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86화 (1,086/1,329)

12화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이혁원과 이준영 교수를 대신해 응급실 근무를 서느라 퇴근하지 못한 손일석도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수술한 환자의 동반 골절 치료가 문제였다.

“김 과장, 헤모뻬리(Hemoperitoneum:혈복강) 환자 모두 골절 수술이 필요한데 어떻게 할 거야?”

“과장님, 보호자들이 정형외과 의사도 없이 치료한다고 항의할 수 있는데 빨리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걱정이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야. 오늘 상황을 봐서 전문 병원보다 모든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인식하는 것 같아. 다른 과 문제가 동반된 환자 치료에 대한 기준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

아직 애매모호한 위치에 선 전문 병원이었다.

손일석 말마따나 확고한 위상을 구축하기 전까지 무수히 반복될 가능성이 높았다. 자칫 심각한 문제가 유발될 수도 있었다.

애초에 외상 환자를 받지 않는다면 깔끔할 테지만 급한 환자는 눈에 보이는 병원부터 찾기 마련이었다. 바이탈이 흔들리는 경우, 지역 내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대형 병원이 없다는 점도 생각해야 했다.

환자와 보호자 입장, 내원 당시의 환자 상황, 병원의 치료 능력, 안전한 이송 여부 등등 고려할 요소가 너무 많아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과장 입장에서 생각해야 했다.

돈이 아니라 의료진 개개인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음 놓고 진료와 수술에 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주어진 책무였다.

그것이 결국 환자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기계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어. 이송과 수술 중 어느 쪽이 안전할지는 내원 당시 환자 상태를 본 당직이 판단하는 것이 맞아.”

“요즘 병원을 보는 인식이 그렇게 좋지 않아. 아무리 불가피했어도 만에 하나 일이라도 터지면 곧바로 소송 들어갈 수도 있어.”

“모든 병원이 그런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건 잘 알지만 과실이 있으면 책임지고, 없으면 당당하게 맞서야지.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다들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김 과장이 책임을 진다고?”

“과장 자리가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책임을 떠넘겨?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 놓치는 거 순간이란 것 잘 알잖아? 전문 병원도 병원이야. 후환이 두려워 이송부터 생각하면서 수술도 제대로 못하는 병원 만들고 싶지 않다.”

손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말은 좋은데 현실도 생각해야지. 오늘처럼 중증 외상 환자들이 올 때마다 큰 부담을 안고 갈 수는 없잖아. 과장이라고 모든 책임을 질 수는 없어. 법적 문제가 걸리면 당사자보다 더 힘들까?”

맞는 말이었다.

원칙이지만 이상적인 면이 강한 생각과 냉철하게 판단한 현실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절충할 수도 없을뿐더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전문 병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이런 일이 속출할 수도 있는데 갑갑하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다. 고민해 보자.”

부담스러운 대화를 나눈 탓인지 환자 상태와 수술 경위가 정확하게 전달됐는지 걱정이 앞섰다.

보호자를 다시 만났다.

“수술 전에 들으셨던 대로 환자 상태가 너무 급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골절은 시급하게 수술할 필요가 없지만 적절한 기한을 넘기면 안 됩니다. 이송이 가능한 대로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큰 병원으로 가면 안 됩니까?”

사람들의 기준은 항상 규모였다.

솔직히 모든 영역의 치료가 가능한 대학 병원을 선호하는 태도를 탓할 수 없었다. 다만 의사는 철저하게 환자 입장에서 판단해야 했다.

“불안한 마음 알지만 지금은 이송 자체가 위험합니다. 가능해지는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찜찜한 얼굴이었지만 일정 정도 수긍했다.

아마도 응급실에서 본 이준영 교수, 과장 직함을 달고 있는 김지훈, 비슷한 규모의 병원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의료진 덕분일 것이다.

그 탓에 같은 수술을 해도 비용 대비 수입이 적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지만 말이다. 더구나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가 때문에 모든 병원이 꺼리는 중증 외상 환자였다.

김지훈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네.’

민정호까지 떠올랐다.

고개를 흔든 김지훈이 퇴근 준비를 하다 말고 잠시 주저앉았다. 간 이식 문제와 다음 주 수술 건수에 대한 걱정에 머릿속을 정리할 심산이었다.

‘호성이도 다시 한 번 보고 가자.’

아뿔싸! 실수했다.

일복의 화신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잊었다.

수술 몇 개 했다고 끝날 리 없었다.

(고경철입니다.)

뻔질나게 전화받았다.

째깍! 째깍!

어느새 토요일 자정이 넘었다.

김지훈은 퇴근하지 못했다.

바짝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두 명의 혈복강 환자와 고경철이 수술한 복막염 환자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연이어 환자가 몰려들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수술 하나 끝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을 요하는 환자가 내원했다. 그나마 나머지 환자 대다수가 내과인 덕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탓에 이번에는 윤석진이 오랜 시간 응급실을 지켰다.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하는 김지훈과 수술 팀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응급실, 수술실, 병실을 끊임없이 도는 시계추네. 저런 일복을 어디서 받았을까?’

남의 일 아니었다.

내과 환자 역시 무척 많은 손이 필요했다.

더구나 잠을 잊은 토요일 밤이었다.

수술실은 잠잠해졌건만 응급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간만에 톡톡히 당직을 선 윤석진이 헉헉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잠깐 소강상태가 이어지자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퇴근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일요일 낮은 한가했다.

병동 환자까지 보아야 하는 이혁원과 고경철이 쌓인 피로를 풀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둠이 내리자마자 예고도 없이 상황이 급변했다.

김지훈이 얼굴을 내밀었다.

윤석진도 이내 호출됐다.

잠은 자게 해 주겠다는 듯 오전 내내 조용했던 응급실이 또다시 바빠졌다. 개원 후 한가함에 익숙해진 간호사들이 아우성을 쳤다.

간식 대령했다.

야식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돼 버렸다.

주말 당직 의료진이 그야말로 벼락을 맞았다.

사실 김지훈은 그 이상으로 피곤했다.

이혁원이 거의 모든 수술을 집도했다.

고경철도 능력과 수준에 맞춰 수술을 받았다.

믿고 메스를 넘겼지만 도리어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할 수 없기에 수술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때론 정신적 피로가 더 힘든 법이다.

‘역시 집도를 해야 안 피곤해.’

반면 고경철은 힘들지도 않은지 펄펄 날았다.

화염방사기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인간이다.

김지훈보다 두 배는 바쁘게 움직였다.

결국 비축했던 체력 다 소진됐다.

눈가에 걸린 어둠이 점점 퍼져 마침내 온몸을 잠식했다. 월요일 아침을 알리는 햇살이 창문을 비출 때쯤 푹 삭은 파김치로 변했다.

두 명의 써전이 완전히 뻗었다.

틈틈이 조각 잠을 잔 김지훈도 연거푸 하품을 해 대며 일과를 준비했다. 대신 주말 동안 수북이 쌓인 차트가 주는 감동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 만인가!

만세 부를 일이었다.

한편으로 김지훈 자신에게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결코 내 일복 때문만이 아니야. 지난 며칠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확실히 변했다는 징조야.’

불순하고 매정하다 할지라도 민정호의 의도가 통했기를 바랐다. 불법이 아닌 이상 홍보가 됐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김지훈이 졸린 눈을 보이면서도 즐겁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응급 수술은 힘에 부칠 정도로 많이 했건만 정규 수술은 단 하나도 없는 월요일인데도 말이다.

‘뭔가 다르게 보이네.’

병동에 활력이 돌았다.

생각해 보면 이준영 교수와 이경석 파트는 이미 환자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였다. 손일석 역시 혈관 수술을 시행한 이후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

반면 간 이식 파트와 췌장 파트는 다소 초조한 기색이 뚜렷했다. 보험 적용이 된다는 소리에 환호했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의사는 환자 때문에 산다는 말이 맞았다.

주말 동안 많은 환자를 입원시켰다. 덕분에 불안했던 마음이 많이 희석된 덕에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활력이 이제야 보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궤도에 오르면 손일석은 물론 후배 사인방까지 각자 수술을 잡을 것이다. 그 전까지 과장으로서, 전문 병원 설립을 주도한 의사로서 책무를 다해야 했다.

‘어떤 의도를 가졌든 병원의 존립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민 부원장과의 관계도 확실하게 정립해야 한다.’

어쩌면 이미 과도기를 지나 도약의 첫걸음에 섰는지도 몰랐다. 가장 신경이 많이 가는 강호성과 장풍연 환자의 회복이 더욱 그런 생각을 강하게 했다.

마침 송재덕 교수가 물었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호성이는 어떠니?”

“내일 아침에 검사 결과 확인한 후 괜찮으면 병실로 올릴 생각입니다. 이 상태로 쭉 회복되면 일이주 후에 퇴원까지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됐다. 잘됐어. 병원비도 걱정 마라. 지난 토요일에 시장까지 오고 난리가 아니었다. 난리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다 잘될 거야. 사람들 관심이 없었으면 이런 일이 생겼겠니? 여론이란 게 무섭다. 무서워.”

민정호의 의도 대부분이 현실로 변했다.

절대 가만히 앉아 이룰 일이 아니었다.

민정호는 치밀한 성격과 강한 추진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 분명했다. 가자미눈을 뜨며 마음 한구석 의심의 눈초리를 갖고 있어 유리할 일이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사람이 분명해.’

김지훈이 애써 표정을 숨겼다.

“기대는 했지만 시장이 직접 오다니 별일이네요.”

“그게 다 표다. 표.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만을 바라자. 그치? 그래야겠지? 어쨌든 민 부원장이 기자부터 공무원까지 열심히 만난 덕이다. 허허허! 큰 도움이 됐어. 큰 도움이.”

여유 섞인 웃음을 듣자니 때 이른 걱정이 다가왔다. 아비라는 놈은 상응하는 벌을 받고도 남지만 함께 처벌될지도 모르는 엄마가 문제였다.

“원장님, 호성이가 퇴원하면 갈 데가 있을까요?”

“민 부원장이 그 문제도 고민하는 눈치더라. 아동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을 알아보는 것 같아. 그렇게 말투가 차가운데 하는 행동은 안 그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딱 그 말이 맞다. 맞아.”

“정말입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가 그 얘기를 꺼냈더니 병원에만 신경 쓰래. 그게 그 얘기 아니니? 그치? 내 말이 맞지?”

차가움 속에 뜨거움을 숨긴 걸까?

‘스승님도 처음에는 무심하고 무뚝뚝한 줄만 알았는데, 민 부원장도 그런 걸까?’

확실히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소 몇 개월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나둘 알아 가다 보면 마음이 통할 날이 올지도 몰랐다.

현재로서는 정말 난망해 보이지만 말이다.

회진을 마쳤다.

김지훈이 수술실로 향했다.

비록 정규 수술 하나 없는 처지였지만 반드시 봐야 할 수술이 있었다. 이경석이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시행하는 탈장 수술이었다.

모든 과정을 유심히 살폈다.

자타가 공인하는 일복을 가진 김지훈이었다.

불가피하게 탈장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방식이 갖는 의미였다. 언제 어떤 질환에 적용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두세 번 했을 텐데 경석이 형 손이 참 자연스럽네. 이걸 어떤 수술에 응용할 수 있을까? 아후! 간 이식 환자 때문에 내과도 찾아야 하는데 언제 만나지? 석진이는 피곤할 테니까 점심 때 정식이부터 만나야겠다.’

이왕 발 디딘 수술실이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오전 내내 참관을 했다.

특기할 점이 있었다.

간암 파트지만 전문의 된 이후 위장관에 전력했던 신현수가 위암 수술을 복강경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복강경 수술 또한 전문 분야로 내세웠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한편으로 미안했다.

‘간 이식을 제대로 잡았으면 더욱 스페셜하게 수술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수술 방 간호사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과장님! 여기 계셨네요.”

“무슨 일 있어요?”

“원무과에서 지금 진료 가능하시냐고 연락 왔어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귀가 번쩍 뜨일 말이었다.

진료 날은 형식에 불과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수술이 있는지 없는지 잘 알고 있는 외래 간호사가 빤히 보고 있는데도 짐짓 간신히 시간을 낸 것처럼 부산을 떨었다.

의자에 앉다 말고 이내 신중해졌다.

이번 환자 역시 진료 날조차 확인하지 않고 내원했다. 여전히 병원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었지만 그 자체가 성급한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내과 외래를 경유하지 않았다.

간 이식은 무조건 내과 진료부터 받도록 조치했기에 더욱 궁금했다. 더구나 김지훈을 콕 집어 의뢰한 경우기에 오히려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다.

‘어떤 환자일까? 외부 병원에서 바로 수술을 의뢰한 환잔가? 기본 검사는 다 했단 말이겠지?’

초진 차트를 펼쳤다.

의뢰서가 동봉돼 있었다.

유선영, 25살 젊은 여자 환자였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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