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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85화 (1,085/1,329)

11화

당직실에서 뒹굴뒹굴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손일석이 하품을 하며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김 과장, 벌써 세 시야. 한물갔나 봐.”

“편하고 좋지, 뭐. 빨리 퇴근해.”

“야! 이제 한가함을 즐긴다 이거야? 그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지. 안달복달한다고 환자가 오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난 월요일 수술이 많아서 이만 갑니다.”

혈관 수술이 밀려드는 모양이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문득 천인공노할 일임에도 민정호 의도대로 병원 홍보가 톡톡히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해야 할지, 매정하다고 탓해야 할지 기분이 묘했다.

‘매일 기사가 나다시피 하니까 알려지긴 많이 알려졌겠지. 이렇게 되면 우리 파트가 제일 문제네. 수술을 미룬 환자들부터 빨리 입원시켜야겠다.’

오전 일을 생각하면 기운이 빠지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지만 최소 환자에게 한 약속은 지켰다. 환자 부담이 뚝 떨어졌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이 됐다.

‘민 부원장이 어떻게 나올까? 정말 비급여 항목을 발굴해 낼까? 수술이 기대에 못 미치면 용인해야 하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병원 경영에도 일정 부분 신경 써야 하는 과장임을 무시할 수 없었다. 수술에만 전념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손일석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갑니다.”

“주말 잘 보내.”

“편하게 생각해. 낮은 수가 덕분에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두 배 세 배로 몰려올지도 모르잖아. 다다익선이란 말도 있잖아.”

“박리다매겠지.”

마음에 없는 소리까지 나왔다.

‘에휴!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당장은 다른 환자라도 많아야 하는데 응급실까지 절간이네.’

손일석이 당직실을 나가기 직전이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왜애애애앵!

“선생님, 단체 교통사고예요.”

퇴근도 잊고 본능처럼 달려 나간 손일석의 눈길이 김지훈에게 꽂혔다. 전문 병원 개원 후 최초로 네 명의 환자가 동시에 이송됐다.

결단코 이런 적이 없었다.

허겁지겁 나타난 이혁원과 고경철도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툭하면 아수라장으로 변했던 서울 병원 응급실이 휙 스쳤다.

의사 넷에 환자 넷이었다.

환자 중 셋은 얼굴 전체가 피투성이였다.

전문의, 전공의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가장 경해 보이는 환자를 고경철에게 맡기고, 전문의 세 명이 남은 환자에게 달려갔다. 이미 가운을 벗은 손일석도 와이셔츠 차림으로 환자를 살폈다.

난리 났다.

모처럼 몰려온 환자에 간호사는 물론 방사선과 기사까지 비상이었다. 다행히 디지털화된 시스템 덕분에 많은 시간을 아꼈다.

속속 검사 결과가 나왔다.

사고가 꽤 심하게 난 모양이었다.

혈복강 환자 둘.

장 파열에 의한 복막염 의심 환자 한 명.

모두 응급 수술을 요했다.

천운처럼 뇌 손상을 입은 환자는 없었지만 골절이 문제였다. 즉시 이송하기엔 환자 상태가 너무 나쁜 데다 골절은 생명에 지장이 없기에 일반외과 문제부터 해결한 후 이 차 수술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게다가 서울 병원 근무 시절 얻은 지식과 경험이 여전히 유효했다. 바이탈을 잡으며 동시에 부목을 대 골절 부위를 재빨리 안정시켰다.

‘중증 외상 센터가 따로 없네. 어쩌다 있는 일 때문에 정형외과를 둘 수도 없고, 이송 시기까지 문제구나.’

전문 병원의 한계와 여러 문제점이 떠올랐지만 차후에 생각할 일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기에는 바이탈이 심각하게 흔들렸다.

“수액 풀로 틀고, 빨리 수혈합시다. 폴리, 엘 튜브 가져와요. 고경철 선생, 지금 즉시 마취과에 스케줄 내. 양방이다.”

“양방이요?”

“인원이 되잖아? 빨리 내.”

복막염 환자는 다소 여유가 있는 반면 혈복강은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었다. 동시에 수술하지 않으면 환자 한 명을 놓칠 상황이었다.

“일석아, 퇴근 미뤄.”

“당연하지.”

손일석이 있어 양방으로 수술하면 되지만 복막염 환자가 대기할 응급실이 문제였다. 의사 한 명 없는 상황을 피할 길이 없었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었다.

‘누굴 부르지?’

그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

여전히 거구를 자랑하는 의사가 들어섰다.

“응급실은 내게 맡기고 빨리 수술 들어가.”

아예 당직 근무가 없는 부원장이 응급실을 지키게 됐다. 순간 모두 당황했지만 이준영 교수는 여기가 내 자리라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표정만 보였다.

“환자 안 보고 뭐 해?”

“감사합니다.”

김지훈은 일 초도 주저하지 않았다.

간신히 바이탈을 잡았다.

마취과도 첫 번째 수술 준비를 마쳤다.

“환자 옮깁시다. 일석아, 다음 환자 부탁해.”

“먼저 올라가.”

손일석은 당직이 아니었다.

그것도 남들 다 싫어하는 주말이었다.

졸지에 언제 끝날지 모를 수술을 하게 됐건만 생색조차 내지 않았다.

오직 환자만 보고 있었다.

천생 써전이었다.

바이탈을 다루는 일반외과 의사는 그런 존재여야 했다. 자신의 생활을 희생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띠띠띠띠띠!

급박한 심박동 소리가 두 개의 수술실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당직인 윤서연은 물론 김진호 교수까지 나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혈복강 수술의 핵심은 정확성과 신속함이었다.

비록 단 두 명으로 이뤄진 수술 팀이었지만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경험과 실력을 갖춘 써전들이 집도의였다. 기구만 적절하게 이용하면 모자란 인원의 공백을 메우고도 남았다.

더욱이 이혁원은 대체할 수 없는 퍼스트였다.

고경철은 최선을 다해 김지훈과 호흡을 맞췄다.

병원 전체 수술 건수가 적었지만 전공의가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이 도리어 득이 된 것이 분명했다. 특히 간암 수술을 빠지지 않고 들어가 기본기를 더욱 탄탄하게 쌓았다.

“수처! 타이! 컷!”

바닥에 쌓이는 피에 젖은 거즈가 빠르게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흔들리던 바이탈이 극적으로 잡히며 고조됐던 긴장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띠! 띠! 띠! 띠! 띠!

두 환자 모두 무사히 눈을 떴다.

김지훈은 쉴 틈이 없었다.

복막염 환자 수술을 곧바로 해야 했다.

“일석아, 다음 수술 끝날 때까지 수술한 환자 부탁해. 응급실은 이준영 선생님께 맡겨야겠어.”

“걱정하지 마.”

환자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최고의 써전이 응급실과 병실을 지킨다 해도 손 하나가 더 있으면 그만큼 안전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집도 기회를 거의 잡지 못하는 고경철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분명 쉽게 접하지 못할 기회였다.

‘급할수록 침착해야 한다. 경철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술일까? 다른 문제는 없을까?’

“이혁원 선생, 소장 파열 같지?”

“CT 소견상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철이 어떻게 생각해?”

“주시려고요?”

“대장 파열만 아니면 할 수 있을까?”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어. 준비시켜.”

수술이 시작됐다.

집도의 자리에 선 고경철이 바짝 긴장했다.

서울 병원 같았으면 일 년 차 전공의는 꿈도 못 꿀 수술이었다. 당직 때 수술을 주겠다는 말에 내심 마이너 수술이 많이 오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도움 될 일이 없었다.

김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고경철 선생, 집도의가 가장 중요하지만 수술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자신을 갖고 시작해.”

그렇다.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팀이 수술한다.

더구나 과장인 김지훈이 퍼스트였고, 세컨 자리에 선 이혁원은 쳐다보지도 못할 실력을 가진 전문의였다. 실수가 발생하기도 전에 바로잡을 것이다.

“고경철 선생, 김 과장은 일 년 차 때 더 어려운 수술도 했어. 내가 보기엔 김 과장보다 훨씬 더 뛰어난데 뭘 그렇게 긴장해?”

김진호 교수까지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고경철이 훅 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다. 기본을 잊지 말자.’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고경철의 손에 들린 메스가 반짝였다.

고경아가 보았다면 울컥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예상대로 소장 파열이었다.

충격이 큰 교통사고가 으레 그렇듯 단순 봉합으로 해결할 상태가 아니었다. 손상이 없는 부분에서 자르고 다시 연결해야 했다.

고경철이 수술 과정을 빠르게 상기했다.

계획을 세우며 손을 내밀었다.

“장 겸자.”

따르륵! 따가각!

순서대로 차근차근 진행했다.

손이 막힐 때마다, 긴장이 치솟을 때마다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김지훈이 자신감을 북돋았다.

“잘하고 있어. 이대로만 진행해.”

소장 일부를 잘랐다.

이제 문합이 남았다.

절대 점막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수술 전 이혁원이 김지훈의 결정을 알리며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었다.

“수처! 타이! 컷!”

조금씩 소장이 연결됐다.

김지훈은 말이 없었다.

제대로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마지막 연결 부분만 남았다.

가장 핵심적인 과정이었다.

고경철이 긴장 속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흠뻑 젖은 수술복, 바싹 마른 입술이 주는 불편함을 모두 잊었다. 그동안 배우고 쌓은 실력을 단 두 바늘에 모두 쏟아부었다.

“타이! 컷!”

마침내 문합을 끝냈다.

고경철이 자신도 모르게 김지훈을 보았다.

“집도의가 수술 중에 어디를 보는 거야? 아직 안 끝났어. 마지막까지 집중해.”

된소리만 들었다.

흠칫 놀란 고경철이 눈가에 힘을 주며 정확하게 연결했는지 확인했다. 손가락 한 마디가 맞닿을 정도로 소장 내부 공간까지 충분히 확보했다.

“진행하겠습니다.”

김지훈과 이혁원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에 이어 복부 절개창까지 모두 봉합했다.

띠! 띠! 띠! 띠!

고경철이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환자가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혹시 수술 중 빠트린 부분이 없는지 전전긍긍 발을 굴러야 했다. 최고의 써전 두 명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는데도 말이다.

새삼 김지훈을 비롯해 선배들 모두 왜 회복실까지 가서야 안도하는지 깨달았다. 아뻬 정도는 가볍게 여겼을 것이란 생각을 가슴 깊이 반성해야 했다.

“끄으으응!”

환자가 몸을 비틀며 눈을 떴다.

힘찬 호흡을 따라 퍼지는 역겨운 마취제 냄새가 반가웠다. 이제야 목을 돌리며 긴장을 해소하는 김지훈과 이혁원이 정말 새롭게 보였다.

“환자 옮깁시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환자를 회복실로 옮겼다.

오더를 내던 고경철이 훅훅 거친 숨을 내뱉었다.

진정한 메이저 수술이라 할 수 없지만 마이너 수술도 아니었다. 더 큰 수술을 하기 위한 첫걸음이자 첫 도약이 분명했다.

“후우! 후우!”

돌연 감동이 몰려왔다.

잘 끝냈다는 뿌듯함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주말 늦은 시간까지 병원을 지키고 있는 아버지 생각에 서둘러 응급실로 향하는 이혁원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고경철 선생, 환자 올려도 되겠어?”

“예. 잘 회복됐습니다.”

“수고했다.”

딱 여기까지였다.

김지훈이 휴게실을 가리켰다.

감동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화염방사기를 꺼내 들었다. 화르륵! 화르륵! 사방이 불바다로 변하며 고경철이 처절하게 타들어 갔다.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김지훈의 눈은 정말 매서웠다.

공과 사를 구분하라지만 명색이 매형과 처남 사이인데 인정사정없이 몰아쳤다. 너무한다는 생각이 살짝 드는 순간 마지막 한마디에 사라졌던 감동이 다시 휘몰아쳤다.

“다음 수술에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안 보이면 지금 이 시간이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사실 잊지 마. 고생했어. 나가 봐.”

김지훈이 점점 채찍과 당근의 고수로 변해 갔다.

덕분에 고경철 또한 무엇을 유념해야 하고, 무엇을 더 노력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처졌던 어깨에 새로운 각오의 힘이 팍팍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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