시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전 선생님께 꼭 수술을 받고 싶어요.”

강력한 요청이었다.

상당히 난감했다.

“전문 분야만 문제가 아닙니다. 다행히 악성이 아닌 양성 선종이지만 부신은 콩팥 위에 위치해 접근이 어렵습니다. 주변에 위험한 혈관이 많고, 조직 자체가 약해 개복이 원칙입니다.”

“절 진료한 내과 선생님께서 선생님을 찾으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정말 불가능한가요?”

“복강경으로요?”

“예. 방법이 없을까요?”

누군지 몰라도 상당히 고마운 일이었지만 이런 의뢰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외과가 아닌 내과라 해도 김지훈을 알 정도면 수술 방법을 모를 리 없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절박해 보여 의아할 정도였다.

‘라파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얼굴이네?’

개복 시 발생하는 커다란 절개창은 굳이 젊은 여자가 아니라 해도 누구나 피하고 싶은 상처긴 했다. 하지만 어떤 수술이든 경험에 따라 위험이 크게 좌우되는 법이었다.

무엇보다 약으로 호전되지 않는 고혈압과 저칼륨혈증 때문에 상당한 고통을 받을 텐데, 확립되지도 않은 치료 방식을 원하다니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반면 수술 방법의 선택은 의사만이 갖는 절대적 권한이 아니었다. 환자 상태, 수술 난이도는 물론 환자의 요구까지 고려 대상이었다.

복강경 수술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

수술만 잘되면 완치가 가능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신랑 될 사람은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부모가 문제였다.

누구나 건강한 사위나 며느리를 얻고 싶어 한다.

결혼 전 몸에 칼을 대는 것 자체로 반대할 상황이라고 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보수적이고 완고한 집안인 모양이었다. 실제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자체까지 숨기고 있었다.

“시부모님 되실 분들을 속이고 결혼하면 안 되지만 헤어질 수는 없어요. 완치되면 아무 문제도 없잖아요.”

“선종이라면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선종이 확실하다고 하셨어요. 복강경으로 하면 상처가 거의 안 난다고 들었어요. 우리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결국 시부모 눈을 피하기 위해 복강경을 원한다는 말이었다.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의사의 결정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했다. 솔직히 모두가 비난하는 사람을 의사라고 치료해야 하는 상황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성이 아비라는 놈도 병원 오면 치료해야 하는 세상인데, 충분히 이유가 되고도 남긴 하네. 결혼 전부터 큰 흉을 만들도 싶지도 않겠지.’

더구나 결혼은 인생이 걸린 일이었다.

반면 평소 생각도 안 해 본 수술이었다.

그런 수술을 복강경으로 원한다니 너무 급작스러워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완치가 가능한 이상 수술 후 정상 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은 분명했다.

김지훈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문득 강호성이 떠올랐다.

어린 자식을 소유물인 양 학대하는 일이나, 이런 일 때문에 성인이 된 자식의 결정을 반대하는 일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두 일 모두 뿌리 깊은 유교 문화의 잔재일 수 있었다.

‘나 같아도 마음이 내키진 않겠지만 결혼을 못할 이유는 아니다. 사실 딱한 사정과 별개로 의사로서 시도해 봐야 하는 수술 아닌가? 가능할까?’

수술만 봐야 했다.

고려와 실제 결정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환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은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자칫 감정에 휘말리면 오판을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관건은 시도 자체가 가능한지 여부였다.

부신은 후복막에 완전히 묻혀 있다.

접근부터 박리까지 첩첩산중이지만 이미 췌장과 담도 종양을 수술하며 경험을 쌓았다. 해부학적 구조만 정확하게 인지한다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내분비를 담당하는 장기라는 사실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수술 중 부신을 잘못 건드리면 호르몬 폭발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개복 시에도 무척 주의해야 하는데 라파로로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까?’

발생 빈도가 무척 낮을 뿐 보다 수월하고, 일반적으로 시행하는 갑상샘 절제 수술에서도 항상 기억하고 유의해야 할 위험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 부러지게 잘라 결정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었다. 게다가 각자의 파트를 아무 이유 없이 정한 것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유선영 환자를 보았다.

환자에게 설명할 때는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마땅했다. 처지를 동정하거나 동의한다는 기색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판단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없는 수술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 전문 파트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 선생님과 상의도 거쳐야 합니다.”

“가능하다는 말씀이세요?”

“장담할 수술이 아닙니다. 호르몬, 특히 스테로이드 분비까지 담당하는 장기기 때문에 수술 도중 사소한 문제라도 일단 발생하면 바로 개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위험한가요?”

“수술 중 환자분에게 문제가 되는 알도스테론은 물론 스테로이드가 짧은 시간 내에 폭풍처럼 체내에 흘러들면 치명적인 상황이 초래됩니다. 환자분의 질환이 선종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성 높습니다.”

유선영 환자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평생 자신을 아끼고 보듬어 온 엄마와 아빠.

감정일 사랑과 이성일 결혼.

이해하며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연인과 펄펄 뛰며 반대할 것이 빤한 시부모가 될 사람.

정직함과 거짓말.

어쩌면 치료에만 집중해야 할 자신의 병보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과 처한 상황에 더 슬퍼하는지도 몰랐다.

결국 눈물까지 보였다.

혈압이 더 뛸 것이다.

감정적 동요로 호르몬 교란마저 심해질 것이다.

절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환자분, 자신에게만 집중하세요. 오직 결혼 하나 때문에 수술을 받는 것이 적절한 판단인가요? 본인에게 득이 될까요? 제가 보기엔 절대 아닙니다. 먼저 건강해진 후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서 결혼을 하셔야죠.”

유선영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찾아온 이유가 있는 이상 어떤 말로도 위안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설득한다고 당장 마음이 변할 리도 없었다. 그러나 희망까지 뺏고 싶지 않았다.

“유선영 씨의 결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 의사로서 최선의 방법을 찾겠습니다. 단, 복강경으로 한다고 100퍼센트 약속하지는 못합니다. 집도 역시 제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희망 섞인 말을 들었다.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럼 어떤 선생님이?”

“이경석 선생님이 복강경 전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병원 의료진 모두 머리를 모아 상의할 테니 목요일에 다시 오세요. 그러실 수 있죠?”

“목요일에 확실한 답을 주시는 건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타 병원에서 검사하신 자료가 필요하니까 두고 가십시오.”

“부탁드려요.”

유선영이 일어섰다.

왠지 모를 답답한 마음에 진료실 밖을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유선영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달달 떠는 연인의 어깨를 감싸는 모습에서 깊은 사랑이 보였다.

‘후우!’

까닭 모를 한숨이 터졌다. 그러나 환자의 개인적 상황에 공감할 수는 있어도 치료에 관한 한 영향을 받으면 안 되는 직업이 의사였다.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김지훈이 이경석을 찾았다.

마침 점심 식사를 하기 직전이었다.

“경석이 형, 오늘 수술 끝나는 대로 나 좀 봐요.”

“무슨 일 있어?”

“환자 한 명이 부신 선종으로 왔는데, 라파로로 수술받기를 원해요.”

“뭐? 부신을 라파로로? 호르몬 문제는 차치하고 후복막에 있는 데다 대정맥하고 신장 정맥이 바짝 붙어 주행하잖아. 너무 위험해.”

한마디로 딱 잘랐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상의하자는 거 아니에요? 만약 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형이 집도해야 하는데, 상의도 하기 전에 겁부터 내면 안 되죠.”

물 한 모금 넘기던 이경석이 캑캑거렸다.

“누가?”

“형이요.”

“내가? 너한테 온 환자잖아.”

“간담췌 부분을 뺀 라파로는 형 파트잖아요.”

“내 파트에 부신은 없어.”

“형답지 않게 왜 이래요? 다들 형만 보고 있네. 딴소리하지 말고 수술 끝나는 대로 교수실로 오세요.”

벙찐 이경석을 보며 김지훈이 꾸역꾸역 밥을 욱여넣었다.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구하기 위해 유선영의 개인적 상황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불현듯 속이 쓰렸다.

대단한 경험이 될 것이다.

냉정을 찾자 성패 여부를 떠나 이번 수술에 대한 욕심이 마구 솟구쳤다. 하지만 이젠 전문 병원 전체 의료진 모두 한 팀이었다.

독불장군처럼 치고 나가는 것보다 함께 갈 때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이경석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좋게 생각했건만 속은 여전히 쓰렸다.

‘수술도 없는데 양보라니 내가 미쳤지.’

김지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도훈은 물론 서도진과 강병옥까지 눈을 부라렸다.

김지훈이 집도한다는 전제가 필요했지만 부신이라면 파트 구분이 애매모호해 누가 수술을 들어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셋 중 한 명은 귀중한 기회를 잃은 것이다.

“어후! 어후!”

답답한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두 건의 간 이식 수술을 뒤로 미뤘을 때 상당히 아쉬웠지만 반박 못할 정당한 사유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사실 파트 주임 교수이자 과장인 김지훈이기에 환자를 잡았다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제 발로 찾아온 환자까지 다른 파트에 넘기는 일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찌릿! 찌릿!

뒤통수가 따가워진 김지훈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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